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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3-13 00:41
한국이 피해자 코스프레 한다는 쪽바리 언론.
 글쓴이 : 편돌이11
조회 : 1,506  


https://news.yahoo.co.jp/articles/4f5c3238d5aa4b91c207ff8bc78e84fdd3bbfd99

와..ㅅㅂ넘들 원폭을 천만발 맞고
가라앉아야.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Cu 개객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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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돌이11 21-03-13 00:41
   
케이던스 21-03-13 00:43
   
화장실 지어주러 침략하자
재미있는 21-03-13 00:44
   
상하수도가 도입되기 전, 전근대는 어느 도시나 배설물이 문제가 되긴 했는데,
한국은 인분을 비료로 쓴 탓에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습니다.

일제 때 기록을 보면 엄청 지저분하게 나오는데,
그건 오히려 일제 때문이죠.
농민들이 땅을 잃고, 혹은 대규모 공사와 공장일 등으로 서울에 몰리면서,
서울에 필요 이상으로 인구가 집중되고, 자연히 판자촌, 거지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위생이 나빠졌죠.
그 전에는 국민의 9할이 농부인데, 무슨 서울에서 뭐하겠습니까.

백만번 양보해서 현대의학과 위생개념이 도입되었다해도,
그게 양놈들이 만든거지 왜구가 만든건가. 지들도 거기가서 배워와 놓고, 누가보면 지들이 현대의학의 시초인 줄 알겠네 ㅋ

왜구가 쓰는 한자도 한국을 통해서 전례된 거니까,
왜구들보고 한자 쓰는 거 한국한테 고마워하라고 해야되나.
폭스원 21-03-13 00:45
   
조만간 지구 마사지 좀 받고 착해져라
뱃살마왕 21-03-13 00:48
   
오다이바나 해결하고 주접떨지 씁새덜
굿잡스 21-03-13 00:52
   
메이지 시대에도 여전했던 노상방뇨변의 미개 Jap

과거 왜국에서는 나라(奈良,710∼794)시대나 헤이안(平安,794∼1192)시대까지만 해도 수도(首都)나 도시라고 해봐야 농촌과 별 차이 없이 공지(空地)가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변소를 이용하는 일 없이 집 주위에서 방분, 방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문명국이었던 중국, 한국과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이들 나라의 풍습이 전해지기 시작했고 이때 중국의 호자(虎子),한국의 요강(尿岡)등이 들어와 일부 왜국 귀족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순소로(糞小路)와 노방변소

19세기 근세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은 노상에서 방뇨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당시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노상에서 방뇨하는 일본인의 모습을 인형으로 만들어 자기 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교토(京都)에는 '분소로(糞小路)'라는 거리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이 거리가 바로 화장실처럼 누구나 가서 대. 소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거리에는 언제나 오줌, 똥이 쌓여 있어서 누구든 이 거리로 들어갈 때에는 신고 갔던 신발을 벗고 입구에 놓여 있는 굽 높은 나막신으로 바꾸어 신고들어가야 했다고 한다. 그후 왜왕이 우연히 이 거리를 지나다 그 내력을 듣고 거리 이름을 바꾸도록 지시해서 오늘날의 금소로(錦小路)가 되었다.

메이지(明治)3년(1870) 일본 정부는 '방뇨 취제의 포고'를 내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요코하마 시내에는 83개소의 노방(路傍)변소가 만들어졌다.

이 노방변소는 일본 최초의 공중변소였는데 큰 변조를 땅에 묻고 그 주위를 판자로 막은 어설픈 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노력에도 불고하고 노상방뇨의 
풍습은 쉽게 근절(根絶)되지 않았다.

.

서서 오줌 누는 일본 여성

에도(江戶,1596∼1686)시대 일본 교토(京都)의 여자들은 길가의 소변통에 허리를 구부리고 서서 예사롭게 소변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풍습은 메이지 시대 말기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염집 아가씨. 하인을 거느린 상류층 부인들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도로변 벽을 향해 엉덩이를 내놓고 선 채로
오줌을 누면서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두고 비웃는 사람도 없었다.


https://m.blog.daum.net/dandakhan/16615018
굿잡스 21-03-13 00:56
   
메이지 시대에도 여전히 움집(땅파고 들어앉은 거주지)과 빈약한 판자집을 벗어나지 못했던 Jap.


(Jap)농민의 의복에 관해서는, 삼・무명으로 한정되어 노동에 적절한 염색되지 않은 筒袖・잠방이가 사용. 농민의 주거에 관해서는, 더 비참해서, 가건물기둥에, 토방을 강제. 마루는 불경제로 여겨져 토방 위에 멍석이나 짚을 깔고 잤습니다. 땀으로 부드러워진 멍석이나 짚은, 논의 비료로 사용. <농민의 식사에 관해서는, 엄격하게 규제되어 보리나 조가 주식이었습니다. 작은 새의 먹이입니다. 부식이나 간식도 금지.> 오락도, 연중 행사 이외는 금지         

http://blog.naver.com/marich77/40201615696����

Jap이 미개한 훈도시 차림인 이유.

100여년 전의 사진에서 보는 일본의 서민의 생활은 참혹했습니다만 일본인들은 에도시대의 서민은 염색된 화려한 옷을 입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에도시대의 서민의 삶 중에서 무엇을 입고 무엇을 덮고 살았을까요?

https://m.blog.naver.com/marich77/40200630476

마비키 まびき [間引き]   

1930년대 홋카이도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아이의 목을 눌러 살해하는 '마비키'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일용할 양식을 축내는 새 식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장, 자장, 잘자거라 자지 않으면 강에  버린다 자장, 자장, 잘자거라 자지 않으면 묻어 버린다'   

이 자장가 중「강에 버린다」,「묻어 버린다」는 마비키의 은어라고 한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6486���
대당 21-03-13 00:57
   
또 지들 이야기를 한국에 쳐 하고있네
외국선교사들 이라든지 서양인들 일본에 방문했을때 길거리에서 똥 누는 사람이 많았고
길거리에 대변 천지라고
그에 비해 조선은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해서 인분도 중요한 재산으로 여김
괜히 똥 누는 꿈이 재산이 생기는 꿈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생겼겠냐
에리땅 21-03-13 00:59
   
뭔가 만만해 보이니까 자신들의 불만을 우리나라로 돌려서 화풀이 하려는거 같음...
저새기들에 대한 답을 어떤분이 하신게 기억나서 저장해뒀는데...

'그냥  가만히  있다가 옆에 있는 사람 칼로  찔러 죽인 다음  지갑,재산 , 족보  등 다  훔쳐감.
정당하게  싸워서  이겼다고  우김.
반대로  왜구가  기습  당하면  비겁하게?  뒤에서  공격 당했다고  피해자  코스프레함.
왜구를 다스릴 땐  항상 ..  항상  이유 없이  패면 됨.
왜  때리냐고 하면 그냥 팸.
몇 번  반복하면  지들이  알아서  답을 찾아 놈.'

이글 쓰신분이 정답임
한국인과 왜구의 정체성 자체가 달라서 왜구는 왜구식 대로 상대해줘야함
우리나라식으로 좋은게 좋은거다 사이좋게 지네자
화해하자 하면 왜구는 '한국이 엎드려 절했다. 그렇고 그런나라' 라고 생각함
굿잡스 21-03-13 01:00
   
이와 같이 전국시대도 메이지 타이쇼 시대도 많은 일본 여성이 매춘부로서 팔아 치워졌습니다만, 현대의 일본인으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일 것이다. (「메이지부터 타이쇼에 들이고, 30만명의 일본의 젊은 여성이 해외에 팔리고 갔다」)           

러일 청일 전쟁을 위해 30만명의 여성을 매춘부로 수출         

露日戦争と 日清戦争 ために 30万名の女性を売春婦で輸出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t4NB&articleno=1466



[실제로 가면 기대한 것만큼 실망하게 된다  도쿄는 큰마을 정도의 느낌이다 그리고 도시에 널려있는 빈약한 목조주택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왕의 거처도 궁전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성벽같은 모습에 매우 초라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모습은 바로 통치자의 행태이다 바로 민족의 낮은 수준을 그대로 방치하고 근절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의 발전은 가장 핵심 공중도덕에 있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공중도덕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옷을 벗고 다니고 아무데서나 소변과 대변행위를 한다. 한마디로 공중도덕이 완벽히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유럽인과 너무 차이가 난다 일본은 방문하는 사람들은 유럽과는 일거수 일투족이 전혀 다른 모습들을 늘상 목격하게 될것이다 어떤 도시든 마을이든 목욕탕이 있고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남녀가 한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수 있다

그리고 특히 일본의 시골은 모두가 전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너무나 비참한 모습들이다] 


반대로 한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대명사로 알려진 이자벨라의 조선의 수도 즉 한양에 대한 구절

[지금 서울은 어느나라의 수도 에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며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근대 이전 전통문화에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간직하고 있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6111


대한제국 시기 만들어진 벽돌식 하수관

https://news.v.daum.net/v/20121025154116473
mymiky 21-03-13 01:05
   
삼일절에 대통령 연설에 저런 구절이 있지도 않음;;;

스페인 독감 이야기가 잠시 나왔는데?
굿잡스 21-03-13 01:09
   
1897년 봄 서울 거리의 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1896년 가을부터 정부가 주도한 도로정비사업의 결과 서울의 길은 넓혀지고 깨끗해졌다. 근대적 도시, ‘개명한’ 도시의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종로와 같은 큰길들은 물론 동네동네의 작은길들도 정비되었다. 구한 말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좁고 불결한 골목길들도 깨끗해졌다.


"지금 사대문을 통하여 다니는 큰길은 정부에서 수리하거니와 각 동리의 거리와 작은 골목길은 그 동리에서 수리하되 길과 문 앞을 편리하고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내부 훈령을 받들어 방을 붙이니 인민들은 다 알고 준행하여 어김이 없게 하라"
(「독립신문」 1896년 10월 20일)

라고 한성부에서 동네마다 방을 붙였다.

실제 도로정비사업의 결과가 동네의 골목골목들까지 어느정도 미쳤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서울을 방문했던 영국인 비숍여사가 “서울은 많은 면에서, 특히 남대문과 서대문 근방의 변화 때문에 예전과는 다르게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도로들은 최소한 17미터의 폭으로 넓혀졌고 그 양쪽에는 돌로 만들어진 깊은 경계가 있으며 그 중앙은 돌의 후판(厚板)으로 메워졌다. 그 도로들이 있던 자리는 원래 콜레라가 발생했던 불결한 샛길들이 있던 곳이다. 좁은 오솔길은 넓혀졌고, 진흙투성이의 시내는 포장도로에 의해서 사라지고 없었다.”(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고 놀란 것으로 보아 눈에 뜨이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은 틀림없다.

서울의 거리 풍경을 이렇게 급격히 변화시킨 도로정비사업은 1896년 9월말 내부대신 박정양의 이름으로 공포된 내부령 제9호 「한성내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내부령 제9호는 종로와 남대문로의 길폭을 55척으로 새로 정하고 가가(假家)를 정비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근거로 간선도로는 정부주도로 정비되었으며 앞서 「독립신문」의 기사가 전하는 바와 같이 일반의 소로들은 시민들이 자기 집 앞을 정비하는 방법으로 정비되었다. 당시 한성부 판윤이던 이채연이 이를 앞장서 지휘했고 경무청 소속 ‘순검’들이 도로와 가가의 정비를 단속하며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도로정비사업과 함께 서울 최초의 도시공원이 등장했다. 1896년을 전후한 시기에 원각사지 10층 석탑 주위에 빽빽히 들어서 있던 민가들을 철거하고 조성된 탑골공원이 바로 그것이었다. 도시공원은 근대도시의 또 하나의 상징적인 표상이었다. 왕을 위한 궁궐내의 정원과는 달리 도시의 시민을 위한, 공공을 위한 공간이 도시공원이기 때문이다. 공원의 또 한가지 실질적 기능은 도시의 허파로서 시민을 위해 도시의 위생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1896년 10월 「독립신문」의 논설은 공원의 도시위생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서울 성곽 주위에 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하자는 흥미로운 제안을 하고 있다.


“지금 성안으로 다니며 나무를 모두 돌아가면서 심으면 몇 해가 안되어 훌륭한 울타리가 될 것이요 무너지고 허술한 성을 숨길 것이요 또 보기에도 매우 좋을 것이다. 다만 보기에만 좋고 모양만 나을 뿐 아니라 성안 성외 인민의 위생에 대단히 좋을 것이다. ...... 외국은 동리마다 공원이 있어 나무를 많이 심는지라 조선도 다른데 공원을 만들기 전에는 성가로 다니며 나무를 심게 하는 것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많이 있을 터이니......”

19세기 후반 김옥균, 박영효에서 박정양, 이채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위생개선, 도로정비의 움직임들은 일제강점 이전 우리 손으로 이루어가려 했던 자주적인 근대도시 서울의 건설, 우리나라 근대도시계획의 태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서구에서도 근대도시계획은 산업혁명 이후 도시인구의 증가와 환경악화로 인한 공중위생문제로부터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 중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파리에서 시행된 도로정비와 공원의 조성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도시개조사업을 거쳐, 19세기 말에는 독일을 중심으로 제도화된 도시계획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발전되어갔다. 19세기 말의 조선에서도 일본을 다녀온 김옥균이나 미국을 다녀온 이채연, 그리고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을 비롯한 외국인 고문들을 통해 구미의 상황들이 소개되었을 것이다.

1897년 봄 서울의 모습을 일신시킨 도로정비사업, 탑골공원 등 공공을 위한 도시공간으로서의 공원의 조성 등 일련의 근대도시 서울을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들은 근대도시계획의 세계적인 움직임과 그렇게 큰 시간차 없이 진행된 것이었다.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AGE&search_div_id=CP_AGE004&cp_code=cp0434&index_id=cp04340032&content_id=cp043400320001&print=Y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불과 8년 만에

대한제국 건청궁에서(1887년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전등을 사용 한성전기를 세우고

전기 전차 전화등 근대화의 개혁을  급속히 추진(이미 자체 신분제 폐지등)

이미 대한제국은 천여년 전부터 선진 중앙집권 체재를 완비해 놓고(1600여년 전 이미 문무겸비 귀족 뿐 아니라 세계 최초 서민 교육 기관인 경당을 설립.


중세와 근세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이미 전국적 교육 인프라를 구축. 실제 대한제국은 전국적 근대 교육령을 발표하면서 이런 기존 서당등 전국 기관들이 기존 교육에 서양교육  과정도 병행하면서 근대 전문 고등 대학교도 빠르게 설립 진행 )  있다보니 이른 결심만 섰다면 근대 산업화든 모든 급속도로 더 빠르게 진행이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