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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6-19 23:59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
 글쓴이 : 화생야
조회 : 949  


영문 위키 사이트를
일본인들이 주도해서 작성한 듯.

대마도주가 항복해서 복속을 청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여,
세종이 정벌을 중지하고 통상의 권한을 부여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


여기에서

대마도주가 항복하고 복속을 청한 이야기와
이에 조선이 정벌을 중지하고 통상을 허가해 준 이야기는 쏙 빠트리고,

단지
조선이 군사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에따라 통상의 권한을 받아서
그 이후로 노략질이 잠잠해졌다...

라고 서술하고 있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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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이 21-06-20 00:06
   
쪼옥바리는 조작이 일상이라
촐라롱콘 21-06-20 00:34
   
군사적 측면에서만 보면 그리 성공적인 원정이 아닌 건 사실이지요....!!!

당시 대마도 전체 인구수와도 맞먹을 정도의 경상, 전라, 충청 삼남지방에서 동원한
1만 7천 규모의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고도....

게다가 당시 대마도 성인장정의 상당수는 수 십척의 선박에 분승하여 조선-명나라 북부 해안지역약탈을
목적으로 대규모로 섬을 비운 상황을 틈타 이루어진 빈집털이에 가까운 원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상륙작전에서나 다소의 전과를 올렸을 따름이고
내륙소탕작전에서는 오히려 수 백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고
(조선측 기록에는 조선군 180여 명 전사, 일본측 기록에는 조선군 2천명 전사
조선은 전사자 숫자를 축소, 일본은 과장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결국 현장에서는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이후 대마도주가 조선의 재침을 우려하여 스스로 머리숙이고 조선에 굴복하기는 했지만....
화생야 21-06-20 00:57
   
그렇군요.

다음과 같은 견해도 있네요.


명나라의 일본 정벌 차단

2009년 3월 19일 한국역사연구회 학술 발표회에서 ‘조선 초기 대마도 정벌의 원인과 목적’을 발표하는 이규철 가톨릭대 강사는 기해동정이 왜구 소탕보다는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저지하기 위한 외교 전략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우선 기해동정 이전 10년간 왜구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꼽는다. 고려말부터 태종 초기까지 기승을 부렸던 왜구의 침입은 태종 9년(1409)부터 크게 감소했다. 10년 만의 왜구 피해에, 그것도 대마도가 조선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노력하던 상황에서 조선이 대규모 출병을 감행한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출정 명령 4일 만에 65일분의 군량과 1만 7000여명의 병력을 준비한 대목도 이전부터 대마도 정벌을 치밀하게 계획했음을 시사한다.

조선의 피해가 뜸했던 때, 왜구의 주요 활동 무대는 명나라 연안지역이었다. 명나라는 일본 쇼군을 통해 왜구를 제어하는 방식을 취했지만 원도의에 이어 등극한 원의지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자 일본 정벌을 계획한다. 조선은 명나라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명나라가 일본 정벌에 나서면 명나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해온 태종으로선 이에 개입하지 않을 명분이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전쟁을 막기 위해 결국 조선은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막으려면 명의 왜구 피해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 대마도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대마도 원정군이 대규모 부대 편성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전면전을 회피한 것도 정벌의 목적이 왜구의 격멸이 아니라 조선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공격이란 추측을 뒷받침한다. 조선은 정벌을 단행하면서도 일본과 대마도와의 관계를 극단적인 상태로까지 몰고 갈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이 강사는 조선이 대마도를 정벌해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대외 목표인 북방지역, 특히 여진으로의 진출과 영향력 확대라는 일거양득을 취했다고 파악한다. 왜구를 제어한 공로로 여진 지역의 실력행사에 대한 명나라의 암묵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3]
국산아몬드 21-06-20 01:03
   
구글 번역기 돌려서 이렇게 추가했음
after the expedition, the situation came to an end when Tsushima  requested surrender.  Sō Sadamori of Tsushima also swore to serve as an example of a subject, requested subjugation as a part of Gyeongsang-do, and promised to rule the Japanese and pay tribute. After King Sejong allowed this, when Sampo was opened, the relationship was transformed into a peaceful relationship by granting the normal authority to  Sō Sadamori of Tsushima
     
화생야 21-06-20 01:32
   
와우 느무 멋지심!

제 영작이 좋지 못해서 별로 자신은 없지만

첫 after의 A를 대문자로 하고,
Sampo가 포함된 문장만 좀 더 다듬으면 좋을 듯 함요.
한 예로 ...

> 'King Sejong the Great admitted the surrender, allowed to open up three ports [참조:삼포개항], and concluded the Treaty of Gyehae while granting the normal authority to Sō Sadamori of Tsushima.'

삼포>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D%8F%AC
삼포개항>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D%8F%AC_%EA%B0%9C%ED%95%AD


멋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