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 조선의 독립운동은 지지부진했나
윌코추천 5 조회 417 리플 21글번호 202406230094285044 | 2024-06-23 23:34 IP 202.136.*.191
대학시절 조선의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다 잔뜩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임시정부 광복군이래봐야 200명 정도... 했던 작전이래봐야 버마에서 특수작전...
김구선생이 너무 빨리 광복됐다, 국내 진공이라도 했으면...이라면 안타까와야했다지만
솔까, 200명으로 국내 진공해봐야 별 볼일 없었을 겁니다.
당시 한반도 안에서 얼마나 호응했을지도 의문이예요.
그게 됐다면 최소한 1945년 정도에는 임시정부에서 성명 발표해서 총봉기를 시도했겠죠.
했나요?
북한쪽 자료도 봤는데...거기서 가장 강조하는 건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
뭣보다 독립운동 조직 내 분파 싸움이 치열해서 일본 경찰에게 상대 조직의 조직도 갖다 바쳤다는 말은 충격이었습니다.
북한쪽 자료야 김일성 만이 제대로 독립운동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온갖 미화와 왜곡을 하고 있지만
일경 밀고 자체는 사실이었더군요.
웃긴건 북한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김일성의 국내 진공작전...그거 알고보면 경찰서 하나 습격하고 끝...
저만이 아니고 독립운동사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신 분들은 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셨을 거예요.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우리 선조들이 유난히 후져서?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들어보니 좀 생각이 달라져요.
한마디로, 제가 그 당시 독립운동가였더라도 별 수 없었겠구나 싶어요.
그래서, 그냥 아래는 그 원인에 대해 생각나는대로 써본 글입니다
1. 뭣보다 일본의 조선 합병이 치밀했다.
참 웃긴게 일본에 합병되는 그날까지 조선 정규군은 정식으로 일본 군대와 싸운적이 없어요.
선전포고도 없었습니다. 그냥 1910년 도장찍고 끝이었습니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 왕족들은 그날 이후 일본 천황가의 1.5등 왕족으로 광복의 그날까지 잘먹고 잘살았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황족 일부에서 왜 조선 왕족들에게 이렇게까지 퍼주냐며 볼멘 소리를 할 정도로요.
그런데, 이렇게 평화적인(?) 왕조 합병은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매우 안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2. 조선은 평화적으로 일본과 합병한건데?
네. 우리끼리야 그게 알고보면 총칼의 위협하에 어쩔 수 없었다...이러겠지만
이게 당시 다른 나라들이 보면 다 코웃음칠 이야기입니다.
아니, 제국주의 시대인데 총칼 위협 안받은 나라있어?
그런데 왜 하필 니네 나라 국왕만 선전포고 한번 없이 고분고분 도장 찍었어?
심지어 지금도 잘 쳐드시고 여기저기 여자들 건드리며 해피하게 사신다매?
3. 그러니 정통성을 주장할 독립 운동 조직이 없다.
지금 우리야 대한민국을 실제로 통치하고 있는 정부에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으니 문제가 없습니다만..
당시 국제정세에서 임시정부는 그냥 임의 단체입니다.
조선 바깥의 수많은 독립단체 중의 하나일 뿐이고 그냥 정부를 참칭하는 단체입니다.
정통성있는 정부라면 이전 정부와의 연속성이 있어야할 것이고
또 실효적으로 통치하고 있어야할 텐데 임시 정부는 그 둘다 없었죠.
4.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고종이 총들고 싸웠더라면...
이야기는 아주 달라집니다. 고종이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여 정규군을 이끌고 싸우다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 고종이 정부를 세우면 최소한 연속성 만큼은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도 유교적 관념이 강했던 유생들은 고종의 지시에 따라 걸핏하면 봉기했을 것이고
그러면 국내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도 되겠죠.
아무튼, 그런거 없었...
하다못해 고종이 싸우다 죽고 왕조가 아예 페지되었다면 일제의 강압성을 증명하게 될 것이고
정통성을 주장할 정권 자체가 싸우다 소멸했으니 새로 정부를 세웠다는 명분이라도 갖게 될 텐데
그런 것도 다 없...
안그래도 조선보다 일본과 더 손을 잡으려 했던 당시 국제 정세에서 명분조차 없었습니다.
5. 고종이 도장찍으면서 사상 자체가 진공 상태로...
다 아시겠지만 조선은 유교국가고 군왕이 없는 정부(공화제)는 상상도 못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군왕이 도장찍고 일제의 1.5등 왕족이 돼버렸어요.
그러니 당시 지배 계층이었던 양반들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일제가 마음에 안들긴 하지만, 국왕이 1.5등 왕족으로 있는 지금 체제에 도전한다?
이것도 유교 관념으로는 쉽지 않은 결단이예요.
결국 당시 양반들은 반쯤 자포자기하며 가문과 가족이나 보위하자...로 넘어갔을 겁니다.
그 이하 상인이나 노비들은...뭐 조선에서 좋았던 기억이 있어야 독립운동을 하든 말든할 것이고
지배계층인 양반들도 저러고 있는데 내가 뭐...이랬을 겁니다.
한마디로 고종이 도장찍었다는건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폐해를 갖고 온 겁니다.
지배계층에겐 사상적 공백을 갖고 왔고 대외적으론 독립운동 진영의 정통성을 훼손한거죠.
6. 이회영의 독립운동, 민영환의 자결
제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바로 이회영 집안입니다. 이회영은 뿌리깊은 양반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개화 사상을 접한 뒤에 노비들을 해방하고 누이를 재가시킵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기득권을 포기한거죠.
그리고 경술 국치를 당하자 바로 집안 재산 처분하고 가문을 이끌고 만주로 독립운동하러 떠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회영은 근왕주의를 바로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개화 사상을 접했으니 근왕주의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죠.
이게 말이 쉽지,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낼 경지입니다. 개화사상을 접하면 그 선진성에 매료된 나머지 그 발상지인 제국주의 국가에 투항하거나...아니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유리한 것만 받아들이거나 하는데 이회영은 그런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거죠.
지금에야 이회영 가문을 두루두루 칭송하지만 사실 당시 양반들 사회에서 이회영 집안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더군요. 유교 이념에 쪄들었던 당시 양반들을 생각하면 너무 욕만할 건 아닙니다.
여기서 경술국치 당시 민영환을 비롯한 당시 지배계층 다수의 자결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항의의 뜻으로, 또는 각성을 촉구하느라 그랬겠지만...어떤 점에선 그냥 살아서, 자신의 자원을 동원해 왜 싸울 생각을 안했나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민영환 등의 양반집안은 왕조가 없는 조선(즉 공화정)은 생각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당시도 어느 정도 국제 정세가 알려졌으니 공화정 등도 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겠지만 당시 조선에서 왕정 외에 다른 정치 체제를 구현하겠다는 정치 세력의 역사는 일천했으니까요.
아무튼, 여기까지는 조선 내에서 왜 독립운동이 미진했냐는 부분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고종의 이양(?)은 심하게 말해 조선 반도내에서 독립운동할 동력과 명분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겁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왕정 외 다른 정치 체제를 구현하려했던 정치 세력의 부재는 이후 해외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7. 분파가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 조선 독립운동은 민족계,사회주의계, 사회주의계에서도 친소파, 친중파, 일본 공산당파...등등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한마디로 왕정외 다른 정치체제는 고민해본 적 없는 나라에 살다 졸지에 나라를 잃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한마디로 독립 이후의 국가 체제가 어떠해야 하는지 이제 백가쟁명의 시대로 접어든 겁니다.
이게 과거 프랑스에서 왕당파, 지롱드파, 자코뱅파 등등이 치고박고 하다가 나름 정리됐던 역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뭐 공화파나 입헌 군주파가 조선 왕조 밑에서 나름 싸우면서 세력이 정립됐던 것도 아니고..
그냥 해외에서 처음부터 사상을 다시 만들어가야 했던 겁니다...더구나 해외라 실험할 대상도 없어요..그냥 남의 나라 사례보면서 사상을 만들었어야...
더구나 조선은 총 만들 기술은 없어도 사상 이념 논쟁만큼은 탑급 국가...거기서 보고 배운게 그거였으니...사상적으로 온갖 분파가 난립했던 건 전혀 무리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8. 거기에 국제 정세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한반도내에서 게릴라 전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결국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해야했고...그러려면 외국의 도움이 필수적인데...이게 또 복잡했습니다.
당시 사회주의 맹주인 소련부터 그랬어요. 홍범도도 그렇고 김일성도 그렇고 이른바 친소파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대 후반부터 더이상 일본과 전투를 치르지 않습니다. 이른바 세력보존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소련이 일본과 분쟁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그들의 관심은 유럽이었으니까.
우리는 자유시 참변에 대해 소련을 비난하기 쉬운데...당시 소련 입장을 생각하면 아주 이해못할 것도 아닙니다. 자기나라 영토에 외국의 독립군이 무장을 갖추고 있어요.
이거 어느 나라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물론 2차대전 당시 영국처럼 전쟁 수행을 위해 망명정부 군대를 받아들였던 사례가 있지만...일반적으로는 허용하지 않아요. 쉽게 말해 지금 우리나라에서 탈북민들이 북한 해방하겠다며 군대 조직했다고 해보세요. 이거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면 장제스가 광복군을 도와준건 뭐냐고 물으실 텐데, 딸랑 200명 있던 군대였으니 가능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 수천명 단위만 됐어도 중국군에 편입시키며 온갖 견제를 했을 거예요.
참고로 장제스는 임시정부 입장에서 고맙긴 한데, 일제를 쫓아낸 뒤 조선은 과거처럼 중국의 속국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입니다. 딱 그 정도에서 임시정부를 도와준 거죠.
그러면 중국 공산당에 붙어서 싸운 인물들은?
네. 그들은 중국 홍군의 일부로 일제와 싸웠습니다. 전 그 쪽의 역사도 우리 역사로 편입해야 한다고 믿습니다만...아마 중국은 그리 달가와하지 않을 걸요? 그들 입장에선 조선 독립운동이라기보다 반제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비판하는게 아닙니다. 그게 무 자르듯이 딱 자르기 힘들어요.
글이 길어졌네요.
결론 요약합니다.
1. 당시 시대 상황에서 우리 조상 만큼 독립운동하기도 쉽지 않았다.
2. 그런 상황을 만든 고종을 무슨 비운의 망국 군주니 뭐니 미화하는건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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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고종때문에 그런거 아닌가 짐작하고 있었는데 글쓴이가 아주 자세하고 알기쉽게 설명해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