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적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기 경보 시스템도 없고, 레이다도 없어서, 적의 함대가 오는 것을 첩보가 있지 않는 한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시대에 (다른 나라 전쟁이든, 일본 내전이든간에) 상륙하기 전의 부대를 해상에서 막은 경우는 없습니다. 일단 상륙은 허용하고, 그 상륙한 병사와 싸워서 밀어내는 게 일반적 전쟁 양상이었습니다.
2.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 함대에 대해 맞서 싸워야 할 부대는, 육지에서는 (경상좌병사)이각과 (경상우병사)조대곤이 지휘하는 부대였고, 바다에서는 원균(경상우수사)과 박홍(경상좌수사)이 지휘하는 부대였습니다. 병력이 많이 열세인 상황이었고, 기습도 당한 상황이란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아무튼 초전에 제대로 싸운 부대는 없었을 뿐아니라 지연전이나 게릴라전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지휘관이 달아나고 부하들은 흩어졌습니다.
3. 이순신 장군은 개전 당시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관할구역이 부산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부대 규모도 경상우수영의 절반밖에 안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소식을 듣고, 아무런 지휘명령이 없는 상태에서 고민하다가, 지휘명령이 없는 상태에서 출동을 결심하게 됩니다. 자기가 방어할 구역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내린 결단이 이순신 장군 승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도 자기 담당구역이 아니면, 출동하지 않고 미루어 문제된 적이 있습니다.
4. 이순신 장군이라고 해서, 신묘한 방법을 써서 아무리 많은 적도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전라좌수영 함대의 특징은, 절대 왜군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고, 반대로 이순신 장군의 부대는 기습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리고 왜군에게 포위당한 적도 없습니다. 또한 가능한한 장거리 전투를 선호했기에 아군 부대의 희생이 적고 연속해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 그만큼 이순신 장군의 부대장악력이 뛰어났고, 척후를 철저히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 이순신 장군도 기습승리한 사례가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많은 왜군과 접근전을 한 상황도 있습니다. 부산포 해전이 그러하고, 마지막 노량해전도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이런 경우는, 왜군보다는 적지만, 아군의 피해도 컸습니다. 부산포 해전에서는 선봉장 정운 장군이 죽었고, 노량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 여러 장수들이 사망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부대 자체가 무적이라고 생각하면 완벽한 오해입니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많은 왜군을 자기 의도대로 이끌어 유리한 입지에서 싸웠을 뿐입니다. 그게 바로 당시 명장의 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