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는 왜군이 한양을 함락했어도 부산-한양에 이르는 가느다란 라인을 확보했을 뿐, 양식을 거둘 수 있는 지역을 장악한 건 아니었어요. 그나마도 최고 곡창지대인 호남은 발도 못 붙였고요.
그리고 현지조달을 했다 해도 이걸 운송하는 게 문제입니다. 조선은 육상운송을 지양하고 세곡도 대부분 수운에 의존했는데, 그 수운로의 진입로가 다 서해에 있었습니다.
즉 왜군이 서해를 장악 못하면 수운을 장악 못하고, 그럼 왜군은 조달한 식량을 열악한 육상수송을 통해, 의병 등의 게릴라 저항을 뚫고 모아야 합니다. 반면 조선은 조정이 의주까지 도망갔어도 수운을 통해 호남 식량을 보급하는 데 문제가 없었고요.
실제로 행주대첩 때 권율 장군은 적군 점령지에서 싸웠는데도 한강을 통해 보급을 쉽게 받습니다.
정유재란 때는 왜군부터가 현지조달보다는 무차별 학살을 했고, 우리는 청야전술로 대응했기 때문에, 육상운송을 통한 현지조달이 더 힘들었습니다.
명량해전 직전에 고니시 군이 태안반도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되돌아온 것도, 임진년 침공의 경험으로 수운 없는 병참의 한계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조선이 임진년에 먹고살만 한지 여부와 왜군의 서해진출 저지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과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