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은의 그 나라, 대만 그리고 반한감정 ①] 한류 열풍의 중심지 대만엔 뿌리 깊은 반한 감정.. '고마움을 모르는 나라' '배신의 국가' 이미지
[편집자주]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몇 년 전 호주에 있었을 때 대만(臺灣)인 친구들과는 유독 친해지기 쉬웠다. 아무래도 같은 아시안끼리 공유하는 정서가 유사한 데다, 친구들이 한류 덕택인지 K-Pop가수나 드라마를 많이 알고 있어 말도 잘 통했기 때문이다. 몇몇 친구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도 했다. 매일 같이 대만인 친구들과 가라오케(노래방), 한국 음식점, 대만 디저트점 등을 다니며 즐겁게 보냈다. 이때 친구들과 그래스젤리, 타로 떡 등이 들어간 대만식 바오빙을 자주 먹었는데, 그 매력에 빠져 지금도 가끔 찾아다니곤 한다.
그런데 웃음 가득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순간순간 친구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이것이다. 하루는 한국식 분식집을 갔는데, 함께 김밥을 먹다가 "일본에도 김밥과 유사한 음식이 있다" "원조는 어디 것일까"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대만인 친구 세 명이 내게 "너는 어떻게 생각해" 묻기에 내가 "김밥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 것 같아. 일본 노리마끼에서 유래됐다는 사람들도 있고, 한국 김쌈에서 유래했다는 사람들도 있고…"라고 말하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심지어 웃으면서 "일본 것이겠지" "역시, 너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이구나"라는 장난을 치는 친구도 있었다.
대만은 코트라(KOTRA) '2015년 한류의 경제적 효과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한류지수 세계 11위로 올라올 정도로 한류 열풍의 중심지다. 하지만 동시에 '반한 감정'도 널리 퍼져있다. 한국 제품과 한국 문화에 대해선 흥미가 높지만 한국 국가와 한국인에 대해서는 부정적 인식이 널리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훗날 일부 대만인 사이에서는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마치 정설처럼 퍼져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2015년 대만 학자 궈추원(郭秋雯)이 대만인의 한국인에 대한 인상을 조사한 결과 강한 민족성, 애국, 승부욕, 적극성, 체면중시 등의 키워드가 나왔다. 2017년 그가 다시금 조사한 결과 술, 체면 중시, 성형, 보수적, 단결, 급한 성격, 배타적, 이기적, 승부욕 등의 대답이 나왔다. 그는 '한류 열풍'에 휩싸인 대만에서 전반적으로는 한국을 싫어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개인으로서 한류를 좋아하더라도 집단의 흐름에 따라 집단의 반한에 따라야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반한 감정이 심한 세대는 40~50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만에 반한 감정이 널리 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복합적 원인이 마구 얽혀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고마움을 모르는 데 대한 일종의 배신감으로 보인다. 대만인과 대화하다 보면 '1992년 한국-대만 단교'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1949년 중화민국(中華民國)이던 시절 수교해 장기 우방국으로 지냈던 한국이 갑자기 단교를 통보했고, 그 과정이 도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인들 다수는 "'하나의 중국'(一個中國政策) 원칙에 따라 중국의 압박이 거셌다"거나 "대만과의 단교가 도미노처럼 이뤄지는 판국이었기에 오히려 신의를 오래 지킨 편이다"라고 받아친다.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타 국가들과 우호적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대만이었지만, 이전까지 공산주의 국가들과만 교류하던 중국이 1978년 경제현대화를 기치로 개혁개방정책을 시작해 국제사회로 나오면서 급격히 무력해졌다. 많은 국가들은 '중국이냐 대만이냐'를 선택해야만했고, 대다수 국가는 수교와 통상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중국을 택했다. 한국 역시 이 같은 흐름에 따라 대만과 단교하고 '비공식 최고관계'로 전환했다.
불과 몇 달 전인 지난 5~6월에도 도미니카, 파나마 등이 연달아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이제 대만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는 20여개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과정 한국에게 특히 섭섭한 감정을 느끼는 건 그전까지의 우호감이 상당히 컸고, 정치적 동맹이 굳세었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지만, 대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당시 조선처럼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대만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훙커우 공원 의거(4·29의거)에 대해 깊이 감명 받고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한 항일독립운동 지원에 나섰다. 대만의 초대 총통 장제스는 의거에 대해 "중국 100만 대군도 못할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찬사했다. 하지만 타국의 망명정부 지원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국제 사회 눈을 피해 '중국국민당'이나 장제스 개인의 명의, 혹은 그의 부인 쑹메이링 여사의 명의로 지원금을 지급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실장을 지낸 민필호 선생은 "우리의 대중국 외교는 '구흘적 외교'(求吃的外交·얻어 먹는 외교)다"라면서 가족을 꾸릴 생활비나 사무실 유지비용 등을 모두 대만의 지원에 의지했다고 밝힌 바 있다.
양측 독립 이후에도 한국과 대만은 모두 공산 진영과의 싸움에 돌입하는 처지에 처했다. 중국에서는 1946년 중화민국 정부를 이끄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내전이 펼쳐졌다. 결국 공산당이 승리해 국민당이 1949년 대만으로 패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한국 역시 한국전쟁을 겪고 남북이 쪼개져 남측 만의 정부를 수립해야만했다. 중화민국은 '반공' 차원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인 한국을 1949년 1월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국가로 승인하고 서둘러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위 같은 과정을 겪으며 대만은 항일·반공 동맹으로 엮인 두 나라의 관계가 바뀔 수 없는 공고한 무엇이라고 인지하게 됐으며, 이것이 유난히 한국과의 단교를 섭섭하게 생각한 원인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이 같은 '고마움을 모르는 나라,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공고해진 데는 일제 식민지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도 기여한 것 같다. 대만의 역사 교과서와 중국·한국의 교과서 사이에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크다. 세 곳의 역사 교과서 모두 일본 식민지 기간 수탈과 억압이 있었고, 이에 따라 저항이 거셌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대만은 일제가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서술한다. 실제로 대만의 다수(80~85%)를 차지하는 내성인(內省人·중국 명·청시기 이주한 한족이나 원주민 등 대만 토박이) 중에는 일제 식민지 때 보다는 이후 외성인(外省人·1949년 국민당이 본토에서 패주하자 국민당 정부와 함께 이주한 대륙인)들이 대만에 들어와 내성인을 핍박했다고 생각해 이 시기를 더욱 고통스럽게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외에도 '한국에 대한 열등감'도 대만 반한 감정의 원인으로 꼽힌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만과 한국의 경제적 발전 양상은 유사했는데,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대만은 국제적 힘이 강했고 경제적으로도 '아시아의 4마리 용' 중 으뜸으로 꼽혔다. 하지만 지금까지 삼성, LG 등을 필두로 세계 경제시장을 선두하는 한국과 달리 대만은 한국과 경쟁하는 반도체·전기 등의 산업에서 점차 밀렸다. 2004년에는 평균 국민 소득도 한국이 대만을 앞질렀다. 이제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한국은 대만을 앞선 현실이다.
대만인들은 역사적으로 내내, 그리고 불과 몇 십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 보다 훨씬 월등하다고 생각해왔다. 대만 지리·역사 교과서는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지방 변방 정권 중 하나로 해석하면서 중국 중심적 사고를 보여준다. 또 중국의 선진문화가 지리적으로 근접한 국가들에게 문화적·정치적·군사적으로 영향을 줘 실질적으로 번속 관계(藩屬·속국)를 형성했다고 설명하면서 한민족에 대해 은연중에 우위적으로 생각하는 데 기여했다. 이 같은 생각 때문에 패배감이 더욱 컸다.
또 1990년대 말부터 하한(哈韓·한국 열기)이나 한류(韓流) 열풍이 생겼고, 2000년대 이르러 한류 열풍이 거세지면서 일종의 한류 백래시(backlash·사회 변화 등에 대한 대중의 반발)도 일었다. 한국의 대만에 대한 일방적 문화 진출이 불편하다는 여론이 생긴 것이다. 한류는 2004년 항공기 직항로 개설 등 민간 교류를 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지만, 동시에 대만인들로 하여금 '우리의 고유 문화는 모두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두려움도 일게 만들었다.
대만인들이 한국에 대해 여러 복잡한 감정을 가진 사이 정치권과 언론에선 이를 이용했다. 한국에 대한 반감이 워낙 크니 선거에서 "한국을 이기겠다"고 공언하면 당선에 유리하고, 언론에서도 한국을 비방·폄훼한 기사를 쓰면 잘 읽히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대만 태권도 선수 양수쥔(楊淑君)이 규정 위반을 이유로 실격패 당했는데, 심판이 한국계 필리핀이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한국이 악의적으로 대만을 지게 만들었다'는 여론이 생겼다. 대만 언론들은 선정적으로 이 같은 반한 감정을 부추겼고, 5개 직할시 시장과 시의원 선거를 맞이한 각 정당과 정치인들도 "한국을 꼭 이기겠다"며 선거에 악용했다.
이후 양수쥔 선수가 직접 나서 "내 실격은 한국과 전혀 관계없다"며 자제해달라고 인터뷰했으나 이미 달아오른 감정은 쉬이 식지 않았다. '양수쥔 사건'은 대만 사회 기저에 깔린 반한 감정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는데, 이에 대해 당시 코트라 관계자는 "양수쥔 사건 이후 대만 방송에 나온 패널들이 '연평해전'(한국의 해병 2명, 민간인 2명이 사망)에 대해 '기쁘다'는 표현까지 하는 데 대해 당황스러웠다"고 밝힌 바 있다. 대만 시민들은 총통 청사 앞에서 태극기를 찢고 불태웠고, 한국산 컵라면을 밟아 부수고 불매 운동을 벌였다. 대만 경찰이 대사관과 한국 학교에 대한 경비를 강화해야했을 정도로 반한 감정이 고조됐다.
이후에도 대만 언론은 틈만 나면 '한국을 너무 이기고 싶다(好想贏韓國)'거나 '한국을 이기면 통쾌할 것이다(打贏韓國就是爽)'와 같은 문구를 빈번히 사용하며 반한 감정을 북돋았다. 대만 정치인들도 대내적 문제를 대외로 돌리고, 국민을 단결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할 때마다 한국을 정조준했다. 중국은 건드릴 수 없고 일본과는 친밀하니 한국이 적절한 제물이었던 셈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일종의 계기만 생기면 반한 감정이 다시금 불붙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2010년 EU가 한국의 LG디스플레이, 삼성전자를 비롯 대만 치메이(奇美) 등의 5개사에 LCD 가격담합 과징금을 부여했는데, 삼성전자가 이 같은 사실을 자진신고해 리니언시 제도(담합 자진신고자 감면제)로 과징금을 면제받은 일이 있었다.
그저 그런 기업 이슈 중 하나로 끝날 사안처럼 느껴지지만, 치메이를 합병인수한 세계 최대 EMS 업체 혼하이(鴻海)그룹의 궈타이밍(郭台銘) 회장이 "경쟁자 등 뒤에 칼을 꽂는 소인배"라며 삼성전자를 비난했고, 스옌샹(施顔祥) 대만 경제부장이 "기업은 상거래 도의가 있어야 하고 일반적 상업 관습을 완전히 저버리고 '밀고'하는 행위는 상도덕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다"라고 공개 비난하면서 다시금 반한 감정에 불이 붙었다. 태극기가 찢어지고 불태워지는 장면이 대만 뉴스에 다시금 등장한 건 물론이다.
문제는 이 같은 반한 감정과 또 반한으로 인해 생겨나는 대만에 대한 반감 모두 장기적 관점에서 양국에 이득되는 게 없다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대만에 퍼진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알아보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본다.
참고문헌 한국과 대만의 관계-중화민국 100년: 한대관계의 역사와 현실, 한국중국문화학회, 이규태 대만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에 나타난 한국 서술 특징, 사회과교육연구, 안지영 일본침략 및 강점기에 대한 주변국들의 역사인식- 한국·중국·대만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한국역사교육학회, 안지영 한류의 대만 진출 역사 및 대만인의 한류 인식, 디아스포라연구 제12권, 궈추원 대만인의 국가정체성 변화: '중국화'인가? '대만화'인가?, 한국중국문화학회, 최강호 대만 한류의 양면성… 열광과 외면, 중국학연구회, 황선미 글로컬적 관점에서 본 한류에 대한 재평가, 인문콘텐츠학회, 김성수 대만의 반한감정… 이해하고 대응하자, 코트라, 타이베이 KBC 이민호 센터장
대만 새끼들아...김 자체가 19세기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된겨 ㅋㅋ
처알지도 못하는 것들이...ㅉㅉ
그리고,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으로 가르치나 대만도? ㄷㄷㄷ
중국 동북 공정 보다 더한 새끼들이었네...
중국 공산당이야 독제다 보니 그려러니 하더라도...저것들은 뭐지...
상종을 못할 놈들이네...
뭔 배신감은 얼어죽을 배신감인가요 ㅋㅋㅋ
대만애들이 배신감 운운하는 유일한 근거가 국교단절 그거 때문인데 엄밀히 말하면 우리나라는 오히려 의리를 끝까지 지킨쪽에 더 가깝죠
우리나라가 대만과 국교를 단절한 시점은 92년으로 우리나라가 중국과 공식적인 수교를 맺자 우리가 아닌 대만측에서 먼저 단교를 선언해서 단교가 된 것임
우리 입장에서는 경제 협력과 특히 남북문제에서 중국측의 협조를 얻기위해서는 중국과의 수교가 불가피한 상황이라 대만에게도 이 부분을 계속 양해를 구했고 그래서 우리측에서 먼저 대만과 단교하지도 않았다는 거
오히려 대만이 선수를 쳐서 자기들이 내쳐진게 아니라 한국을 내친 모양을 만들고자 오히려 먼저 단교를 선언한 것임
반면 대만이 그렇게 물고 빠는 일본은 1971년 대만이 유엔에서 축출되자 마자 이듬해인 1972년에 일본이 먼저 일방적인 통보로 단교해 버리죠
하지만 난 아직까지도 대만애들이 이 문제를 두고 일본을 원망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음
심지어 대만에서는 일본국민들이 대만과의 단교를 슬퍼하며 통곡을 했다는 거짓 소문까지 만들어서 일본측의 일방적 단교 통보를 오히려 대만내에서 스스로 미화해서 무마해 줌
반면 최후까지 의리를 지킨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없는 말도 만들어가면서까지 비난에 열중함
결국 대만이 똑같은 단교를 놓고서도 이렇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딴게 없음
대만에게 있어 일본은 없는 말을 만들어가면서까지 관계를 지키고 싶어했던 동경하는 나라였고 반대로 한국은 자기들 보다 못한 떨거지 같은 놈들이라 여겼기 때문에 니들이 감히 우리를 배신해라는 선민의식이 발동한 거
따라서 대만의 반한 감정에 있어 배신감 이런것은 진짜 명분이 아님
오히려 진짜 명분을 숨기기 위한 포장에 가깝고 진짜 명분은 한국에 대한 선민의식이 뿌리에 있지만 한국이 자기들보다 계속 발전해감으로 인해 이 선민의식이 열등감으로 바뀌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질투심이 대만 반한 감정의 뿌리라는 이야기임
이런 심리적 기저 때문에 대만내에서는 한국에 대한 동경과 혐오가 공존하는 그런 양극단의 감정이 벌어질수가 있는 것임
//많은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지만, 대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
본문의 이 내용은 잘못됐네요
많은 한국인들이 이렇게 알고 있죠
많은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면 이렇게 알고 있죠
그런데 이에 대해서 최신 연구를 다룬 최근년간의 기사에서 본 바에 따르면
장개석이가 오히려 해방된 조선을 중화민국의 속령내지 속국으로 삼으려 했고
전쟁와중에도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온 군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제대로 건네주지 않고 중간에 빈번히 착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죠
장개석이라는 인간 자체도 소인배에 반 쓰레기에 가까운 인간이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2010 년을 전후해서 인터넷 상에서 크게 논쟁이 일면서 심도 있게 다뤄졌어요
다들 잊으신 듯
즉ㅡ 대만은 단교 전인 7~80 년대에도 한국을 자기네 속국 취급하고 업신여기고 낮잡아 보며 무시했습니다
두 가지 별도의 사건이 섞인 것 같네요
미국과 영국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국민당을 통해 지원금을 보냈다는 사실을 확인하셨나요 ?
국민당에 보내진 지원금을 장개석이 사적으로 착복한 건 맞지만, 국민당을 통해 임시정부로 지원금을 보내진 않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독립군은 임시정부의 정식 군대로 인정 받지 못했습니다
독립군을 정식 군대로 인정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를 일본의 소수 민족으로 보느냐, 독립의지가 있는 강제 병합된 피점령국으로 보느냐가 갈리는 문제였습니다
피점령국이라고 하기에는 조선의 인구에 비해 독립군의 규모가 너무 작고, 임시정부가 독립군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질 못했으니까요
이런 와중에도 우리 임시정부는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두파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고, 공산주의 파벌은 레닌의 지원금을 민족주의 파벌과의 대립으로 착복하고, 이승만은 미국에서 걷은 교포 애국지원금을 착복하고 국제 위임통치론을 들고 나오고 개판이었습니다
공산주의 파벌이었던 팔로군은 815해방 이후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중국에 남아 국공내전에 참여하고, 장개석에 승리한 후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이 되고, 오랜 전투경험을 쌓은 이들이 바로 625전쟁의 핵심 병력이 됩니다 ㅠㅠ
어쨌든, 임시정부는 계속해서 독립군을 정식 군대로 인정 받으려 노력 했고, 8.15 독립 직전에야 공동작전을 수행 하자는 허가가 나와 이제 정식 군대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원폭 2방으로 일본이 항복해 버려서 끝내 그 작전은 수행 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종전회담에서 류큐와 같은 일본국의 속국으로 취급 받기도 했을 정도로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미국과 영국이 우리나라에게 주는 지원금을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도 아니고, 국민당을 통해서 보냈다는 건 쉽게 믿기가 어렵네요
국민당의 장개석은 실제로 임시정부 자금은 물론 가족들까지 중국인 일반인들 보다도 여유롭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주며 후하게 지원해줬어요
장개석의 부인은 마음이 동하면, 사적인 자리에서도 자신이 소장한 보석을 꺼내 주기도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장개석이 어마어마한 부를 착복했으니 보석 몇 개야 그들에겐 푼돈이었을 지도 모르죠
장개석이 착복한 막대한 부와 주기로 약속했던 정해진 지원금 이외에도 수시로 지원을 했던 사례를 보면, 푼돈에 지나지 않는 임시정부 지원금을 장개석이 중간에서 착복했다는 건 터무니 없을 정도의 누명이라 보일 정도입니다
저도 장개석이란 인간의 개인적인 성품이나 뭐 대만의 국격 이런거 상관없이 어쨌든 이득이 되었기 때문에 일부 잘못도 있지만, 대한민국을 지원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가 무슨 대단한 도덕심이 있었다기 보단.. 중국과 대치하고 있던 대한민국도 지원해야 대만에 대한 압력이 분산될 수 있고, 같은 자본주의 동맹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건 분명하니까요. 속국으로 삼고 싶다는 건 애초에 어불성설일 겁니다. 당장 전쟁에 져서 도망쳐 섬으로 들어온 상황에서 그런 거까지 생각할 수 있다고 보진 않네요.
그냥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득이 되기 떄문에 지원했다고 봐야겠죠. 그러나 그게 나쁜 거라고 생각 안하고 그건 그것대로 좋게 평가합니다만, 대만의 현재의 치졸한 행태는 그거와는 별개의 문제죠.
88올림픽 때도 열등감에 안좋은 뉴스 많이 올렸다고 들었네요
우리도 못하는데 감히 니네가? 같은 느낌으로.. 말이죠
단교 이후 갑자기 그랬다기 보다 아래로 보던 나라가 갑자기 올라가니까 그때 부터 경계하고 그랬죠
일본이 과거에는 한국에 별 관심 안두다가 언젠가 부터 한국 한국 거리는 것처럼요
우리는 저 나라도 아닌것들의 인간들사정 알아줄이유가없죠.자기들이 뭐가 문젠지 알지도 않을려하고 그냥 험담과추파만 던지는 버러지들이라고봅니다.저것들은 지들자존심에 먼저 유엔박차고나갔고 먼저 한국에 단교한놈들입니다.그러고도 하는짓이 제들이 먼저 때렸어요하는꼴 어휴 ㅋㅋ..개풀어서 쫓아낸 프랑스에 뭔말이나하나 우리보다 먼저 단교한 일본에 뭔말이라도하나..만만하니 우리한테 욕이나하니 그냥 소인배라고보입니다.
대만과의 단교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때 대만과 우리 정부의 관계자는 수시로 대화를 해 나갔는데요
우리쪽에서는 대만과 단교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었고, 대만은 유예해 달라 계속 관계를 이어가자는 방향이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대만의 관계자는 우리나라와의 단교가 이미 기정사실이며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우리나라의 뜻을 대만 대중에게 알리지 않고, 한만 수교는 계속 될 것이라고 대만 민중을 안심시키려 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만의 사정을 더 이상 봐주면서 미룰 수 없어 단교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조만간 발표를 하겠다는 통보가 갔을 때죠
대만 관계자는 대만으로 돌아가서 한국이 수교를 계속 유지해 갈 것처럼 행동하다가 아무 얘기도 없이 일방적으로 단교를 하려고 한다고 비난 성명을 내며, 우리도 한국 따위는 필요 없다고 먼저 단교를 선언해버립니다
대만 정부는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우려해 철저히 언론 플레이를 했고, 대만내의 한국에 대한 여론은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를 대하듯 했습니다
중국보다 우리나라를 더 싫어하고 혐오했어요
그 뒤로는 모든 일에 딴지를 걸고, 비난을 하고, 없는 것도 만들어내서 혐한을 하는 것이 유행이 됐습니다
공자를 한국인이라고 했다거나, 한자를 한국인이 만들었다고 했다거나, 온갖 말도 안되는 루머를 양산해 냈죠
본 글에 있는 김밥의 에피소드와도 일맥 상통합니다
단오제 문제도 있었어요
강릉 단오제가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 됐는데, 단오제는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중국 것인데, 한국이 뺐어 갔다고 비난을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단오제 자체가 아니라 강릉 단오제만의 무속신앙과 연결된 독특한 문화행사가 유네스코에 등재 됐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단오제의 발생지라는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이미 단오제 문화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사건도 있었죠
이탈리아전 모레노 심판 매수 사건
이 사건은 일본의 한 기업이 한일월드컵 이후 관련 동영상을 제작하고 싶다고 FIFA에 공식허가를 받고 만든 영상물 CD로 부터 비롯됩니다. 이 CD에는 한국의 경기장면을 악의적으로 편집해 심판 매수로 인해 승부조작이 의심된다는 내용이 들어 있고, 이 CD가 유통되면서 발생합니다
우리나라가 이탈리아에 반칙을 가하는 장면을 삽입하고, 우리가 반칙을 당하는 장면은 빼버리는 비열한 짓을 벌였습니다
실제로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이전에는 일본-러시아의 경기를 승부조작으로 비난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 도로에 주차해둔 일본 자동차들이 불타 오르고, 해머로 때려 부수는 사태가 생기고,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16강에서 패배하고 우리나라는 4강까지 가죠
여기에 질투심을 느낀 대만은 사실관계를 따지기도 전에 그런 CD가 있어 ? 이건 한국이 매수한 게 틀림 없다며, 대만 내부는 물론, 중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까지 이 내용을 퍼뜨립니다
일본, 중국, 대만이 시끄러워지자 아시아 전역으로 퍼지고, 유럽까지 다시 퍼져 나갑니다
원래 유럽에서는 이탈리아가 승부조작을 주장 했지만, 프랑스나 스페인 등 여러 국가들이 승부조작이 아니라며 이탈리아의 러프 플레이는 유명하며 우리도 여러 번 당했고, 오히려 이탈리아는 러프 플레이를 고쳐야 한다고 비난했고, 축구계에 만연한 허슬플레이(심판을 속이는 행동)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토티가 패널티킥을 얻으려 허슬플레이를 하다가 경고 1장을 더 받아서 퇴장 당했죠
더구나, 다소 유리한 판정이 나왔다 할지라도 주최국이라면 누구든지 얻을 수 있는 작은 어드벤테이지와 같은 것으로 그렇지 않았던 주최국은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는 정당 했다며 우리나라를 옹호하는 입장이 많아 여론이 사그라든 이후였습니다
대만의 한국에 대한 질투는 조작된 깊은 배신감과 열등감에서 비롯된 거라 쉽게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와서 거의 30년 전의 외교 비화를 꺼내어 사실은 이랬다고 설명해 봤자 들으려 하질 않는 상태가 됐어요
우리나라는 상해임시정부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나마 일본보다 더 늦게 단교를 하며 의리를 지키려고 했었는데, 대만 정치인들이 자기 잇속을 챙기려 저지른 조작극에 양국의 사이가 이렇게 틀어지고 말았네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멍청한 기자 나부랭이
그럼 86 아시안 게임 때와 88 올림픽 때는 대만이 왜그렇게 히스테릭한 혐한을 했는데?
그 일들이 대만의 한국에 대한 깔보는 시각을 알게했고 후에 단교하는데 한국이 냉철할 수 있게한 일이었지
한국이 개고기 먹는 나라인데 어떻게 감히 올림픽을 여느냐고 세계에 퍼트린 것도 대만이라 하는데
뭐 고마움을 모르는 한국이라고? 웃기는 소리 하지마라
지들이 대놓고 깔보던, 일제 수탈과 동란 후 전쟁 후윳증으로 세계 최빈국중 하나였던 한국이
맨땅에 헤딩하기로 아시아 네마리의 용이되고 급기야는 지들이 못해봤고 꿈도 못꿀 올림픽을
분단국인 한국이 개최권 따내게 되자 질투심에 더하여 일본의 부추킴까지 받고 가열찬 열폭질을 한 것일 뿐
한국이니까 90년대까지 대만과 수교를 해줬지 저 유럽에서는 60년대 부터 대만과 단교 들어갔고
미국과 일본은 70년대 초에 대만과 단교했다. 뭐 한국이 고마움을 모르고 어쩌고 어째? 콱 주둥이를
저 당시 한국정부가 대만의 위신을 세워준다고 저 모든 사실들을 알고도 한국인들에게 까지 쉬쉬했었다는 것
간단하게 말해서
세계대전후 우리나라의 독립은
연합군 수뇌부 몇몇이 회동을 했다는 XX 회담등에서 안건이 상정되고 다른 나라들이 동의해서 보장이 되요.
여기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누가 과연 그 회담에서 안건으로 주장했는가? 라는 점입니다.
장개석이냐 루즈벨트냐의 문제인데.
참고로 장개석 이라면 김구 선생이 우리나라 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게 되고
루즈벨트라면 이승만이 우리나라 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겁니다.
대만과 장개석에 대한 나쁜 평판은 저 이승만 쪽과 연관이 깊어요.
현재에는 뉴라이트 계열이 주로 하는 주장이죠.
우리 독립문제에 대해서 대만이나 장개석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를 보신다면
그 출처가 어딘지를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높은 확률로 저쪽 계열 인사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요.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되고
얼마안가 우리나라 독립에 큰 공훈을 가진 사람들에게 독립에 공헌이 있다고 최고훈장을 수여하는데.
여기에 외국인은 대만사람들뿐입니다.
독립운동세대들이 살아생전에 누가 독립에 직접적인 역할을 했는가를 평가했을때에
저런 결과가 나왔다는겁니다.
건국훈장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에
장개석을 포함한 대만사람 5명이 있고요
그 아래등급에 대만사람 10명이고 비로소 타국인이 한명 등장하는데 그것도 영국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