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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2-07 14:51
미얀마 쿠데타와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 제가 모은 지식들
 글쓴이 : 빛둥
조회 : 478  

미얀마 문제를 뉴스에서 듣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로 오해하는 점이 있어서 적어 보고,

소수민족 문제가 미얀마 정치를 얼마나 뒤흔들어 왔는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무엇이 있었는지 적어봅니다.

출처는,

외교부에서 2019년 8월에 발간한 '미얀마 개황'이란 문서,

나무위키의 '미얀마'(특히 역사와 정치) 부분,

나무위키의 '쿤사' 부분 이며,

이 문서들을 근거로 제가 이해한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1. 미얀마(버마라고 해도 큰 의미상 차이는 없습니다.)는 최대다수인 버마민족이 전인구의 68% 정도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여러 소수민족입니다. 그리고 소수민족은 미얀마에서도 오지에 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비유하면, 전인구의 70%는 한국인이지만, 나머지 30% 인구는 언어부터 다른 민족이 산간오지 등에 살면서 계속 자잘한 충돌이 있다고 상상하면 됩니다.)

2. 따라서 소수민족이 사는 오지에서 (종교, 토지이용, 개발, 상속 등의 이유로) 분쟁이 나면, 대부분 국가의 재판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요 소수민족에게는 거의 다 무장조직이 있으며, 그 무장조직이 하나의 조직만 있는 것도 아니고, 무장조직들 간에 부침이 있습니다. 소수민족 내부에서도 선거를 통해 지도자가 뽑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미얀마군은 대부분의 징병을, 주류민족인 버마민족에서 합니다. 그리고 장교는 거의 100% 버마민족입니다. 그러니, 법질서 확립을 이유로, 버마 각 지역 오지에서 크게 분쟁이 나면, 미얀마군이 출동하여 소수민족 무장조직을 때리게 되고, 무장이 우위라서 대부분 이깁니다. 소수민족 무장조직은 게릴라전으로 대응하고 또한 장기전으로 가면, 결국은 소수민족 무장조직이 슬그머니 다시 자기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미얀마군이 장기간 오지에 주둔할 수도 없을 뿐더러(미얀마 면적은 67만6천평방킬로미터로, 우리나라 실효지배면적의 6배나 됩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임팔작전에서 망했듯이 도로 발달이 거의 안 되어 있습니다), 작심하고 그렇게 하려고 해도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얀마군은 1948년 독립이래 주요 소수민족(샨족, 카렌족, 카친족, 로힝야족 등)과 한번 이상씩은 모두 싸웠습니다. 하지만, 어떤 소수민족도 완전히 미얀마에서 밀려나거나 완전히 제압되어 굴복한 적은 없습니다.

4. 버마족은, 역사상 중국 운남성쪽에서 현재의 미얀마땅으로 남하한 종족인데, 11세기때 버마족의 첫 왕조인 버간 왕국의 자취가 보이므로, 버마족이 현재 미얀마에 도착한 것은 9세기~10세기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즉, 지금 미얀마의 주류민족인 버마족도 조상들이 9세기쯤에 이주해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로힝야족이 20세기 초반에 벵갈지방에서 넘어왔다고 해도, 버마족과 시기상의 차이가 있을 뿐, 이주해 온 사람들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5. 버마족은 11세기에 왕국을 세운 이래, 19세기에 영국의 식민지가 될 때까지, 여러 왕국을 만들면서 주위 민족과 계속 싸웠습니다. 지금도 존재하는 샨족, 몽족, 아라칸족 등과 수백년을 싸워온 겁니다. 태국을 세운 타이족과도 자주 싸웠는데, 근대 이전에는 버마족 왕국들이 더 많이 이겼었습니다. 태국을 가장 많이 괴롭힌 이웃 국가는 바로 버마였습니다.

6. 마지막 버마 왕국은, 인도 벵갈 지방을 차지한 영국의 힘을 몰라보고 다투다가, 결국 정복당해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영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후, 버마족을 비롯해 주변 오지에 살던 소수민족의 영역까지 뭉뚱그려서, 영국령 버마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류인 버마족을 편리하게 다스리기 위해, 중간에서 일할 사람들이 필요했고, 그런 역할 일부를 한 것이 불교를 믿지 않고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이었습니다. 벵갈지방에는 이슬람교가 번성했으니, 그 중 어떤 사람이든 버마 지방에 들어오면, 이슬람교를 믿는 종족(로힝야족)으로 인식된 겁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모두 영국식민지였기에, 그들은 '국경선'을 넘어온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영국식민지 내부에서 이동한 것이죠.

7. 2차대전 이전부터 버마에도 독립운동의 싹이 생기고, 특이하게도(일반적인 버마인의 교육수준이 낮았고, 이전 왕조가 망한 시점도 너무 오래되었기에) 버마에서는 영국군의 보조군대였던 버마군대의 장교들이 그 중심세력이 됩니다. 아웅산 수지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 초대 총리 우누,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정권을 시작한 네윈, 모두 이 버마족 청년 장교들의 일원이었습니다. 이들은 영국식 교육과 장교 교육을 받았지만, 영국에서 독립하고자 했고, 심지어 이를 위해 일본군과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과 함께 하면 결국 영국군의 자리를 일본군으로 바꾸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고, 일본군과도 싸워서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8. 버마가 독립을 하니, 묘한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원래 버마 왕국의 영역보다, 영국령 버마 식민지의 영역은 소수민족의 오지들까지 포함하니까, 훨씬 넓어진 겁니다. 그런데 그 국경선 내에서 인구의 70%는 버마족이었으니, 주류는 분명히 버마족이었습니다. 대신 나머지 30%가 소수민족이었고, 그들은 수백년간 버마족과 싸웠던 사이였습니다. 또한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거나 동화시킬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9. 그래서 극초기에 정부수립을 준비했던, 아웅산 장군은, 소수민족의 권리도 포함시켜 연방제를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군부 내의 반대파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 아웅산 수지의 정치적 노선(서구 민주주의,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일부 보장하는 연방제)은 바로 아버지의 뜻을 이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웅산 장군이 죽은 후, 정부는 우누 수상이 이끌게 되고, 서구식 의회정치에 대해 군부가 만족하지 못하면서, 군부의 장군이던 네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부독재를 하게 됩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주류 버마족 입장에서, 서구식 의회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니 너무 의사결정이 지지부진하고, 소수민족과의 다툼이나 경제사회 발전도 잘 못하니, 강경파 일변도인 군대의 장군들에게 정치하라고 맡겨버린 겁니다.

10. 네윈 장군의 쿠데타 이후, 1988년까지 네윈이 집권하였는데, 1988년에는 시위가 격렬하여 물러나게 됩니다. 당시에 영국에서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귀국한 아웅산 수지가 주목받으면서, 199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를 따르는 NLD가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지만, 곧장 군부의 소마웅 장군의 쿠데타로 인해 가택연금당하고 총선은 무효화됩니다.

11. 미얀마 군부정권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네윈-소마웅-탄쉐-그리고 이번 쿠데타를 일으킨 흘라잉 장군까지, 이 사람들은 권력을 이어받을 때 앞 권력자의 아들이어서 이어받은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전체적인 미얀마군 장군들의 지지를 모아서, 가장 강경한 성격이거나 최고위 장군이 집권했을 뿐이며, 일부 가족들이 호화롭게 살긴 했지만, 권력을 이어받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미얀마에 사는 버마민족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혈통적 정통성이 있는 정치 지도자이면서, 민주화 과정에서 기울인 노력때문에 높은 지명도가 있는 사람은 딱 한 명, 바로 아웅산 수지입니다. 가택연금 이상의 조치-해꼬지를 군사정부가 아웅산 수지에게 하지 못하는 게 바로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버마 민족에게 있어서, 군부는, 소수민족이 밉살맞은 짓을 할 때, 버마 민족의 이익을 위해 때려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라서 버릴 수 없고, 아웅산 수지는 버마 민족이 그래도 정상적 민주정치를 할 수 있고, 소수민족과도 협상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려면 버릴 수 없는 존재인 겁니다.

12. 아웅산 수지를 따르는, NLD 정당이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한 이래, 경제성장율은 꾸준히 6% 정도였으니, 그 자체로 불만은 나오기 힘듭니다.(다만 자본주의 개발 초기의 빈부격차 문제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2020년 11월의 총선도 아웅산 수지의 NLD 정당이 전체 득표의 83%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죠. 부정선거 얘기가 있다고 하는데, 83% 득표는,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NLD 정당이, 1990년 선거와 2015년 선거에서도 비슷한 득표율을 기록한 바 있어서 별로 의심할 거리도 못됩니다.

13. 그런데 경제발전 같은 것 외에도, 아웅산 수지와 NLD 당에게는, 매우 중요한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삥롱회의'라는 것입니다. 바로 미얀마의 소수민족들과의 민족간 정치협상을 하는 자리를 '삥롱회의'라고 합니다. 아웅산 수지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이 1947년 2월에 삥롱회의를 개최했고, 소수민족들에게 자치를 원칙적으로 약속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 자치약속때문에, 아웅산 장군의 암살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그 후 군사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끝없는 소수민족 무장단체와 미얀마 정부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게 된 겁니다. '21세기 삥롱회의'라는 이름의 회의가 2015년 이후 다시 만들어진 후, 2016/2017/2018년 3번에 걸쳐 크게 개최되었는데, 미얀마 정부(아웅산 수지의 NLD) - 미얀마 군부 - 소수민족 무장단체들, 이렇게 3자가 협의한 결과가... 성과가 있다고 볼 수도 있고, 성과가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초기보다 더 많은 소수민족 대표들이 모였고, '민주적 연방제' 원칙도 수립했지만, 정치/경제/사회/토지 분야의 연방제를 넘어 안보 분야의 연방제 원칙(쉽게 말해서 소수민족 무장단체가 무장을 내려놓는 것)은 해결하지 못한 겁니다.

14. 미얀마가 독립한 1948년 이래, 현재까지 70년을 무장해서 싸웠고, 그 이전시대에도 몇백년간 싸웠기 때문에, 버마족(특히 군부)과 다른 소수민족 간에는 깊은 불신이 있습니다. 내가 무장을 내려 놓으면, 대책없이 당할 거라는 불신이요. 그러니 진전이 지지부진하고, 군부는 이런 '21세기 삥롱회의'의 진행방식을 답답해 했습니다. 이 '삥롱회의'의 진행양상이, 이번 쿠데타의 한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15. 미얀마 연방 내 정치와 소수민족 문제 해결에 대해, 서구사회의 영향력은 과대평가되곤 합니다. 좋은 사례가 바로 '아편왕 쿤사'의 사례입니다. 나무위키에서 '쿤사' 페이지를 찾아보면, 서구 언론이 '아편왕'이라고 엄청난 악인인 것처럼 묘사한 쿤사는, 오히려 미얀마 정부와 미얀마 소수민족(샨족)의 비호를 받고, 잘 살다가 암으로 죽었을 뿐이며, 그 자손들은 자산가로 잘 살고 있습니다. 왜냐? '쿤사'는 샨족 무장단체(지금까지 앞에서 제가 말한 무장단체와 다를게 없습니다.)의 지도자였고, 온건파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미얀마 정부군과도 협조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을 세운 쿤사를 지역민은 잘 따르게 되었고, 서방이 아무리 쿤사를 저주해도, 지역민도 지지하고, 미얀마군도 나름의 공을 인정하니, '샨족의 무장단체 지도자 경력이 있는 정치지도자'로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제가 앞서서 얘기한 여러 소수민족들(카렌족, 카친족, 샨족, 로힝야족, 몽족 등)에게는 이런 무장단체 지도자들이 많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 이들은 미얀마 정부군과 협조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조그만 '쿤사'들은 미얀마 전체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해당되며, 이런 복잡한 상황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이어서, 아웅산 수지는 합의를 이끌어 내고, 평화를 실현하려 한겁니다.

16. 그런데 어쩌면 좋습니까? 미얀마 군부가 이런 지지부진한 협상이 맘에 안 들었는지, 평화가 진행될수록 자기들 역할이 줄어드는게 맘에 안 들었는지, 모든 정치적 협상을 파토내고 쿠데타를 일으켰네요. 기존에 약간 진전된 것도 막혀버리고, 더욱 답이 없어진 상황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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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나 21-02-07 15:06
   
요약을 해주셨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래서 해봤습니다.
요약
1.원래 미얀마는 소수민족이 많았고 서로 사이가 안좋다.
2.영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통합되었다.
3.독립 후 통합을 하려고 해도 지형적으로 힘들었고 아웅산 아버지의 협정 때문에 소수민족의 자취권이 보장되어버렸다.
4.군부가 그걸 싫어한다.
5.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