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는 고려의 삼별초가 최후로 후퇴하여 국가를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리적 위치상 중국 남부와 동남아, 일본이나 우리나라까지 해상 무역의 중추였다고 봅니다.
이 오키나와에서 중국식 무술을 도입한 것이 '당수도'였고, 이것을 일본이 오키나와를 점령하면서 일본의 무술로 왜곡합니다.
참고로 일본의 무예는 '~류'로 민간에서 가문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이어지는 경향을 가집니다.
이는 우리나라와 중국과는 다른 무예 전승 방식입니다.
중국은 청조 이후로 사설로 무술을 배우거나 전파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20세기에 불산을 중심으로 무술이 다시 성행하면서 지금처럼 된 것이고,
우리나라는 국가에서 권법, 검법, 기사 등으로 크게 나누고 진형까지 갖추는 군사적 목적으로 국가에서 관리하며 전승됐습니다.
정조 때 발간된 무예도보통지에는 동북아의 무술을 집대성하여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무예를 체계화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이 일본의 강제적 국권 침탈로 전례들 모두를 무시하게 됐고, 광복을 하고 일본식 교육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의 국기인 '가라테'처럼 우리나라도 정신과 무도를 통한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무술이 필요하다고 보고 일본식 무도관에서 여러 실전 권법을 하던 무술도장들을 모아 집대성합니다.
그렇게 국기원과 태권도가 태어나게 됩니다. 문제는 무술 내용보다 그 형식이 일본형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죽하면 품새가 일본 가라테의 그것에서 온 것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형식은 왜색을 피할 수 없었던 것 같지만,
우리는 유교 국가였고, 그 유교 국가라는 의미는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현실 문제를 적용한다는 매우 고지식한 사고에서 일을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태권도가 국기로 만들어지면서 발차기보다도 중요하게 여긴 것이 화랑도이며 퇴계와 율곡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정신으로 무장한 사범들이 전세계에 뿌려지면서 도장 깨기로 가라데 도장을 태권도 도장으로 바꿧다는 것이며, 그 도장에서 화랑와 을지문덕, 이순신 장군을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권도는 겉보기의 발차기보다 '차렷', '하나, 둘, 셋'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