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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8-16 12:36
아프가니스탄 현대사
 글쓴이 : 울티마툴레
조회 : 1,079  

1919년 라왈핀디 조약이 체결된 이후, 아마눌라 칸 국왕은 아프가니스탄을 주권국이자 완전한 독립국으로 선언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관습적인 고립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수교를 맺기 시작하며, 이후 1927-28년 유럽과 터키의 순방에 나서는가 하면, 국가를 근대화하기 위해 여러 개혁들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여러 개혁들 사이엔 마흐무드 타지가 있었는데, 그는 여성 교육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초등교육의 의무가 명시된 1923 아프가니스탄 헌법 68조가 제정되게 하였다. 노예제가 명시된 법은 1923년에 폐지되었다.[36]

여성의 전통적인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거나 남녀공학의 교육기관을 세우는 등의 개혁은 부족장과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빠르게 소외되었다. 압도적인 무장 반란세력에 부딪혀, 아마눌라 칸은 1929년 1월, 하비불라 칼라카니가 이끌던 세력에 의해 퇴위당하였다.


아마눌라의 사촌이었던 모하메드 나디르 샤 왕자는 1929년 11월에 칼라카니를 굴복시키고 살해하며, 자신 스스로를 국왕 나디르 샤로 칭한다. 그는 점진적인 근대화를 위해 아마눌라의 개혁을 단념하였으나, 1933년 하자라족 출신의 학생 압둘 칼리크에 의해 암살당한다.

나디르 샤의 아들이였던 당시 19세의 무함마드 자히르 샤는 왕위를 물려받아 1933년부터 1973년까지 집권한다. 자히르 샤는 1946년까지 그의 삼촌의 보조를 받아 나라를 통치하였는데, 그는 총리의 자리에 올라 나디르 샤의 정책을 이어나갔다. 자히르 샤의 또다른 삼촌이었던 샤 마흐무드 칸은 1946년에 총리직에 임명되어 더 큰 범위의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기 위한 실험들을 해 나갔는데, 그의 예상보다 더 발전하자 정책을 무산시켰다.


총리직은 1953년 국왕의 사촌이자 매부였던 무함마드 다우드로 교체된다. 다우드 칸은 소련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길 원하였고,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지 않고 냉전 시대에도 어떠한 세력과도 연맹을 맺지 않으며 중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미국은 상호 경쟁하는 과정에서 서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영향력을 얻기 위해 앞다투어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고속도로, 공항, 기타 기반 시설을 지어 줌으로써 중립 상태는 국가에게 이득이었다. 1인당 기준에서 아프가니스탄은 어떠한 국가보다 많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1973년, 국왕 자히르 샤가 해외 순방길에 있었던 동안 다우드 칸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첫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파키스탄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게 하였다. 어떠한 전문가들은 부토가 1978년 4월 샤우르 혁명의 기반을 다진 것으로도 해석한다.



1978년 4월, 공산주의 정당인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PDPA)이 샤우르 혁명을 기점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권력을 잡게 된다. 공산 정부에 반대하던 세력은 몇개월 만에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키는데, 이는 곧바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무자헤딘이 이끄는 게릴라군이 정부군에 대항하는 내전으로 발전한다. 소련이 인민당을 지원하기 위해 몇 천명의 군사 고문을 보내는 동안, 파키스탄 정부는 반란군들에게 비밀 훈련소를 제공하였다.[38] 그동안 인민당에서는 다수였던 칼크와 온건적인 파르참으로 계파가 나뉘어 마찰을 연이어 빚다, 파르참 계파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구실로 관련된 정부 각료를 해고하고 군 장교를 체포한다. 하피줄라 아민과 인민 민주당의 군부 인사는 건재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바브락 카르말, 하피줄라 아민이 이끄는 인민 민주당은 무함마드 다우드 정권을 전복하였으며, 다우드는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 정변은 샤우르 혁명, 즉 위대한 4월 혁명으로 알려졌다. 1978년 5월 1일, 타라키는 대통령, 총리, 인민 민주당 사무총장직을 겸임하였다.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으로 개명하였으며, 인민 민주당 정권은 1991년까지 존속하였다.

1978년의 칼크 반란으로 두라니족(다우드 칸을 비롯하여 이전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왕조)과 대립하던 파슈툰족의 길자이 부족이 소생하게 되었다.[39]



권력을 잡은 인민 민주당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야심찬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전국의 농민 부채를 탕감하였다. 이들은 또 여성의 권리에 관한 여러 정책을 내놓고 여성을 정계로 끌어들였다. 저명한 여성 정치인으로 아나히타 라테브자드를 들 수 있는데, 그녀는 유력한 마르크스주의자 지도자이자 혁명 평의회의 의원이었다. 라테브자드는 1978년 5월 28일에 '뉴 카불 타임스' 지의 사설에서 '권리를 통해 여성은 평등한 교육, 직업, 안전, 의료 서비스, 국가의 미래를 위해 건강한 자녀를 기를 자유 시간을 누려야 하며 ... 여성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일은 이제 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받는 일이다."라고 썼다.[40]

카불 등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정책에 환영하기도 하고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세속적 성격 때문에 농촌 지역에 사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이에 반감을 가졌으며, 전통적인 이슬람 율법을 선호하였다.

미국은 1979년 중반부터 파키스탄의 파키스탄 정보부 (ISI)를 통해 반소련 무자헤딘 세력과 아프간계 아랍인 전투원들을 지원해왔다.[41] 엄청난 양의 현금과 무기들, 2천 개 이상의 FIM-92 스팅어 지대공유도탄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파키스탄으로 전달되었다.[42][43]

1979년 3월, 하피줄라 아민이 총리가 되었으며, 원수직을 보유하고 최고 국방 평의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1979년 9월,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가 인민당 내부에서 칼크 동료였던 하피줄라 아민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살해되고, 아민이 대통령직에 오른다. 소련은 아민을 불신하여, 1979년 12월 소련 특수 부대가 아민을 암살한다. 이후 바브락 카르말이 소련이 양당 인사를 모두 등용하여 구성한 정부를 이끈다. 소련은 카르말 정부의 아프가니스탄을 안정시키기 위해 소련군을 배치하나, 아프가니스탄 내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 관여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직접적으로 관여되었었다.[44]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의 파르참 파를 지원하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은 1978년에 양국이 맺은 우호 협력 및 선린 조약을 명분으로 1979년 12월 24일에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였다. 10여 만 병력이 넘는 소비에트 군대가 침공에 동원되었으며, 만여 명의 병력과 파르참 파의 구성원들도 가세하였다. 아민은 살해당하고 바브라크 카르말이 뒤를 이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하여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은 무장하고 소련 점령군에 맞서 봉기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히딘을 지원하였다. 미국의 지원은 카터 행정부 때 시작되었으나, 레이건 행정부에서 크게 늘어나,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앙골라, 니카라과 등의 반공 저항 운동을 지원하도록 규정한 이른바 레이건 독트린의 핵심 사항이 되었다. 무자히딘은 미국의 지원과 더불어 파키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등의 지원도 받았다.

소련의 점령으로 6만~2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주민이 살상당하였다. 5백여만이 넘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조국을 등지고 파키스탄, 이란 등 해외로 떠났다.[45]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은 데다 사상자가 크게 늘면서 소련은 1989년에 철수하였다.

소련은 계속 모하마드 나지불라 대통령(전에는 아프가니스탄 비밀 경찰 KHAD의 수장이었다.)을 지원하다가 1992년에 새 러시아 정부가 나지불라 정권에 석유 제품 판매를 거부하였다.[46]

내전 편집
전쟁 때문에 수많은 엘리트와 지식인들이 해외로 피신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도층의 불균형 현상이 일어났다. 소련군을 물리친 무자히딘 내 각 분파들은 계속 서로 싸웠으며, 아프가니스탄은 군벌 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 시기에 가장 심각한 전투는 1994년에 있었는데, 카불 한 곳에서 10,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 탈리반(탈레반)이 정치-종교 세력으로 성장하여 결국 1996년에 카불을 장악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2000년 말에 탈리반은 국토의 95%를 장악하고 있었다.

탈리반이 7년간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면서, 주민 절대다수는 자유가 억압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했다. 여성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 엄금되었으며, 어린 여성이 학교나 대학에 가는 것도 엄금되었다.[47]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적으로 근절되었으며, 절도범은 손과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48] 2001년에 탈리반은 아편 생산을 거의 일소하였다.[49]

탈레반 토후국과 북부 연맹 편집
<nowiki />이 부분의 본문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입니다.

1996년 말의 아프가니스탄 점유 상태; 마수드 점유 지역 (적색), 도스툼 점유 지역 (녹색)과 탈레반 점유 지역 (황색).
1994년 말 탈레반의 초창기에 이룬 몇몇 승리들은 엄청난 손실로 끝난 패배들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탈레반은 1995년 초 카불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마수드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1996년 9월,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군사적 지원[50]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경제적 지원을 등에 업고 또다른 주요 공격을 준비하였고, 마수드는 카불에서 철수해야 했다. 탈레반은 같은 달에 카불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그들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유사한 형태의 엄격한 샤리아를 도입하였다. 인권을 위한 의사회(PHR)는 이와 같은 체제에 대하여 "그동안 세계의 어떠한 정권이나 체제가 인구의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을 사실상 가택 연금을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강제한 바가 없었으며,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거나 남성과의 동행 없이 의료 진찰을 받거나 학교에 다니는 것을 신체적 처벌행위로 금지한 사례가 없었다."라고 표명하였다.[51]

탈레반에게 카불을 빼앗긴 이후에 마수드와 도스툼은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전선 (북부 연맹)을 형성한다. 탈레반은 마자리샤리프 전투 (1997-98)에서 도스툼 세력을 패배시켰다. 당시 파키스탄의 군 참모장이였던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탈레반이 북부 연맹을 물리치는 것을 돕기 위해 몇 천명의 파키스탄인들을 보내기 시작하였다.[50][52][53][54] 또한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오사마 빈라덴과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이끌던 알카에다 네트워크도 아프가니스탄에서 가동되었다. 미국은 이 사실과 함께 100만 명에 이르는 아프간인들이 내부적으로 축출되었다는 소식에 대해 우려하였다. 1990년부터 2001년 9월까지 40만명의 아프간인들이 내부적으로 이루어진 접전들에 의해 사망하였다.[55]

2001년 9월 9일, 마수드는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 주에서 두 명의 아랍인들에 의해 xx 공격을 당해 암살되었다. 이틀 후,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난다. 미 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을 공격의 가해자로 지목하며, 탈레반에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다.[56] 탈레반이 협조를 거부하자 2001년 10월 작전명 항구적 자유 작전이 실행되었다. 최초의 침공 기간동안, 미군과 영국군은 알카에다 훈련 캠프를 폭격하였다. 미국은 탈레반을 권력에서 몰아내기 위해 북부 동맹과 협력한다.[57]

2001년 12월, 구 무자히딘의 지도자와 난민들이 독일에서 만나 본 협정을 맺었는데, 여기서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칸다하르 시 남부 출신으로 파슈툰족 두라니 씨족(구 왕가 출신) 사람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아프가니스탄 과도 정부의 의장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최근 역사 (2002년 ~ 현재) 편집
<nowiki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및 제2차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입니다.
2001년 12월, 탈레반 정부가 전복된 이후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출범하였고, 카르자이 행정부를 보조하고 기본적인 방위를 위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국제안보지원군을 결성한다.[58] 반면 탈레반 세력은 파키스탄에서 재결성되었고, 그동안 아프가니스탄에는 연합군이 진입하고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였다.[59][60]

탈레반은 권력을 찬탈당한 뒤에 곧바로 반란을 일으킨다. 2000년대 동안 ISAF와 아프간 국군은 탈레반에 수차례 공격을 실행하였으나, 완전히 탈레반을 패배시키지 못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해외 투자의 부족과 정부 부패, 그리고 탈레반의 반란 등의 이유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61]

한편,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 구조를 세울 수 있었고, 국가명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꾼다. 여러 차례의 외국 원조와 함께 나라의 경제, 보건, 교육, 교통, 그리고 농업 분야들의 발전시키기 위한 시도도 많이 이루어졌다. ISAF 군대들도 아프가니스탄 국군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2002년부터 10여년 동안 서방 국가들에서 강제 추방된 사람들을 포함한 50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62]

2009년에 들어서는 탈레반이 이끄는 그림자 정부가 국가 곳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63] 2010년에는 카르자이 대통령이 탈레반 지도자들과 평화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반란 단체들은 2015년 중반에 탈레반 최고 지도자가 협상을 결정하기 전까지 협상 참석을 거부하였다.[64]

2011년 5월 파키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사망하면서 많은 수의 아프간 주요 인사들이 암살되었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 간 접전이 늘어났고 하카니 네트워크 주도 아래 많은 대규모 공격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루어졌다. 미 정부는 증가한 공격 횟수를 두고 파키스탄 정부를 비판했다.[65][66] 미 정부는 15년 넘게 수십억 달러를 개발 원조 지원금으로 지출하였고 같은 기간 동안 1조가 넘는 달러를 군사 지원에 지출하였다.

2014년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카르자이 대통령은 권력에서 물러났고 2014년 9월 아슈라프 가니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67]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의 전쟁 (미 역사상 가장 길었던 전쟁)이 2014년 12월 28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수천명이 넘는 미국 주도의 나토 군대가 아프가니스탄 정부 군대를 훈련시키고 자문하기 위해 나라에 남았다.[68] 전쟁은 반란 주동자, 아프가니스탄 시민들과 정부 군대를 포함하여 직접적으로 9만여명의 사망자를 남겼다. 10만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2021년 6월 미군 철수의 움직임을 계기로 탈레반이 다시금 아프간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8월 15일 수도 카불이 사실상 함락되며 항복을 선언했다.[69][70]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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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살마왕 21-08-16 12:41
   
복잡난해하다 하~~~
노원남자 21-08-16 12:44
   
아프칸은 백년가까이 전쟁이나 다름없는데 먹고살기위해선 다른 빈국처럼 마약팔겠죠.뭐가됬던 평화는 오지않을땅이라고 생각됨
울티마툴레 21-08-16 12:46
   
아프간은 이슬람군벌세력과 세속화세력간 내전에다 영국 소련 미국 파키스탄 등 외세의 개입이 환장 콜라보된 역사로군요. 보아하니 미국에 협조한 북부동맹이 다시 들고 일어날듯요. 탈레반이 온전히 장악할 거처럼 보이지만 뿌리깊은 반목과 질시로 인해 쉽지 않으며 미국점령기간 귀환한 500만명이 다시 외국으로 나가 저항할텐데 그럼 계속되는 내전이 이어질듯.

아이들과 여성들만 피해자로 남는 곳임.
존버 21-08-16 13:43
   
읽어 보고 싶은데 장문을 못읽는 불치병에 걸려서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