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비색은 세계 최고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당시에 극찬을 받았습니다.
"한국 내에서만 세계 최고 취급이라더라", "고려청자는 부장품용으로 소수만 생산됐다더라" 같은 카더라는 난파된 고려 무역선에서 고려청자가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그 근거가 사라졌습니다.
당시 송나라의 서긍은 고려에 와서 고려청자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들어 제작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남송 태평노인의 『수중금』에는 “건주⋅촉 지방의 비단, 정요 백자, 절강의 차, 고려 비색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모방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고 천하의 명품 가운데 고려청자를 포함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왜구들이 찬물을 끼얹는데, 고려 후기로 가면 왜구들의 약탈이 극에 달해 도자기의 주요 산지인 남해안이 쑥대밭이 되어버립니다.
이로 인해 도자기 기술 자체가 쇠퇴하는 상황에까지 치닺고 이후 분청사기가 잠시 유행하고 백자에게 자리를 완전 내주게 됩니다.
조선 시대에도 청자가 제조되기는 했지만 후기에 들어서면 청자 제조 기술은 거의 실전되어버리게 됩니다.
임진왜란 때는 왜인들이 도공들을 대규모로 납치해가면서 조선의 도자기 또한 쇠퇴기를 맞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