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촌형은 70년대 가정형편때문에 인문계 못가고 그당시 잘나가던 공고에 들어가서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가
대학간다고 때려치고 대학갔었죠 데모하다 찍혀 정상적인 회사에는 취직불가
현재상황은 대학나와서 형보다 학벌 좋으신 형수덕에 근근히
사업한다고 하는데 말아드시고 지금도 죽쑤고 있죠 다시 뉴질랜드 들어간다고 하는소리도 있고
애들은 거기서 학교나와서 현지 여행업체에 취직 지지배는 뉴질랜드 안간다고 버티는중
형수가 먹여살린다고 형수 경희대 간호학과 형보단 좋죠
그런데 형하고 같이 현대중공업에 취직했던 동창은 현재 거기서 기능장하고 있고
거기 그냥 남아 있지 뭔놈에 대학간다고 때려쳤는지 아니면 야간대를 가던지 형이 국중고 공부 잘했거든요 전교 1위를 안놓쳤었다는데 그당시 대기업 들어가려고 해도 경쟁률 치열했습니다 공돌이라 놀림받던 사람들도요
아까비 기능장 정도면 연봉이 장난아닌데
일자리 많아 좋았겠다 할수도 있지만
저는 아버지랑 저녁을 같이 먹은 기억이 없습니다.
토요일, 일요일도 늦게까지 일하셨습니다.
평생을요...휴일없이....
퇴직하시고나서 일주일에 두번정도 집에가서
부모님과 식사하는데 그말씀 드리니까
아버지도 평생 일만한거 좀 억울하다고 하시더군요.
친구들과 얘기해봐도 친구네 부모님들도 다 비슷하게
사셨더군요. 글쓴분보다는 또 한세대 전의 이야기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중견기업의 평사원으로 시작해 임원자리까지 오르신 나름 성공하신분이셨지만. 제 기억속에 아버지는 전혀 행복해보이지않았습니다. 새벽에 피곤에 쩔어 출근하시고 새벽에 곤드레가 되어 들어오시고 어쩌다 한번 쉬는날에는 당신몸도 가누지못할만큼 잠을 청해야할정도로 극도의 경쟁과 과도한 업무에 묻혀계셨습니다. 결국 어느날 간암판정을 받고 40대의 젊은 나이에 노력해온 인생의 보상도 누려보지못하시고 저희가족곁을 떠나셨지요.
저희 아버지만의 이야기가아니라..그 당시 가장들 어깨에 짊어진 책임의 무게와 사회의 요구는 지금 우리들이 상상하는것보다 훨씬 중하고 엄했어요...그러고도 뭐하나 자기 인생은 즐기지못하고 노인이되신분들이 대부분이죠. 지금 현제 젊은이들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하고 무시해선 않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때가 더 좋았다는건...좀 생각해봐야겠네요.
뭔가 저희 부친의 젊은시절과 맞물리는 면이 있어서 적어봄니다.
저희 부친께서 대학생일 때, 절친분이 죽었습니다. 데모관련이죠. (자세히는 적기 곤란함)
부친께선 지역수재라, 차석으로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여 통학중이셨고요.
사망소식을 듣고, 학교 자퇴하고 이 나라에서 못살겠다고 했으나(실제로 학교 안나가고, 고향으로 가버림), 조부깨서 너마저 포기하면 누가 남겠느냐하며 설득을 하였죠.(서울대가 국립이죠)
그러나, 정신적 충격때문이셨는지 2년간 해외유학을 하시고 오셨슴. (교환장학생 신청)
민주화운동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제가 어찌 판단하겠느냐만은, 당시 시대적 배경상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을 것입니다. 그냥 대충 공부하기 싫으니까 한다...라는 글로만 적고 판단하는 현대식 마인드의 뉘앙스는 보기 불편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