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옥천군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김용제는 어릴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국민학교 때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몇 년 뒤에 아버지마저 농약을 마시고 XX했다. 그것도 김용제의 눈앞에서 XX했다고 전해졌다. 이후 시각장애와 소극적인 성격으로 집단따돌림을 당했는데 결국 국민학교만 졸업했다.
그리고 칼을 지니고 다니다 '강도 예비 음모'로 체포되어 교도소에서 3개월간 복역한 적도 있다. 시각장애로 인해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지 못해 서울과 부산에서 중국집 배달원, 멍텅구리배 선원, 나이트클럽 웨이터 등을 전전했으며 급여 또한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다니던 화곡동의 양말공장에서 해고된 뒤 범행을 저지를 마음을 먹었다.
김용제는 양말 공장을 다니던 시절 사장의 기아 프라이드 5도어의 열쇠를 복사해서 가지고 다녔고 그 차를 몰아 복수할 생각을 했다. 결국 1991년10월 19일 차를 몰고 여의도KBS 본사 우측의 광장에 진입해 질주를 벌였다. 당시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지현일 군(12)과 유치원생 윤신재 군(6)이 먼저 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뒤에도 계속 질주하여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21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200m를 더 달리다 자전거 보관함을 들이받은 뒤 멈추었다. 이후 시민들에게 붙잡혔을 때 이를 뿌리치고 여중생 김병춘 양(13, 당시 신도림중학교 1학년)을 인질로 잡고 인질극을 벌였으나 곧 시민들에게 제압당했다.
사건 이후 그에게 치여 즉사한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윤신재 군의 할머니인 서윤범은 이런 사정을 듣고 되려 범인을 이해한다며 탄원서를 쓰기도 했다. 1993년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에 따르면 서 씨의 사연을 듣고 김수환 추기경이 사면을 요청했지만 사형이 집행되었다. 서 씨는 사형 집행 당일에도 찾아왔다고 한다. 그가 처형되기 전에 가톨릭에 귀의하여서인지 이 자리에 온 신부가 회고록에 당시 상황에 대해 서술했는데 그는 할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사죄했다고 한다.
<표창원의 사건추적>에 따르면 정작 해당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생존자나 유족들에겐 보상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이미 1988년부터 '범죄 피해자 구조법'이 시행 중이었으나 법 내용이 미비하고 이 법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범행에 쓰인 프라이드가 가입된 종합보험은 도난 뒤 발생된 피해에 대해 보상해 주는 제도가 없었고 대신 '책임 보험'에 따라 사망자는 최고 5백만 원, 부상자는 3백만 원까지 보상이 가능했다.
피의자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고 주장했지만 돈이 있다고 해서 이런 묻지마 범죄가 용서받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김용제가 해친 사람들은 무고한 어린이, 노인, 여중생 등 사회적 약자들 뿐이었다. 따라서 추한 자기변호에 불과하며 명백한 악질 살인마라 사형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사건을 저지른 후 김용제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죽인 사람에게 "미안한 생각 없다"며 딱 잘라 말했고 죽은 아이들에 대해서도 "그건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거니까 할 수 없다"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죽으려고 했으니까, 어른이고 애들 다 떠나서 그냥 무조건 밀어붙이자."는 말을 남긴 것을 보아 마치 희생자를 분풀이 대상으로 여겼던 그는 상기한 대로 그저 흉악한 인면수심의 살인마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