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유관순과 학생 시위대는 만세 운동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점차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자 만세 운동의 규모는 커져갔고, 이에 조선총독부는 학생들의 참여를 막기 위해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같은 해 3월 15일 임시휴교령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유 열사는 고향에서 만세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들고 천안으로 향했다. 우선은 동네 어른들께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알렸고, 부친의 도움으로 지역 유지들과 대규모 만세 운동을 논의할 수 있었다.
4월 1일 유관순은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함께 만세 운동을 준비한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30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가 확산되자 일제는 시위 운동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유 열사의 부친 유중권을 비롯한 19명이 목숨을 잃고 유관순과 시위 주동자들은 천안헌병대로 압송됐다.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유관순은 갖은 고문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옥중 만세를 불렀으나,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19살의 나이로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