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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2-15 11:42
조선의 경제력 수준 측정법
 글쓴이 : 붉은깃발
조회 : 1,272  

그냥 왜구들 습격횟수 보면 파악 가능할듯

중국 간 왜구들은 몇 달 동안 공방이나 도시 점거해서 기술자 혹사시켜서 창조 경제로 돈 벌었다던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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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귀찮아 21-02-15 11:49
   
밑에 비슷한 종류의 게시물에 의문이

그럼 이순신 장군의 왜군의 보급을 막기위한 서해안 장악의 의미가 퇴색되는건데

왜군이 조선에서 자체 보급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으면 배를 통한 서해안으로의 보급에 그렇게 목을 맬 필요가...

머 다른 분이 보급에 군량미만 있는거 아니라고 말을 하시는데 그당시 왜군중 조총병이 10%내외고

그당시 보급이라는게 대부분 군량미 인데 글세요...............
     
heltant79 21-02-15 11:58
   
그렇다고 해서 왜군의 서해한 진입을 막은 의미가 퇴색되는 건 아니죠.

먼저 왜군이 조선에서 자체보급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때는 왜군이 한양을 함락했어도 부산-한양에 이르는 가느다란 라인을 확보했을 뿐, 양식을 거둘 수 있는 지역을 장악한 건 아니었어요. 그나마도 최고 곡창지대인 호남은 발도 못 붙였고요.

그리고 현지조달을 했다 해도 이걸 운송하는 게 문제입니다. 조선은 육상운송을 지양하고 세곡도 대부분 수운에 의존했는데, 그 수운로의 진입로가 다 서해에 있었습니다.
즉 왜군이 서해를 장악 못하면 수운을 장악 못하고, 그럼 왜군은 조달한 식량을 열악한 육상수송을 통해, 의병 등의 게릴라 저항을 뚫고 모아야 합니다. 반면 조선은 조정이 의주까지 도망갔어도 수운을 통해 호남 식량을 보급하는 데 문제가 없었고요.
실제로 행주대첩 때 권율 장군은 적군 점령지에서 싸웠는데도 한강을 통해 보급을 쉽게 받습니다.

정유재란 때는 왜군부터가 현지조달보다는 무차별 학살을 했고, 우리는 청야전술로 대응했기 때문에, 육상운송을 통한 현지조달이 더 힘들었습니다.
명량해전 직전에 고니시 군이 태안반도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되돌아온 것도, 임진년 침공의 경험으로 수운 없는 병참의 한계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조선이 임진년에 먹고살만 한지 여부와 왜군의 서해진출 저지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과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름귀찮아 21-02-15 12:12
   
밑에 게시물의 영상 내용은 왜군이 조선에서 자체 보급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는

내용인걸로 압니다

영상 중간에 조선의 군량미 모아놓은 곳을 왜군이 털어 먹은 몇몇 기록을 가지고

사실을 왜곡하는듯한 영상 같아서 의문을 제기하는거조
               
도나201 21-02-15 12:43
   
임진왜란때........
조선의 패전의 가장 큰원인중 하나가 군량미 산정이라고 합니다.

조선인 과.  일본인의  일일식사량의 차이가 최대 5배까지 차이가 나서.
군량미산정을 우리측기준에 맞춰서 군량미를 계산하는 바람에
많은 탈환작전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함.

굶고 있을줄 알았는데
제때 와서 공격해주니 오히려 위기를 여러차례넘겼다고 함.

이게 정유재란이후  명과 대치상황에서 천천히 퇴각준비를 할때
군량미의 실체를 알았다고 함.

즉, 이젠ㄴ 군량미 떨어져서 방어력이 줄어들었겠다 싶었는데.
막상 공격해보니 애들이 군량미가 생각보다 많았다고 ...

나중에 알고 보니 하루에 식사량차이가 최소 1/3  최대 1/5 차이가 낫다고 함.
그때도 엄청 먹었던것으로 기록.

일본이 풍토병에 많이 걸린것도
식사량에 오는 면역력차이가 극심해서
인분이 의외로 화학무기로서 굉장한 위력을 발휘 했다고 함.

실제로 인분을 뒤집어 쓰고 많은 병이 옮겼다고 함.

그래서 인분을 사용하면  바로 퇴각을 햇다고,,,,,,,ㅡ.ㅡ
               
heltant79 21-02-15 12:54
   
저도 그 영상을 봤는데, 징발은 어찌어찌 한다고 해도 그걸 집적하고, 배분하고, 진격로를 따라 병참선을 유지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붉은깃발 21-02-15 12:02
   
대부분이 군량미는 아닐 거 같아요 화살만 해도 두 나라 차이가 너무 커서 서로 못 쓰고 전투 후 박살나는 갑옷이나 무기만 해도 그 양이 엄청날 거고요 (그리고 화약의 경우 조선 조정이 단속을 잘해서 이건 무조건 본토 보급이 필요함)

덤으로 말하자면 육상으로 보급하는 것보다 해상으로 운송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 대영제국도 웬만하면 해상보급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당시 일본은 본인들이 수전에 강하다는 인식이 있었음)
          
도나201 21-02-15 12:55
   
이미 일본에서는 서해항로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고 함.

심지어 울돌목부근의 조류에 대해서도 잘알고 있었고,
하지만 외해를 돌면 당시 첨저선이 아닌 배로 외해를 항해하는 것은
워낙 파고주기가 짧아서 배의 균형을 잡기가 굉장히 어려웠다고 함.

한산도대첩에서 패했던 이유중하나가.
바로 이러한 첨저선의 특성이 배의 균형이 잘 잡혀서 화포의 정확성이 올라갔다고 함.
뭐 이건 결과론적인 사고지만,
해보니......이랫다.. 라는 식의 결과론적인 상황이고,

실제로는 배의 화포설치가 일본이 어렵다고 함.
나무의 질자체가
소나무 vs삼나무    나무강도가 2.5배 차이가 낫다고 함.

대신 삼나무가 가볍고 해서 속도에서는 매우 빠르다고 ....

결국 한산도대첩은 내해로 끌여들어서 화포의 정확성이 높아지고,
학익진에 의한 화포운영이 더효과적으로 들어갔다라는 것.

이건 화포중심의 전술을 제대로 사용한 일례로  서양의 해양화포전보다.
백여년은앞선전술임.

한산도군영일때 전라도라는 곡창지대를 갖고 있어서
사실상 보급은 생각보다 쉬웠음.

당시 쌀의 세전의 비율이 전라도에서 6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니.

그다음 쌀생산지가 평양부분이였는데  말그대로 평안감사가 속담으로 남을 정도로
많은 생산지를 가지게 됨 25%이상.

하지만 이부분은 왕궁에 세전으로 가지 않고 평안감사가 다 가짐.
그이유가 명의 사신행렬을 평안감사가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비용을 평안감사가 운영하고 있었기때문.

생각보다 조선시대에서도 평양의 경제적자립은 조선팔도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였음.
또 군비 역시 자체적으로 운영했기에 .. 생각보다는 굉장한 지위였음.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시장정도의 위치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