이성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입니다.
이 말을 최근 수차례 반복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 의미를 이해 못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냥.. 이해 못하겠다, 거부하겠다,, 이러면 그나마 괜찮은데,,, 상대더러 무슨 파시즘을 지지한다느니 불가능한 것이라느니.. 이러면..
허허..
자! 인류문명은 초기부터 종교사회였습니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규율하고 인간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데에 종교가 필요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교는 끊임없이 변천해왔고, 그러다 종교가 물러나고 그 자리를 이성이 차지하게 됩니다.
(종교사회의 이성을 종교이성 혹은 신성이라고 말하며, 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성이라는 말과 구분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믿음을 필요로 하고, 이는 교조주의를 낳습니다.
교조주의적인 입장, 태도가 바로 개인 및 집단의 이기심, 사랑과 결합하여 극렬함을 낳고, 자극적 선동과 함께 이념의 극심한 대립, 갈등, 충돌, 전쟁, 파멸을 낳은 경험을 인류는 했습니다.
설령 교조주의적 태도의 대상이 (집단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자유나 인권이라 해도 반문명, 반지성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정책을 제안하고 펴나갈때, 그것이 가치주의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대중의 동의를 얻기가 쉽지 않고, 이해관계에 놓인 집단들간의 이기주의 충돌이나 정치적 파워 대결만으로 이어져 비용이 커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교조주의로 삼고, 그런 행태에 익숙해진다면,, 그 또한 막장입니다.
인간은 개인이 독립적 단위이기도 하지만,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안전과 행복을 얻고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즉, 개인과 공동체 모두 중요한 것이고, 이 두가지를 어떻게 잘 조화시킬 수 있는가가.. 현대문명의 과제로 자리잡아왔습니다.
실제로,, 자유와 관련하여, 개인쪽에 치중해 있던 자유주의는 공동체 쪽으로,, 공동체 쪽에 치중해 있던 공화주의는 개인 쪽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자유'라는 말의 개념은 하나가 아니고 학자들이 여러 개념을 만들어내 상존해 왔고, 개인과 공동체 양쪽을 아우르자는 생각으로 각각의 장단점을 논의,논쟁해왔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유가 너무 당연하고 소중해서 마치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현실과 필요성에 따라 인위적으로 형성해가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절대불변, 절대상위의 가치가 아닙니다.
지성의 세계입니다.
그렇게 했다간 소중한 가치들이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까 우려됩니까?
그건 사회 구성원들에 달린 문제입니다.
양식을 갖추고 여유가 있을수록 괜찮습니다.
겁난다고 교조주의라는 안식처를 찾을 일이 아닙니다.
자! 이제 북한 얘기를 해봅시다.
비록 배급제가 붕괴하고 장마당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 자유가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조선,대한제국->일제시대->김씨왕정을 경험했던 그들은 자유를 경험한 적 없고 자유를 모릅니다.
왜 이건 국가가 나를 책임지지 않고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는가, 왜 저 문제에 대해 국가가 손대지 않는가,,
내가 사회에 소속되어 살면서 나라는 개인의 어디까지를 자유로, 어디부터는 방종으로,
어디까지를 국가, 즉 공동체가 맡고, 어디부터는 개인들이 알아서 하고..
제한해야 하는 것과 통제해야 하는 것을 구별, 결정하고..
이런 것들에 대해 어렸을때부터 (깊이있게 알고 모르고는 차치하고) 교육이나 관찰,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익숙해지는 우리들과는 다른 환경에서 사회화된 사람들입니다.
특히 그들이 증오표출에 아주 익숙하다는 점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북한에서 어느 순간 김씨일가가 무너지고 다른 나라 모방해 자유체제가 수립된다 하더라도,, 그 새로운 환경, 질서를 통해 안정적인 발전, 번영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이 북한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김씨일가 찬양 교육만 받아왔고, 권력을 통해 하고 싶은거 아무거다 다 해왔던 곳이고, 주체사상 외엔 그 어떠한 것도 부정되어 왔던 곳입니다.
그 일은 우리가 해줘야 합니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통치하는게 아닌, 우리가 그들을 통치해야 합니다.
설령 그 내용이 우리와 비교할때 상대적으로 차별적인 억압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이 알아서 해라~ 내버려 두는 것보다 주민들 안전 및 행복증진에 더 낫습니다.
우리가 통치 하는 이상,, 그 귀결점은 결국 우리와 같은 수준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는 점은 내외에 명확히 선포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들에겐 없던 자유를 형성해가는 과정으로 볼 일이지,, 어떻게 감히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로 볼 일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왜 그러는지에 대해선 당연히 그들에게 말해주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과거에 남한사회에 정착한 어느 탈북자가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자신은 이 사회를 평생에 걸쳐 배워나가야 한다고.
우리가 태어나 어렸을때부터 이 사회에서 살아오며 부지불식간에 자연스럽게 문명화된 점을 결코 경시해선 안됩니다.
갓난아기때부터 야생의 짐승무리에 섞여 자라난 사람을 인간 사회의 일원으로 변화시키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다른 인간사회에서 자라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우리가 현행 법체제에서 할 수 있는 일인가..
난 의지의 문제일 뿐이라고 봅니다.
법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해라~ 마라~를 규정한 것이고, 이 법률은 헌법에 구속받지만,,
헌법은 법률만큼 구체적인 것이 아니고,, 그 해석이 경직되지 않은 가변성을 불가피하게 지니게 됩니다.
우리 헌법이 이미 분단현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지역을 특별구역으로 만들고 그 구역을 한국화, 남한화 시키는 과도기적 특성을 지닌 법제를 헌법이 용인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북한지역에 적용되는 법제가 우리 헌법(O/S)에서 못돌리는 프로그램이 아닌 것이고,
종국적으로 이 특별성을 제거해 북한지역에서 우리 OS를 남한사회와 마찬가지로 돌리고, 그 위에 동일한 프로그램을 구동할 수 있도록,, 밑바닥에 있는 펌웨어를 바꾸는 과도기인 것입니다.
테크닉이고, 나는 10년 정도를 생각합니다.
여전히 문제는 있겠지만, 그 정도면 그럭저럭 잘 부대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