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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2-25 20:15
日, 일본인의 육식 역사
 글쓴이 : 지하
조회 : 1,221  

육식에 대한 시대별 구분

 
나라 시대
일본서기 675년 , 천무 일왕은 불교의 입장에서 소구(함정)나 기창(튀어나오는 창)을사용한 사냥을 금지했다. 
또, 농경기간이기도 한 4월부터 9월 사이, 소, 말, 개, 원숭이, 닭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전보다 일반적인 습관으로 먹었던 사슴과 멧돼지는 수육이라도 금지되지 않았다
한편, 서민에게는 불교가 아직 침투하지 않았고, 금령의 의미도 이해되지 않고 육식은 계속되었다.
나라시대의 육식금지령에는 가축을 주로 먹던 도래계 관리나 귀족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헤이안 시대
1. 헤이안 시대 에도 귀족들 사이에서 식육의 금기는 이어졌다
2. 914년 (연희 14년)에 나온 한학자 미요시 세이유키 의 ' 의견 12개조' 에는 악마가 고기와 간을 먹는 것을 
평가하여, 고기의 금기가 있었다
3. 헤이안 시대에는 음양도가 활발해지기도 했고, 수육식의 금기는 강해져, 대신 새나 어육(생선)이 먹게 되었다 
이것이 어육의 가격 상승의 원인이 되었다
4. 연희식에는 수육의 기재가 거의 없지만, 한편으로 토끼 등 수육의 간장 절임이나, 수육의 소금 절임을 발효시킨 
조미료 에 관한 기재가 나타난다

가마쿠라 시대
1. 백련초(일본 역사서)의 1236 년에는 무사가 사원에서 사슴 고기를 먹고 귀족을 화나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2. 1227년 초에는 토끼나 멧돼지를 먹었다는 소문이 실려 있다
3. 선종 의 영향으로 동물성 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정진요리 도 발달했다

남북조 시대
1. 척소왕래 라는 서적에는 사무라이가 멧돼지, 사슴, 갈매기, 곰, 토끼, 너구리, 수달 등을 먹고 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2. 너구리 를 찐 구운 후 냄비로 끓이는 ‘무지한 국물’의 레시피가 기록되어 있다 오소리도 나온다
3. 『명월기』의 1227년 초에는 귀족이 토끼나 멧돼지를 먹었다는 소문이 실려 있다.
유제품은 이후 메이지까지 거의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전국 시대 
1. 전국시대가 되면 남만 무역 등을 통한 식품 수입이 본격화됐다.
2. 쟌 클라세  ( Jean Crasset )  의 『일본 서교사』에는 “일본인은 우유도 마시지 않는다.
사냥으로 얻은 야수 고기를 먹지만 식용 가축은 없다”고 쓰여 있다
3.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의 ' 일유럽 문화 비교 '에는 “일본인은 소를 먹지 않고, 
가정약으로서 훌륭하게 개를 먹는다”라고 쓰여 있다.
4. 의학서 ' 일용 식성 ' 속에서 짐승 고기를 볶음, 조림, 건고기로 먹으면 다양한 질병을 치료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 
다만 당시의 의학서에는 중국 문헌의 인사도 많고, 일본에서는 입수할 수 없는 식재료 등도 쓰여져 있어,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5. 교토 등에서 수육이 일반적으로 먹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고, 
예를 들어 히데요시가 일왕을 온락제로 초대했을 때의 식단 에도 들어 가지 않았다. 
특히 소나 말의 고기를 먹는 것은 당연한 금기였다

에도시대
1. 에도시대에는 수육식의 금기가 지켜졌다.특히 상류층은 이 금기를 지켰다.
예를 들면 너구리국은 전국시대에는 너구리를 사용했지만 에도시대에는 곤약, 우엉, 무나 두부를 조리한 
사찰음식으로 바뀌고 있다.
2. 1643년 (간에이 20년)의 간행으로 여겨지는 ' 요리 이야기 '에는 사슴, 너구리, 멧돼지, 토끼, , 
곰, 개를 든 국물 요리와 조개 구이, 계란 요리 등이 소개되고 있다. 
3. 1669년 (간문 9년)에 간행된 요리서 ' 요리 식도기 '에도 수육 요리가 등장한다
4. 1718년 (우호 3년)에는 수육요리 전문점 ‘도요타야’가 에도 양국에서 개업하고 있다.
5. 수육식의 금기의 피크는, 생류 자비의령(생명을 가진 짐승을 함부로 살생하지 말라는 법령) 등이 
베풀어진 17세기 후반의 겐로쿠 시대 이다
6. 당시의 일본에는 통상의 식품으로서는 기피되는 것을 약으로 복용하는 습관이 있어 우유도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

18세기 
반대 의견
1. 18세기에는 왜? 수육식이 안되는지, 수육식의 역사는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연구도 행해졌다. 
유자 쿠마자 와 소야마는 1709년 (다카나가 6년)에 간행된 저서 『집의외서』 중에서 쇠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신을 섬기기 때문이 아니라 농경에 지장이 생기니까 , 사슴이 안 되는 것은 이것을 허락하면 소에 이르기 때문이다, 
라고의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찬성 의견
1.  후지이 케이사이 는 유학의 입장으로부터, 1715년 (정덕 5년)에 간행된 「와한 태평 광기」 중국, 공자에게 식육을 
제공할 행사로 고기를 제공 하지 않는 것은 유례 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2.  가가와 슈안은 1731 년 (우호 16년), 저서 ' 한본당 약선 ' 속에서 일본서기와 속일본기 속에 육식이 
진행되고 있던 기록이 있다 언급했다
3.  19세기의 사라몬 시즈켄 의 저 「에도 번창기」에도, 다이묘 행렬이 고지마치 히라카와초에 있던 
모몬지야 ( 수육점)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싫어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멧돼지, 사슴, 여우, 
토끼, 수달, 늑대, 곰, 거북이 등이 제공되고 있었다
4. 1827년에 출판된 사토 노부 치의 '경제 요록'에 “돼지는 근래, 세상에 늘어나고 많다. 라고 적혀 있는 것처럼, 
돼지의 사육도 행해지고 있었다  . 사토는 이 저작으로 축산의 진흥과 식용 가축의 보급을 제언하고 있지만, 
우마에 관해서는 전혀 식용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5. 에도 시대에는 조선과의 외교 사절로서 조선 통신사가 파견 되지만, 에도 막부는 외교적 배려로부터 통신사에 대해서 
멧돼지 고기로 대접하지만, 에도성의 정찬에서는 의식적인 요리로 어패・새류를 제외하고 
수육이 사용되지 않는 본선 요리가 나왔다.

메이지 시대
1. 메이지 시대가(1871년) 되면 쇠고기를 먹는 것이 문명 개화 의 상징으로 여겨져 쇠고기를 사용한 스키야키가 유행했다.
2. 메이지 신정부는 발족 당초부터 육식 장려의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3. 메이지 초년에는 저항도 강했다. 피 빼기 기술이 불완전하고 끓이면 냄새가 났기 때문에 서민이 단순히 
경원한다는 것도 있었던 것 같다
4. 일왕이 먹고 잠시 후인 1872년 (메이지 5년) 2월 18일 , 신사의 수행자 10명이 황궁에 난입, 그 중 4명이 사살, 1명이 중상, 
5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 그리고 나중에 "외국인이 온 이래 일본인이 육식하고 섬기고 신이 있을 곳이 없어졌기 때문에 
외국인을 쫓아내기 위해 했던 것이다"아고 반대파가 등장했다
5.  1873년 (메이지 6년)의 ‘ 도쿄 일일 신문’에는 “돼지고기는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에 먹지 않도록”라는 
투서가 게재되었다.
6. 1877년 (메이지 10년)의 ' 아사노 신문 '에는 '양식을 배척하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7. 1884년 (메이지 17년) 해군성 의무국장의 다카기는 당시 큰 문제였던 각기병의 원인이 
단백질 부족에 있다고 생각해 각기병 대책 으로서 해군 의 식사를 서양식으로 바꾸는 것을 상신했다. 
그러나, 병원의 대부분이 빵 과 고기를 싫어해서 먹지 않았기 때문에, 
해군에서는 1885년 (메이지 18년)부터 지급되게 되었다

근대 
육식 도입
1. 쇠고기식은 퍼지지 않았지만, 원래 수육식에 대한 혐오감은 적고, 1873년(메이지 6년)에 간행된 
히다 지방의 『카이타후 풍토기』에는 사슴, 멧돼지 , 산양 , 곰 등이 먹혀 있었다는 뜻이 쓰여 있다. 
다만 그 총량은 조류를 합쳐도 어류의 1/6 정도였다
2. 1877년 (메이지 10년)까지는 미야나카의 정식 요리는 서양 요리가 되었다. 이 무렵에는 
도쿄의 쇠고기집은 558채로 되어 있다
3. 1910년 (메이지 43년) 제정의 육군 공식 레시피 집 “ 군대 요리법 ”(“메이지 43년 육보 3134호”)에는, 
고기를 메인으로 하는 양식 레시피로서 커틀릿(쇠고기·포크) , 쇠고기 스테이크 , 멘치 쇠고기, 
푸카덴 드라이드, 허시 쇠고기 , 롤 양배추 , 카레 라이스 , 스치우 , 미트 오믈렛 , 훈제 돼지고기,
쇠고기 샌드위치,고기 스프, 콘도 쇠고기 등이 게재되어 있다 .
또, 다이쇼 말에는 빵식도 조직적으로 도입되었다
4. 1904년 (메이지 37년)의 「가정 잡지」에는 미국에서 요리를 배운 적도 있는 오이시 세이노스케 가 
「일본식 절충 요리」로서 진한 눈의 된장국에 카레가루와 쇠고기를 넣은 「카레의 된장국」 등을 소개하고 있다
5. 1904년 (메이지 37년)부터 시작된 러일전쟁 때문에 전장 식량으로서 쇠고기의 야마토 조림 통조림이나 
건조 쇠고기가 고안되어 군대에서 쇠고기의 맛을 기억한 서민이 늘었다

다이쇼 시대( 1912년-1925년)
1.  돼지 커틀릿이 등장해, 다이쇼기의 3대 양식이 카레, 돈가스, 고로케(또는 오믈렛)라고까지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 까지나 튀김이 아닌 커틀릿이며, 
지금의 형태에 가까운 돈까스는 쇼와에 들어간 1931년(쇼와 6년)의 우에노의 “폰타” 혹은 
1932년(쇼와 7년)의 우에노의 “ 라쿠텐 ” 이 최초기의 것으로 하는 설도 있다. 

조선요리의 보급
조선요리의 보급은 중국 요리보다 다소 느리고, 1905 년 (메이지 38년)에 우에노에 한산루라는 가게를 열고 있지만, 
대부분의 손님은 조선인이며 이가 조선으로 귀국 까지 단기간의 것이었다. 
일제 감정기 후에는 일본에 오는 조선인이 증가해, 1938년 (쇼와 13년)의 도쿄시 에는 조선 요리점이
37채로 되어 있었다. 
거기서 나온 것은 전후의 불고기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한정식 등의 전통 조선 요리였다 .

내장 요리 보급
1906년(메이지 39년) 내장육도 전문업자를 통해 유통하게 되어, 도시부에서는 도축장 주변 이외에도 
저가격의 고기 요리로서 퍼지기 시작했지만, 내장식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현대
태평양 전쟁 이후에도 일본인의 동물성 단백질원은 어육(생선)이 중심이었다. 
식육도 1946년 (쇼와 21년)부터의 물가 통제령 의 대상이 되었지만, 
1949년 (쇼와 24년)에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고 재빨리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전후 식량 사정이 악화된 1946년 (쇼와 21년)부터 1947년 (쇼와 22년)경, 주대용식으로서 
미국 육군의 배급품 이었던 통조림의 런천 미트 가 배급되었다. 

(일본 주장임)



정리 : 일본의 육식은 메이지 이후나 근대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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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24-02-25 20:43
   
게다가 일본은 농업기술도 안좋고 기근이 하도 심한 편이어서 노인들을 산속에 버리는 건 양반이고 옆마을에 쳐들어가 살인을 하고 식인을 한 지역도 상당히 많습니다. 파푸아뉴기니는 양반이죠
중국처럼 사람고기는 오랫동안 꽤 먹었다는
다같은생수 24-02-25 23:32
   
'일본인의 식인 역사'라고 하신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