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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3-26 16:21
삼국시대 최악의 역적은 누굴까? (재업)
 글쓴이 : 난민이라해
조회 : 867  

예식진 : 의자왕은 전략적으로 수도 평지성인 사비성을 버리고 
천혜의 요새인 공주(웅진성)에서 결사항전을 계획했으나.. 믿었던..
웅진성의 성주 예식진이 반역하여 의자왕을 포로로.. 당나라에 바치고 당나라 정3품 관직까지 올랐다.
간신 하나 때문에 삼국시대의 균형이 무너지고 결국 고구려가 멸망하는 나비효과의 시작점이 됐다.

이후 백제 장수.. 흑치상지가 당나라에 저항해서 꽤 오랜기간동안 항전 했던것을 보면..

백제 의자왕이 간신 예식진의 배신으로 단 2일~3일만에 허무하게 포로로 잡히지만 않았다면.. 
결사항전을 이어나갔을 가능성이 있고 고구려와 화친을 주장했던 의자왕과 고구려의 연합 결성으로 
고구려군의 지원이 왔다면 나당연합군과 고-백 연합군 결성으로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수도 있습니다.

삼천궁녀는 어디까지나 승자의 역사로 인해 생겨난 헛소문이였고.. 
실제로는 의자왕은 신라 대야성을 점령하고.. 김춘추의 딸과 사위까지 죽여버렸던.. 그외의
신라의 영토까지도 빼앗았던 나름 뛰어난 정복군주였습니다.

우리 역사를 찾아봐도 장수가 싸워보기도 전에.. 왕을 이민족 적군에게 
포로로 가져다가 받쳐 성공한 사례는 찾기 힘드니 가히.. 최악의 역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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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23-03-26 17:16
   
[란체스터의 제2법칙]이 전쟁 뿐만 아니라 살다보니
특히 세상사 전반에 걸쳐 대체로 들어맞는다는 걸 피부로 느끼게 되더군요.

전쟁 또는 경쟁기업,집단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하는데 있어
교전 또는 경쟁 상대방과 비교해서 별 차이없는 인력, 물자, 자본을 찔끔찔끔
투입하면 한없이 시일이 소요되거나 승리해도 상처뿐인 영광이 되기가 일반적인데

상대방이 주눅이 들 정도의 압도적인 병력과 자본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면
결과적으로 오히려 희생과 출혈도 훨씬 줄이면서 시간도 훨씬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들어 10명의 적을 대적하는데 10명 남짓을 투입하면 천신만고끝에 이긴다 하더라도
아군측 또한 심각한 내상을 입기 마련인데
처음부터 수 십명의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면 상대방을 전멸시킨다 해도
우리 편은 오히려 5명 이내의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좋은 역사적 사례가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입니다.
나당연합군이 만약에 수 만명 정도의 어정쩡한 병력 규모로 공격했으면, 백제인들 또한 저 정도는
해볼만 하다고 여겨 결사항전으로 맞서 나당연합군 또한 심각한 피해를 입었겠지만.....

무려 18만명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붙이니 몇 번 싸우다말고 승산이 없다고 여겨
오히려 공주의 지방 세력이 의자왕 일행을 넘겨주고 스스로 항복했고
이는 본격적인 백제공세 시작 시점인 백강하구-기벌포 상륙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불과 열흘이 채 안 지나서 백제정벌전이 순식간에 쫑나고 말았습니다.
     
난민이라해 23-03-26 17:27
   
당시 백제 상황을 보면 더 이해가 되는면도 있죠..
의자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흥 세력들과 손을 잡고..
과거 호족들을 견제 했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수많은 나당연합군이 백제 본토에 도착하니..

백제의 기존 세력들은 의자왕을 도와줄 의리나 명분이 떨어졌을 것이고..
그와중에 믿고 키워났던 신흥세력인 예씨집안의 예식진은 배신까지 해버립니다.
신흥 세력이니 아마 왕을 모시고자 하는 의리나.. 의지도 더 적었을거라 추정되고요..
          
촐라롱콘 23-03-26 17:39
   
의자왕이 키워준 신흥세력이라는 것이 수 십명의 왕자들을 비롯하여
주로 자기 주변 친족 세력들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40명에 이르는 왕자들을 중앙 각 부의 수장인 좌평과 지방장관인 담로에 임명하면서
기존 중앙귀족과 지방호족의 파이까지 심각하게 침해하고 말았으니.....
               
난민이라해 23-03-26 18:22
   
당시 의자왕의 왕권강화는 나쁜처사가 아니였으나.. 시기상 나빴다고 할수밖에 없겠네요..
운이 나빴다고 밖에는..
Augustus 23-03-26 19:42
   
다 떠나서 백제의 종심이 너무 짧아요 ㅠㅠ 고구려는 기다란 요동 방어선과 긴 종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백제는 일단 국토 면적이 훨씬 작고 좁아서 무슨 방어선이랄 것도 없었고 고구려처럼 전략적으로 크게 후퇴해서

당군을 좀먹을 방법도 없었구요.백제군은 결국 당군이 백강에 상륙하는 거 저지 실패하고 당군이 산 위에 진을 치자 백제군이 공격했는데 거기서 백제군이 개털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군은 사비성으로 미친 속도로 진격해서 신라군과 만나고 아마 여기서 의자왕은 나라가 망했음을 짐작했을 겁니다. 여기서 항전은커녕 여러 차례 좌평 등의 사람을 보내 제발 포위를 풀고 살려 달라고 싹싹 빌거든요.

그런데 소정방이 모조리 거절하자 결국 다 포기하고 웅진성으로 도망간 건데 아시겠지만 도망간 곳이 고작 웅진성입니다. 여기서 예식진이 배신을 안 했어도 의지왕은 조금 더 버티다가 결국 잡혔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사비성에서도 아들 부여태가 못 버티고 항복해 버렸고 660년에 백제는 의자왕을 포함한 부여융, 부여효, 부여태, 등등의 아들들과 대좌평 및 신하 거의 모든 이가 싹 다 당나라로 끌려가고 이후에 부여풍 등이 남아

부흥운동을 이끌지만 663년엔 왜국에서 지원군을 대규모로 보내 백강 전투가 벌어졌는데 여기서도 백제-왜 연합군은 나당 연합군에 의해 탈탈 털려 전멸합니다. 660년에 의자왕이 끌려간 것을 백제 멸망으로 보지 않더라도 663년에 확실히 망했죠.

나당 연합군의 군세는 백제 혼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고 봅니다. 왜국에서 국정도 미루고 대규모 군대를 보냈음에도 털렸으니 백제가 뭘 할 방법이 없죠. 고구려와 연락해서 연합을 하기에도 그 사이에서 당군이 버티고 있어 접촉할 수가 없었구요.

우크라이나가 아무리 결사항전을 하며 죽기살기로 싸워도 만약 국토 면적이 작아 종심이 너무 짧았으면 진작에 러시아에 패배했을 겁니다. 땅 크기와 인구의 중요성...
     
난민이라해 23-03-26 21:15
   
백제의 종심이 짧아 양쪽에서 연합군에 포위당해 쌈싸먹혀 공격 당할시에는..
충격을 완화해줄 영토 구간이 짧았다는건 큰 단점이긴 합니다.

당나라가 회유까지 하여 흑치상지를 당나라의 장군으로 삼았던것을 보면..
흑치상지의 능력이 꽤 비상했음을 알수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나중에는 회유당한 흑치상지가 앞장서서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는 1등 선봉장이 되죠..

그렇기 때문에 더 백제의 지형을 누구보다 잘활용했던 흑치상지가 적으로 돌아선 덕분에..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쯤 가면 더 처절하게 패배하게 된 측면도 존재합니다.

백제만의 힘으로는 나당연합군을 막지 못했다는데는 동의합니다..
여기서 고구려가 연합으로 백제를 도와줄수 있느냐 없느냐? 에 따라서.. 역사는 달라졌을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고구려군도 백제와 접촉하기 힘든 상태라..  외교 협상이 힘든 상태였던점도 있어서..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됐을거라 섣불리 판단은 못하겠지만
웅진성은 험준한 산악지형 위에 축조된 성이라 평지의 사비성보다는 훨씬 오랜 기간 버틸수 있었을겁니다.

그 버티는 기간동안 고구려와 접촉해 연합 전선을 만들수 있느냐 없느냐 정도로..
미래가 달라졌을 겁니다..
꼭 만나서 연합해서 합치지는 못하더라도.. 고구려가 허를찔러
 신라의 영토를 공격해서 빠르게 진격해 들어온후 우측으로 우회해 들어와서 지원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험준한 지형인 웅진성을 이용해 의자왕이 살아남아서 결사항전했다면.. 그래도
고구려와 연합 가능성은 희미하지만 그래도 남아있었다.. 정도로 넘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