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전패한 것 같지만 의외로 승률이 낮지 않습니다. 9전 4승 5패입니다
그에 반해 명나라는 청나라에 전패했지요.
청나라에 당한 건 남한산성에 충분한 군량이 확보되지 않아서 입니다
결코 전투에서 진게 아닙니다.
남한산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에 함락될 조짐도 없었어요. 그래서 청나라가 남한산성 보수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한 겁니다
만약에 남한산성에 충분한 군량만 확보되었다면 청나라 군대도 어찌되었을 지 모릅니다
청나라는 한양까지 모든 지역을 차근차근 점령하고 온게 아닙니다. 그냥 적지 한가운데 군대를 이끌고 온겁니다. 만약 식량만 충분했다면 지구전에 의해 오히려 청나라군을 포위하여 사방에서 공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청나라는 조선에 도박을 했고 성공한 것 뿐입니다.
조선땅에서의 전쟁에서 청나라의 전력이 절대 우세한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출처 위키에서 병자호란때 벌어진 주요 전투입니다
백마산성 전투(무승부) :
1636년 12월 8 예친왕 도르곤 휘하의 청군이 백마산성 내의 조선군을 자극하여 일어난 전투이다.
동선령 전투(승)
1636년 정방산성에 주둔한, 도원수 김자점과, 이완이 동선령에서 벌인 전투 3~4백명 사살했으나 김자점 도원수 심각한 부상.
검단산 전투(패)
1000명의 강원도근왕군 선봉대가 청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1000명 전사
토산 전투(승)
1636년 12월 25일 청군이, 황해 감사 이배원과 황해 병사 이석달이 이끄는 조선군을 기습하여 벌인 전투 . 쌍방 수천명씩 전사
험천 전투(패)
1636년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충청도근왕군과 청군이 벌인 전투로 수천의 조선군 전사
쌍령전투(패)
1637년 1월 2일에 쌍령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청군의 전투이다. 조선군 4만명이 전멸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8천명만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 나머지는 후속부대로 참여하기전 끝나버림.
광교산 전투(승)
1637년 1월 4일부터 1월 6일까지 경기도 용인 광교산에서 벌어진 전투로, 전라도 근왕병이 청나라 군사 수천명을 죽여 승리한 전투이다.청태종의 매부 전사
강화성 전투(패) :
1637년 1월 21일 강화도 수비군이, 청군에 맞서, 강화성을 수비하던 전투를 말한다
탑동 전투(패)
1637년 1월 26일 평안도관찰사 홍명구와 평안도병마사 유림과 순안현령 허노가 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김화에서 청군을 만나 싸워 1000명 전사
백동 전투(승)
1637년 1월 28일 홍명구의 패잔병을 쫓다가 유림의 조선군의 진지의 진입해 벌인 전투로 청의 군사중 90%인 5000명의 청군이 전사함.
백동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물자부족으로 퇴각하는 바람에 인조는 패전한 것으로 착각하고
투항의 계기가 되었답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명-청간에 명의 전적보다는 훨씬 준수하네요. 4번 이기고 5번 졌네요
이겼을 때 동선령전투외에는 수천명의 청군을 죽였으니 청군의 손실도 2~3만명은 되지 않았을까요?
예친왕 도르곤은 평안도 내륙인 벽동-창성라인을 거쳐 조선에 들어왔는데
무슨 수로 의주 근방의 백마산성에서 임경업과 싸울 수 있는지....???
동선령 전투에서 김자점군이 상대한 청나라군은 청나라군의 최선봉인 마푸타(마부대)의
300기병인데.... 이 전투에서 마푸타군을 전멸시켰다면... 무슨 수로 마푸타군이 300명 전력을 거의 온전히 유지한채로 한양 인근에 진출하여 왕자와 비빈들, 한양의 사대부들이 대거
강화도로 피난가고... 인조와 소현세자를 비롯한 조선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는지...???
토산전투에서 수 천명의 청나라군이 죽었다니....ㅋㅋㅋ
토산전투 자체가 조선군의 패전일 뿐 아니라... 토산전투에서 교전한 청나라군 병력규모가
3,000명 내외 수준인데... 그렇다면 청나라군은 전멸했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가....^^
쌍령전투에서 수뇌부격인 경상좌병사 허완 , 경상우병사 민영, 충청병사 이의배 뿐만 아니라
안동영장, 상주영장, 심지어 경상도 최남단의 창원부사까지 대소 지휘관들 상당수가 죄다
전사했고... 경상우병사 민영 휘하의 경상도에 할당한 어영군 병력만 8천명 규모였는데...
그렇다면 경상도 각지에서 소집된 속오군 병력들은....???
경상도군과 합류한 충청병사 이의배가 이끄는 충청도군 병력은 도대체 어디에....???
그리고 탑동 백동을 모두 포괄한 김화전투에서 맞붙은 청나라군(주로 몽골군) 규모는 4천명
이에 맞선 평안감사 홍명구와 평안병사 유림이 이끈 평안도군이 5천명
그 가운데 2,000명의 홍명구군은 전멸을 당했고(당시 조선측 기록이나 청나라측 기록이나
탑동전투에서의 조선군 전사자 규모를 공통적으로 2,000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백동전투에서 청나라군 5,000명이 전사했다니....??? ㅋㅋㅋ
탑동-백동 전투 모두 동일한 4,000명 규모의 몽골계 청나라군과 맞붙은 전투인데
어떻게 청나라군이 5,000명이 전사할 수 있는지...??? 그 비결이 뭔지 좀 알려주세요...^^
더구나 4,000명 규모의 청나라군은 탑동-백동전투를 치른 이후에도
강원도 북부를 휩쓸며 분탕질을 쳐댔고... 강원도-함경도 경계즈음인 철령과 안변에서는
남병사 서우신이 이끄는 7,000명 규모의 함경도군과도 교전하여... 함경도군 전사자가
절반에 달하는 3~4천에 달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이들 청나라군 부대는 함경도를 관통해가며 북진하여
두만강을 건너 간도-동만주에 진출하여 그때까지 청나라에 복속되기를 거부한
동해여진의 잔여세력들을 수색한 이후에야 해산하여
주력인 몽골계 병력들은 고향은 내몽골로 복귀하고, 소수의 만주팔기군은 심양으로
복귀 청태종에게 복명하여 그들이 치른 전투와 행군경로들을 보고했는뎁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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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백동전투에서 청나라군의 피해는 경미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만약 조선측 사서의 기록대로 청나라군이 수 천명의 전사자나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이후에도 강원북부-함경도를 가로질러 간도-동만주 일대까지 휘젓고 다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1)청군이 다른 북방계 왕조의 침입과 달리
다른 도시 거의 안건드리고 한양 직격
2)몽골에 항전한 고려의 예를 따라 강화로 가려
하였으나 예상외로 강화 길목을 막고 심지어
강화까지 진격하여 몽진 실패
3) 급히 남한 산성으로 몽진 하지만 철저한 포위로
보급과 정보가 끊겨 패전
4)더 남쪽으로 몽진하지 못한 이유는 ...
임란의 주 피해지역이 삼남이라서
몽진해 갈만한 성읍 자체가 상당히 부실해서
갈만한 곳 조차 없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