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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03 15:51
독립군 때려죽이던 매국노 찬양한 이병도!!!
 글쓴이 : 유리수에요
조회 : 1,286  

친일 반공 특무대장 김창룡의 묘비를 찾아서
[28호] 2003년 06월 23일 (월) 00:00:00 민족21  minjog21@minjog21.com

정지환 / 《시민의신문》 취재부장

이승만 시절 반공의 화신으로 불리던 친일파 출신 김창룡. 그가 비명횡사한 후 당대의 학자라 칭송 받던 이병도가 그의 비문을 썼다. 이병도 역시 손가락에 꼽히던 친일파. 어느날 그 비문이 사라졌다. 
김창룡의 사라진 묘비를 다시 찾아 나선 역사기행은 김창룡과 이병도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김창룡과 이병도. 한 사람은 일제시대에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독립군 사냥에 나섰던 악질적인 친일파였고, 또 한 사람은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급조한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던 역사학자였다.

그러나 그런 치명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해방된 나라에서 각각 군부와 학계의 태두(泰斗)로 변신했다.


사라진 묘비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짙은 안개에 뒤덮인 원효로 1가는 고요했다. 잠시 후 다섯 발의 총성이 고요한 아침의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의 최후를 알리는 소리였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김창룡의 유해가 옥인동 특무부대장실에 안치된 것은 오전 9시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제일 먼저 달려와 애도를 표했고, 나흘 뒤인 2월 3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國軍葬)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날 안양 석수동 관악산 기슭에 묻힌 김창룡의 묘지 옆에는 가로 77cm, 세로 200cm 크기의 묘비가 세워졌다. 비명(碑銘)을 지은 장본인은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로 군림하던 이병도.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김창룡과 이병도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47년이 흐른 뒤 기자는 사라진 비명을 찾아 역사기행을 떠났다. 기자가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준 묘비를 찾아서 역사기행을 떠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 3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한국 사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두계 이병도의 손자인 이건무(56) 씨를 임명했다.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인사들에 대한 온갖 루머와 투서가 난무한 가운데 두 달이나 끌던 인사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다음날 발생했다.

이 신임 박물관장이 4월 1일자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인 이병도의 친일행적 논란과 관련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할아버지가 친일을 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는데, 문제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손자가) 박물관장 자리 때문에 할아버지를 욕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할아버지는 창씨개명도 안 하신 분입니다. 자식들에게도 (창씨개명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확인도 안한 내용을 인터넷에 올리고…. 할아버지의 실증사학 얘기는 역사를 올바르게 보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손자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옹호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옹호에도 어느 정도의 논리는 있어야 한다. 아무리 할아버지를 옹호하려 한다고 해도 한국 현대사의 정체성까지 훼손돼서는 곤란할 것이다.

   
▲ 1956년 3월 22일 실시된 김창룡 살해사건 현장검증.
   
▲ 1956년 5월 개정된 김창룡 살해사건 첫 공판.

이 박물관장의 주장에서 짚어봐야 할 논점은 두 가지로 정리되는데, (1)창씨개명과 (2)실증사학에 대한 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후자에 대한 논쟁은 뒤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첫 번째 논점인 창씨개명과 친일행적의 연관성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이병도가 일제시대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물론 사실이다. 따라서 그가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을 했던 다른 사람들보다 긍정적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창씨개명 여부만으로 친일행적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진짜 친일파의 경우에는 도리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이 박물관장의 해명을 낯부끄럽게 만드는 ‘실증사례’는 또 있다. 이병도가 김창룡 특무대장의 비명을 지어주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독립군을 사냥했던 죄업 때문에 해방이 되자 한때 지하로 숨기도 했던 천하의 친일파를 위해 지어주었던 비명을 놔두고 창씨개명 운운하며 친일행적과 할아버지의 무관을 강조하는 것은 역사학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역사기행은 지난 4월 14일 김창룡의 사설 묘역이 있었던 경기도 안양에서 시작됐다. 기자는 그곳에서 한 주민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한 4∼5년 전쯤 묘지를 이장해 갈 때 장군석은 땅속에 묻어버렸고, 묘비는 중장비를 이용해 산 아래로 옮긴 뒤 화물차로 함께 실어갔어요. 그때 묘비를 대전으로 가져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날 기자는 곧바로 대전 현충원으로 전화를 걸어 묘비의 행방을 물었다. 현충원의 선양과 직원은 이렇게 답했다.

“김창룡 장군의 유골을 현충원의 장군묘역으로 이장하면서 사설묘지에 있던 묘비까지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장군묘역에는 규격화된 둘레석과 묘비만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안양에서 가져온 묘비는 현충원 내의 다른 곳에 설치했습니다.”


미궁에 빠진 비석의 행방

― 어느 곳에 설치했나요.

“장군묘역 입구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묘비는 바로 그 옆 빈터에 세웠습니다. 김창룡 장군의 묘역과는 약 3∼4백 미터쯤 떨어진 곳입니다.”

― 묘비의 크기나 특징을 설명해 주십시오.

“크기가 약 2미터는 됐습니다. 묘비 전면에 ‘육군중장 김창룡지묘’라는 큰 글씨가 음각돼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라고 들었습니다.”

― 비명을 이병도 박사가 썼다고 하던데….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 지금 가면 볼 수 있나요.

“아, 그게… 지금은 없습니다.”

― 지금은 없다고요? 그렇다면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김창룡 장군의 현충원 이장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 누가 어디로 옮겨 갔나요.

“충남 금산에 산다는 따님이 중장비를 이용해 가져갔다고 들었습니다.”

― 금산 어디인가요.

“추부라고만 들었습니다. 더 이상은 말해 줄 수 없습니다.”

   
대전 현충원의 김창룡 묘.[정지환 제공]

지난 4월 17일 기자는 무작정 금산군 추부면으로 떠났다. 한나절만 투자하면 묘비를 찾을 수 있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추부로 떠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김창룡의 묘비가 추부로 간 것이 확실하다면 지역 사정에 밝은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사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더라도 인구가 1만 전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좁은 지역이기에 샅샅이 뒤지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금산군 추부면 옆 동네에 사는 《옥천신문》 오한흥 사장을 안내인 삼아 추부면 마전리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

우리는 제일 먼저 면사무소부터 찾았는데, 그때만 해도 의기양양했다. 김창룡 장군의 묘비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김창룡 묘비가 추부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커녕 그런 소문을 들어봤다는 사람도 없었다. 면사무소 직원들은 여기저기 수소문까지 하며 열성껏 도와주려 했지만 단서를 찾을 수 없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알려 달라면서 연락처를 남겨준 뒤 면사무소를 나와 부동산, 화원, 석재, 화물 등 묘비의 이동이나 설치에 관련이 있을 만한 업종 관계자들을 모두 찾아다녔다.

“시방 자유당 시절에 특무대장인지 뭔지 했던 김창룡이 말하는 거 아녀? 아, 그렇게 유명한 사람의 묘비가 추부에 들어왔다면 우리가 모를 리 없제. 근디 전혀 들어보질 못했어. 금시초문이야. 뭘 잘못 알고 온 거 아녀?”

화원을 운영하는 60대 초반의 노인이 화분에 물을 뿌리며 기자에게 던진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답변도 마찬가지였다.

대전 현충원에 다시 전화를 걸어 묘비를 가져간 김창룡 장군의 딸 이름을 알아내 면사무소에 문의했지만, 추부면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살지 않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추부면 26개 이장 명단을 입수해 몇몇 마을에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금시초문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역사기행은 첫날부터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석양이 드리워진 서대산(금산에서 가장 높은 산)을 뒤로 한 채 우리는 허탈한 기분으로 추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의혹 풀 열쇠 된 〈출장 결과 보고서〉

길을 잃으면 첫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법이다. 다음날 오후 기자는 직접 대전 현충원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대전지역 사정에 밝은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와 동행했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김창룡이 누워 있는 장군묘역을 둘러본 뒤 현충원 청사를 방문해 실무자들을 만났다.

우리는 이곳에서 김창룡 묘비의 이동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취재 결과 김창룡의 유골과 묘비가 대전 현충원으로 옮겨진 것은 1998년 2월 13일이었고, 현충원에 설치돼 있던 묘비가 유족에게 넘겨진 것은 2001년 3월 10일이었다.

담당 직원들이 철제 캐비닛에서 꺼내온 김창룡 관련 서류는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관련 서류를 복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들은 정중히 거절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휘리릭 넘기는 서류를 어깨 너머로 쳐다보며 중요한 대목을 확인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자 일행은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의미 있는 한 장의 문서를 입수했다. 김창룡의 유족에게 묘비가 반환되던 당시 현장에 동행했던 실무자가 작성한 〈출장 결과 보고서〉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이런 기록이 적혀 있었다(일부 내용 ○으로 익명 처리).   

□출장 목적 : 고(故) 김창룡 장군 
               개인 비석 반환
□출장 일시 : 01.3.10(토) 
               09:00∼15:00
□출장자 : 행정주사 ○○○ 외 3명
□출장지 : 금산군 추부면 ○○리 뒷산

마침내 보물지도(?)를 찾아낸 것이다. 직원이 빠르게 넘기는 서류 중간에는 묘비의 상태와 이동 경로를 알 수 있는 대목들도 보였다.

우리는 ‘가로 77cm × 세로 200cm’ ‘사적(私的) 비석 문제 발생’ ‘01년 3월 2일 심사위원회 개최, 3월 10일 반환’ ‘○○리(추부터널 경유)’와 ‘미망인 감사 전화 수신 01.4.9 14:20’ 등의 기록을 취재수첩에 적어 넣을 수 있었다.

단서를 입수한 뒤 우리는 현장에 동행했던 ○○○씨를 찾았지만 그는 마침 휴가 중이었다. 그와 동행했던 나머지 3명은 기술직 근무자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음날 오한흥 사장과 함께 다시 추부면을 찾았다. 묘비가 옮겨진 마을 이름까지 알고 있었기에 일은 모두 끝난 셈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해 마을 이장과 주민들을 만나면서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김창룡 묘비를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그들은 우리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난관에 봉착한 기자는 다시 현충원에 전화를 걸어 현장에 동행했던 ○○○씨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의 일이라 ‘○○리 뒷산’의 위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기억을 떠올려 보라는 기자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마을 입구에 연못이 있었던 것 같고…. 작은 마을을 지난 뒤 고개를 넘은 것도 같고…. 주변에 인삼밭이 많았던 것도 같고…”라면서 떠듬떠듬 말하던 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때 김창룡 장군의 둘째 사위가 동행했어요. ○○대 건축학과 교수였는데, 그 사람이 말을 타던 승마장에 묘비를 가져다 준 것 같습니다. 이게 정확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의 기억은 정확했고, 그것은 굳게 닫혔던 ‘비밀의 문’을 열어주는 ‘마법의 열쇠’가 되어 주었다. 동시에 그것은 2박3일간 진행된 ‘맨땅에 헤딩하기’식 취재가 이제 막바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마을 주민들에게 ‘○○대 건축학과 교수가 말 타던 곳’을 묻자 거의 모든 사람이 “잘 안다”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주민들이 알려준 대로 산길을 올라 헤맨 지 30분. 우리는 마침내 골짜기 안쪽에 쑥 들어가 있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채 버려진 승마장을 발견했다.


“쓰러져 있는 비석이라니…”

폐타이어가 타원형으로 늘어져 있는 승마장 옆에는 컨테이너 한 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마구간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공간도 보였다. 우리는 우선 승마장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어딘가에 묘비가 세워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묘비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승마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마굿간 바닥에 초록색 포장으로 덮여 있는 장방형의 물체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오한흥 사장이 “혹시…”라고 중얼거리며 포장을 들추고 안쪽을 들여다봤다. 

   
▲ 친일학자 이병도가 비문을 쓴 김창룡 묘갈이 부러진 채 나뒹굴고 있다.[정지환 제공]

“찾았다!”

오 사장의 단말마 같은 외침이 싸리꽃 만발한 작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먼지가 잔뜩 쌓여 있는 포장 밑 부분을 살짝 젖히자 실제로 묘비로 보이는 바윗덩이가 일단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포장을 벗겨내는 일이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장방형 물체의 사방이 굵은 밧줄로 꽁꽁 묶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묶여 있는 밧줄의 매듭을 풀고 비닐 포장을 벗겨내자 묘비의 전모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모가 드러난 묘비에 적혀 있는 비명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1956년-필자주)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어 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 아 -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비명의 맨 마지막에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음각돼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이름 석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숨겨진 묘비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포장을 벗겨내는 순간 족제비 한 마리가 뛰쳐나와 숲 속으로 쏜살같이 달려간 것이다. 실제로 전모가 드러난 묘비 옆에는 족제비 배설물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더욱이 묘비는 몸체, 머릿돌, 안내표석이 각각 분해된 상태로 나뒹굴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죽어서도 편치 못한’ 친일파의 비극적 말로를 증언하는 듯했다. 오 사장도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명을 한번 읽어보세요. 여기 마지막 부분에 ‘단기 4289년 2월 3일 입’이라고 써 있군요. 이게 ‘입(立)’ 자 아닙니까? 말 그대로 비석은 서 있어야 하는 건데, 쓰러져 있는 비석이라니….”  

오한흥 사장의 말을 들으면서 기자는 상념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야생동물의 배설물과 흙덩이와 뒤엉킨 채 쓰러져 있는 비석을 바라보며, ‘사람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봤다.

생전의 부귀영화와 절대권력이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 한 사람의 생애를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결국 한 사람의 생애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후의 평가까지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가해자’ 김창룡의 삶은 ‘피해자’ 백범 김구 선생의 그것과 대조적이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젊은 시절을 풍찬노숙으로 보냈음에도 정작 해방된 나라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아야 했던 백범 김구. 그러나 그는 사후에 온 겨레의 스승으로 추앙 받고 있지 않은가.

이와 관련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입수한 〈출장 결과 보고서〉가 떠올랐다. 이 보고서에는 ‘유가족의 요구사항 청취’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아래의 시기에는 묘지의 안전 관리에 각별한 관심 요청”이라는 대목 아래 이런 내용이 적시돼 있었다. 

○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방문시
○ 6·26 백범 김구 선생 추모일
○ 8·15 광복절 전후

이것들은 결국 김창룡 유족이, 아니 ‘죽은 김창룡’이 지금 과연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그들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이뤄지는 것을, 그래서 반공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녹슨 칼’이 되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이 경축하는 광복절이 두렵고, 대다수 국민이 슬퍼하고 분노하는 김구 선생 추모일이 무서운 것이다.

이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란 말인가.  (2003년 7월호)

김창룡은 누구인가?

● 일제 앞잡이에서 정치공작 명수로 변신

김창룡(1920∼1956)은 함남 영흥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장춘 신경역 역원으로 일하다가 일본군 헌병부대 군속이 되어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정식으로 헌병이 되기 위해 3년간 고생하며 충성한 덕분에 1940년 관동군 헌병 보조원을 거쳐 꿈에도 그리던 헌병이 될 수 있었다.

그후 대공사찰을 담당하며 2년 동안 50여 건의 항일조직을 적발하고 독립군 체포와 고문에 앞장선 공을 인정받아 헌병대 오장으로 진급했다.

해방 직후 친일행적이 두려워 지하로 숨기도 했던 그는 소련군에 체포됐으나 탈출에 성공한 뒤 월남해 군부에 투신했다.

조선경비대 3기생 출신으로 육군 특무대장이 되어 ‘멸공’이란 명분을 내세워 백범 김구 암살 등 수많은 정치공작을 자행한 장본인으로 지목 받았으며, 6·25전쟁 당시에는 부역자를 가리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김창룡은 ‘총풍사건’의 원조이기도 하다. 1952년 5월 24일 가짜 무장공비가 피난 수도 부산의 근교에 있는 범어산에 출현한 사건을 조작해낸 것이다

그 직후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직선제로 개헌한 뒤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를 누리던 김창룡은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옛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전문공개

● 이병도가 쓴 〈고 김창룡 중장 묘갈〉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1956년-필자주)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함이 이구동성의 외침이었다.

그는 본시 영흥 출생으로 80년(1947년-필자주)에 육사를 마치고 그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장에 취임하여 이래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동난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명 전시 방첩의 특수 임무를 달성하였다.

84년(1951년-필자주) 육군특무부대장에 부임하여서는 더욱 헌신적 노력과 탁월한 지휘로써 국가 및 군사 안전 보장에 기여하였다.

그 중요한 적발만으로도 85년(1952년-필자주) 대통령 암살 음모의 김시현 사건 87년(1954년-필자주) 남도부 등의 대남 유격대 사건 88년(1955년-필자주)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한 그것이다.

그는 이렇듯 나라에 유공하였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의 생년은 단기 4253년(1920년-필자주) 11월 23일. 형년은 37세. 순직과 동시에 육군 중장에 승진되었다.

단기 4289년 2월 3일 입.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정일권.




ㅇㅅㅂ 일제매국노 아니랄까봐 독립군 잡아죽이던 작자를 물고 빨고 찬양을 하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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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수에요 15-10-03 15:52
   
ㅇㅅㅂ 글로벌 스텐다드로 보면
휼룡하신 민족사학자님이신 이병도
구족을 멸할 악질 매국노 김창룡을 물고 빠는 이병도
신라화랑도 운운하며 당당히 죽어라 학도병 모집글을 쓴 이병도

최남선이 일제에 굴복해 조선편찬위에 근무하자
절친이었던 정인보 선생을 위시로 당대의 지식인들이
최남선은 죽었다 장례식을 치르던 당시에도
전혀 게의치않고 조선편찬위 최장기 근무 신기록을 세운 이병도

일제가 단군 고조선 말살 하려하자 이 금수만도 못한놈들 이라고 목숨걸고
일갈한 최남선과는 달리 고대사 말살 작업의 최선봉에 서며
아무런 불만불평도 없이 매국노 짓거리에 일심하여
한일학자 통틀어 최장기 근무 신기록을 세운 자랑스런 이병도
일왕이 친히 내려주는 상금 두둑히 챙기며 초고속 승진하던 이병도

한민족 고대사 말살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학자들이 한수 접어주던 이병도
일본 학자가 한마디 한것에 심통이 나서 지꼴리는대로 할수 있는
진단학회를 일제의 허락을 맡고 개설하여 자처해서 검열까지 받으신 이병도
한민족 고대사 말살 왜곡의 최선봉 조선편찬위 근무자들이 죄다
진단학회 멤버인데 진단학회가 일제에 맞섰다고 하는 개도 비웃을 이병도
유리수에요 15-10-03 15:53
   
한반도 전역의 고대 사서를 죄다 강탈 수탈한것으로도 모자라
대마도 만주지역까지 샅샅이 뒤져 사서들을 죄다 수거한 꼼꼼한 일제가
조선편찬위라는 수백억 거금을 들인 한민족 고대사 말살 단체에
이병도를 수십년간 상금까지 줘가며 초고속 승진까지 시켜
일제에 맞서게 방치했다는 개도 안물어갈 소리를 철썩같이 믿는 초록불 광신도들

해방후 아무런 뇌우침 반성도 없이 사학계 요직을 차지하고
자신에게 역사관을 심어준 한민족역사 말살의 원조격인 일본인 스승을
제일로 존경한다며 그의 사관을 그대로 한국에 전파시킨 이병도
권력의 실세에 올라 감히 그 누구도 비판할수 없었던 악의 화신 이병도
박정희 정권때는 더욱 승승장구하여 박정희를 등에 엎고
서울 소재 고등학교를 강탈하며 유적지를 말살한 위대하신 실증사학자 이병도

무리하게 정권을 잡아 독립운동 하던 이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해
독립군 때려죽이던 일제매국노를 대거 등용했던 이승만
그런 이승만을 등에 엎고 사학계를 장악하여 식민사관을 전파한 이병도
일제 매국노 출신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더욱 승승장구하여
신라중심 사관만을 전파한 위대한 실증사학의 대가 이병도
일제 매국 혐의에서 그마나 자유스러운 전대가리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감히 그 누구도 손가락짓 할수 없었던 무소불위의 이병도
유리수에요 15-10-03 15:54
   
일제 매국노 혐의가 없는 전대가리가 정권을 잡자
식민사관 신라중심 사관을 아닌 민족사관 고구리 중심 사관으로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고 민심을 다잡으려 여지껏 승승장구하던
이병도 휘화 식민사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몰아세우던 80년초
그전까지는 감히 이병도 비판은 커녕 학설에 대한 의문도 제기하지 못한던 암흑기
고조선 고구리 사관을 얘기하면 북한 사관을 전파시키는 빨갱이로 잡혀가던 시절
80년대 들어서야 그 추악한 실체가 드러난 9족을 멸할 역적매국노 이병도

신라 화랑도 운운하며 일본느님이 일으킨 성전에 나아가 당당히 피를 뿌리며 죽으라고 했던 이병도
그 망령된 글 학도병 모집글에 얼마나 많은 이땅의 젊은이들이 이름모를 골짜기 대지에 묻히고 누웠던가
너희 조선은 수십년 안에 우리 일본에 동화되어 사라질것이라며 이병도에게 식민사관을 친히 전수한 일본인학자
그 일본 스승을 죽을때까지 추앙하며 세상 제일로 존경한다던 이병도
스승에 대한 한치의 의심없이 식민사관을 해방된 조국에 뿌리깊이 전파한 반일본인 이병도
이병도를 죽이고 이병도에게 침을 뱉고 이병도를 극복해야 하는 한민족의 중차대한 민족부흥의 사명

위에 열거한 엄염한 사실 진실 이병도의 현재진행형 죄악들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는
초록불 휘화 그 광신도들을 멸족시켜야 제대로 된 한민족 고대사를 온전히 복원할수 있으며
다시는 이땅에 외세가 발을 디디는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것이며
고구리가 고조선 영토를 다물했던 그 시절처럼 언제건 민족부흥 고토를 회복할 날이 올것이다
티치키티 15-10-03 15:57
   
오우..
     
유리수에요 15-10-03 16:00
   
이병도 이 버러지는 양파입니다
까면 깔수록 온갖 죄악들이 끝없이 나오거든요
이런 최악질 민족반역자 식민사학자를 민족사학자라고 옹호하는 버러지들이 넘쳐납니다
진실게임 15-10-03 16:30
   
지금의 박대통령한테 김창룡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함 물어봤으면 좋겠네...

반공의 대명사 였던 김창룡, 찬양 드라마들도 있었는데...
잘생긴형 15-10-03 16:31
   
이런 쓰래기 글을 잡게에서 왜 봐야 하는지?
정게로 가세요
     
유리수에요 15-10-03 16:32
   
너님이나 정게에 가세요 ㅉㅉㅉㅉ
헬로비녓스 15-10-03 23:55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