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라의 역사적 경로의존성이나 현존하는 사회구조적인 부분이 영향을 끼치는 것도 분명 있기는 합니다. 카드대신 현금을 주로 사용한다든지 은행에 돈을 집어넣는대신 자택에 현금을 보관한다든지 여러 이해당사자들과 연결된 시스템의 경우 손쉽게 교체하기 힘들다든지 서열문화로 인한 의사결정의 비합리성이라든지...
하지만 울나라에서 '한'이라는 정서처럼 일본인들도 자신들의 고유함이라고 생각하는 정서가 있습니다. 이건 아마도 디지털 이전 아날로그 산업이 잘 나갔던때가 일본인들에게 화양연화 시절이기에 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끼치는 영향도 분명 존재하는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인간의 삶에 비유하자면 그들에게는 10-20대와 같은 사회적 활력이 넘쳐나던때이니까요. 그 시절 문화에 대한 향수같은거죠.
여기에 일본은 섬나라라 갈라파고스화 되는 영향도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죠
유럽 국가들이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더 먼저 일어났다고 해도..
그들은 그래도 국경을 맞대고 쉽게 문화적, 기술적 교류하고 여행을 하죠..
하지만 일본은 섬나라라 갖혀서 지들 세상 안에서 빠져서 삽니다.
그럼에도 프랑스, 스페인을 비롯 유럽 대부분 국가들이 민원이 느려서
우리나라에서 잠깐이면 되는 간단한 관공서 서류 민원도 유럽은 수일~ 일주일이상을 기다려야 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나라의 사회시스템이라는건 경로의존성을 가집니다. 그나라의 과거 역사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죠.
둘다 오랜기간 봉건사회였고 둘다 외침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던 국가입니다. 영국은 노르만족 침공이후 거의 1000년동안 다른 나라에게 유린당한 경험이 없습니다. 일본도 제대로 침략을 당해서 사회가 완전히 뒤바뀌어본 경험이 없죠. 태평양전쟁이 유일하게 대외전쟁에 패해 사회시스템에 큰 영향을 준 경우지만 이 경우에도 미국은 소련을 의식해서 일본의 구세력과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무너뜨리진 않았죠.
애초 섬나라였던 일본이 왜 아시아국가중에서도 근대화에 먼저 성공했는지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
물론 섬나라라는것이 전혀 영향일 끼치지 않는것은 아닙니다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이 근대화 이전시기라면 몰라도 오늘날에 와서는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북한같은 폐쇄사회도 아니고. 영국이 보통 서구사회에서 보수적이라고 이야기하는건 그것이 섬나라라서가 아니라 사회시스템이 뒤바뀔만큼의 대외적인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섬이나라는 지리적 위치가 외침을 막는데 도움을 주었기에 전혀 영향이 없다고 볼수는 없지만 여기서의 섬의 역할은 보수성이 아니라 사회적 변혁에 주는 대외적인 요인이 약한 측면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주나 대만이나 인도네이사와랑은 상황이 다른거죠.
대만, 호주, 영국도 스마트폰 보급화 잘되고 있을때
일본은 섬나라안에 갖혀서 피쳐폰 쓰고 있었습니다.
선진국중에 가장 스마트폰 보급화가 느렸고
심지어 중진국들보다도 보급화가 느린 시기도 있었던걸로 압니다.
선진국이 어떻게 스마트폰이 다 보급되서 쓰고 있었는데 구시대 피쳐폰을 쓰고 있었을까?
먼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갈라파고스화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물안 개구리 같은 섬나라, 노령화 이 2가지 요인이 가장 결정적인걸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름 선진국이 스마트폰도 보급화 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할수 없을걸요
물론 여기에 일본은 수직적으로 경직된 조직 사회.. 꼰대적인 위계 질서 사회상도 있겠네요.
"하지만 울나라에서 '한'이라는 정서처럼 일본인들도 자신들의 고유함이라고 생각하는 정서가 있습니다. 이건 아마도 디지털 이전 아날로그 산업이 잘 나갔던때가 일본인들에게 화양연화 시절이기에 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끼치는 영향도 분명 존재하는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인간의 삶에 비유하자면 그들에게는 10-20대와 같은 사회적 활력이 넘쳐나던때이니까요. 그 시절 문화에 대한 향수같은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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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같은 주장에 대한 반론을 이미 저 또한 머리속에 생각을 해두고 위에처럼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조건 과거라고 다 향수에 젖는것이 아니라는것. 자신들에게 그것이 화려한 시절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그리움으로 작용하지 누구에게 얻어터지고 핍박받고 가난하고 천대받던 시절을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본에게 화려했던 시절은 영토적인 면에서는 메이지유신~태평양전쟁이고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면에서는 1960-1980년대입니다. 이 중 오늘날 일본인에게 가장 친숙한 시기는 언제일까요?
일본에선 단카이 세대라는 명칭을 주로 쓴다. 1차 베이비붐 세대라고도 하는데
종전 후인 1947년부터 1949년에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킨다.
1947년에 267만 8792명, 1948년에 268만 1624명, 1949년에 269만 6638명이 태어나 3년 동안 806만명이 태어났다. 다만 타 국가와는 다르게 베이비붐은 3년 정도로 짧게 끝났고 좀 넓게 봐도 1953년생부터는 출생자 수가 200만을 넘기지 못하기 때문에 이후로는 베이비붐 세대에 끼어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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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일본의 베이비 붐 세대는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에 출생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커서 사회에 진출해서 소비하고 일하던 경제 주체, 일꾼이 되었을때가
20대 30대이던
1960년대~ 1980년까지로 설명할수 있습니다.
주고객층 숫자가 많으면 뭐다? 기업과 정부도 주고객을 우선할수 밖에 없죠
댁이 말한 문화, 경제적으로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가 주도했다고 할수 있네요. 저출산 고령화의 영향이라고 할수 있죠.. 그세대가 이제는 늙었죠
그래서 지금 한국이 과거지향성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지 여쭤 보겠습니다. 댁말대로라면 유럽도 그럼 과거지향성이 이미 나타났어야 하구요. 마찬가지로 모든 반도국가는 다 한국같아야 하는데 다 한국같은지? 반도는 또 섬과 달리 보편성이 나타나지 않나요? ㅋㅋ
참고로 사회적 역동성이 떨어지는것과 과거지향성은 좀 다른 문제입니다. 사회적 역동성은 새로운 문화적 창작능력이 떨어진다거나 성장동력들이 사라져 경기가 침체되는걸 의미하지. 단순히 과거것에 침착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것이 있어도 능력이 없어서 따라가지 못하는것과 아예 따라가려 하지 않는것은 다른것이니까요. 그건 유럽과 일본을 비교해보시면 됩니다.
앞서 설명했지만 유럽의 예시를 든것부터 틀렸습니다.
비록 영국은 EU를 탈퇴했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Eu에 속할 만큼
경제, 문화교류가 많았고 현재 EU를 탈퇴했지만 아직도 인근 국가들과 문화적 교류도
많고 여행 왕래도 많습니다. 즉슨 EU국가들은 섬나라 조차 문화적 교류, 왕래가 많습니다.
하지만 일본이란 섬나라가 동아시아에서 어떤나라랑 왕래를 하고 문화적 교류를 할까요
한국? 중국? 기껏해야 문화적 영향력 조차 없는 대만이죠..
그러니 일본은 섬나라 중에도 단연 으뜸인 갈라파고스화를 시전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설마 일본의 주변환경이 EU국가들처럼 주변국가들과 친밀하다고 말할순 없겠죠?
호주 처럼 파이브아이즈에 과거 영연방 국가에 속했던 영어권 국가라고 말할순 없겠죠
일본이 다른 나라와 왕래가 적고 문화 교류가 적은 나라인지? 애초 댁의 기초적인 근거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차라리 그건 일본인들의 보수성에 찾아야 하는것이 맞습니다. 문화교류나 왕래가 잦지 않아서 영국이 유럽내에서도 보수적이라는 소리를 듣는것이 아니니까요. 그건 먼저도 언급해뜻이 역사적 경로의존성과 그아래에서 성립된 사회구조, 그리고 다른 문화적 현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습니다.
그럼 일본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 서양문물을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중에서 빨리 받아들이고 근대화에 성공했을까요?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보면 어찌보면 지나칠정도로 서구에 대한 모방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때는 보다 개방적이었지만 왜 지금은 보수적이 되었을가요? 저출산고령화? 조선은 그럼 이미 조선말에 시대를 앞서간 저출산고령화였다는 말씀?
댁은 계속해서 사회적 역동성과 과거지향성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폐쇄성은 저출산고령화와 같은 인구변동성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보다 복잡한 정치사회경제역사적인 구조적인 요인에 근거합니다.
일본이 EU국가들 처럼 주변국과 연합해서 교류를 활발히 하지 못하는건 사실이죠.
그렇다고 영어권 국가라서 영어방송을 보는 나라도 아니구요^^
그러니 선진국들 보급률도 높고 한국도 스마트폰 보급률이 80%대에 이르렀을때 조차
일본 사람들은 피쳐폰 쓰면서 그게 자랑인양 방송을 하고 있었겠죠..
얼마나 세계와 교류가 없었으면 국민들이ㅣ 피쳐폰 쓰는게 최신 유행인양
방송에 나와 당당히 말했을까요.. ㅋㅋ
주변국가와 외교적으로 우호적이냐와 대외문물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교류가 활발하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일본이 한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절에 해외여행을 안갔던 것도 아니고... 그당시만해도 한국의 문화수입은 일본을 거친 경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그럼 그런 일본은 어떻게 해외문물을 그렇게 우리보다 더 잘 받아들였을까요? ^^
왜 아직도 피쳐폰을 쓰는지 왜 유럽에선 아직까지 중세시대 건축물이 대도시에도 그렇게 많은지는 능력의 부재나 교류의 부재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유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적인 필요일수도 있고 문화적인 부분일수도 있고. 혹 경쟁력있는 스마트폰을 생산할 산업적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수입해서 쓰면 그만입니다. 심지어 북한에서도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일본인들이 능력이 부족해서 안 쓴다고 보는건 이해가 가지 않으니까요. 그건 문화적인 요인에 기인한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중에서 빨리 받아들이고 근대화에 성공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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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이 한 질문중에 이게 가장 편협한 시각인것 같아 답변을 안남길수가 없네요
일본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개항 하라고 반협박으로 강제 개항 시켰습니다.^^
즉, 문물의 전달이 육지에서 섬나라 순서로 퍼져나가던게
반대로 서양이 산업화 이후 동양을 역전하여 대항해시대 이후
동양 육지 -> 바다 섬의 정석적이던 순서가 아니라
서양 육지 -> 동양 섬나라 -> 중국, 한국 순으로 반대로 퍼져나가면서 일어난
문화, 문물 전파 역전 현상으로 인해 ..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일본 막부는
미국의 무력시위에 쫄아서 치욕스러운 항복으로 인해 운좋게 먼저 개화되게 된거죠
참고로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던 샷초동맹의 사쓰마나 조슈는 처음엔 해외문물을 받아들이는데는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존왕양이론을 내세우면서 막부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서양세력과 싸우면서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으로 완전히 돌변했죠.
댁이 말하는건 기껏해야 막부측의 관점이기 때문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맞는 견해는 아닙니다. 흑선사건이 일본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건 맞지만 일본 근대화를 정말로 이끈 세력은 처음에 개방을 승인한 막부측이 아니라 개방을 반대한 도막파들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흑선사건은 근대 일본내의 정치지형을 바꾸게되는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지 그 자체가 일본 근대화의 상징은 아닙니다.
어쨌든 개방을 막부가 승인하지 않았다면 개항과 개화, 개혁도 늦을수 밖에 없었겠죠
미국 페리제독의 무력시위로 인한 강제 개항
당시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서양에게 패배했던 시기이기에 쫄아서 개항한건 맞죠..
즉, 시기상 운빨이 기가막히게 강제 협박 개항했다가 맞습니다.
원래 막부는 쇄국 정책이였으니깐
막부는 어쩔수 없이 연 것입니다. 아편전쟁꼴 당할까봐. 근데 이게 막부가 일본천황의 승인을 받지않고 자의적으로 조약을 맺은게 문제가 됩니다. 거기에 반대해서 조슈번이 반발한것이고 이후 여러 복잡한 일련의 전개를 거쳐 보신전쟁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 중간에 서양해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특히 조슈는 쇄국적 시각에서 적극적 개방으로 변모합니다. 그리고 이게 보신전쟁에서 막부군에게 승리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죠. 서양의 신식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래서 실제로는 흑선사건은 단초를 제공한것이지 엄밀히 말하면 그 사건이 일본개방을 이끈것은 아닙니다. 만약 막부가 승리해서 계속해서 정권을 잡았던 우리가 봐왔던 근대화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왜? 막부는 개방에 적극적인게 아니라 끌려간것이기 때문에. 이에 반해 처음에 쇄국적 시각이었던 도막파들은 막부와의 전쟁이나 서양세력과의 전투를 통해 직접적으로 현실적인 필요와 그 위력을 경험하면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니까요. 어쩔수 없이가 아니라 그들이 서양매니아가 된것입니다.
일본은 나가사키를 통해 수백년동안 조금씩 문화,학문적으로는 교류를 하고 무역도 하였습니다. 흑선사건 이전까지 문호를 개방하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입니다. 근대이전에는 키리스탄 문제처럼 기독교의 침투를 막는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사실 문호를 나가사키로 한정한것도 기독교문제였습니다. 당연히 기독교가 일본내에 널리 퍼지면 사회혼란과 기득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또한 근대들어선 당연히 일본도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서양세력을 견제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메이지유신 이전 청나라의 아편전쟁을 통해 조선도 알고 있었던 사실을 그들이 몰랐을리는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중에는 창구가 일부지역으로 한정되었지만 그곳을 통해 수백년간의 교류로 서양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처럼 생판모르는것도 아니었고 중국처럼 자신들이 세계최고라는 자만심도 없었죠. 그래서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쉽게말하면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 얻을것은 다 얻고 있었다는 점과 또한 교묘하게 서양세력과 조선이 교류하는것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경우 서양세력과 교역이 활발해진 이유에는 고유한 원자재 수출품도 있었지만 명청교체기 이후 중국이 도자기 교역에서 쇠퇴할쯤 그 자리를 메꾸면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묘하게 조선과의 교역을 막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우수한 무기들이 조선으로 흘러가면 안되기도 하지만 자신들만으로 무역대상이 한정되면 독점적인 무역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물론 조선은 경제력이 형편없었고 화이론적 세계관도 중국을 제외한 외부세계와의 교역을 막았습니다. 중국입장에서도 서양세력이 자신들을 거치지 않고 조선과 교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세력과 교류하는걸 권장해주지도 않았죠.
이미 조선중기를 거치면서 일본은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조선을 능가하기 시작합니다. 조선은 상공업을 등한시했지만 일본은 상공업을 중시여겼죠.
보통 상공업이 발달하는 경우는 그나라가 특별히 농업생산으로 먹고살기 힘든 척박한곳이거나 아니면 부국강병이 중요한 주변환경을 가졌을때입니다. 일본은 오랜동안 봉건국가였고 주변국가에 비해 우수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만큼 상공업을 중시여길 수밖에 없었죠. 근대유럽이 중국이나 기타 다른 아시아국가들을 능가하는 상공업을 키울수 있었던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계속해서 전쟁을 하는 환경이었고 계속해서 국가간의 경쟁이 치열했죠.
전 개인적으로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에 시달린 지역이었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중앙아시아나 중동, 유럽에 비해선 널널한 지역이었습니다. 단지 중국같은 거대국가옆에 치이거나 가끔가다 등장하는 거대유목제국에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시달린것처럼 느끼는거죠.
일본은 대외적으로는 외부침략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이었지만 그대신 내부적으로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사회인지라 경쟁적 구조가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유교가 그들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한거죠. 중국에서 유교가 분열시기에는 관심을 못받은것처럼
북한을 제외하고 한국이 이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하는데에도 주변환경의 영향도 크다고 볼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널널한 지정학적 위치가 지금은 전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위치가 되면서 치열한 경쟁사회로의 동기부여를 해주고 있기 때문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많이 배우지 않으면 열심히 살지 않으면 잡아먹히기 쉬운 환경에 놓였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