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 강지영 데뷔일은 7월24일로 한승연 생일날과 같아서 그날 생일과 데뷔를 함께 축하하죠.
마지막 니콜 인스타그램의 사진은 2011년 프랑스에 카라 시그니쳐 향수 제작하러 갔을때 사진이네요..
2011년은 일본에서 '카라현상'이라는 신조어가 생길정도로 카라 이름만 붙히면 날개 돋힌듯이 팔리던 시기였죠.
카라는 일본보다 먼저 동남아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2008년 '프리티걸'로 국내에선 같은 소속사 SS501에 밀려 음방 2위에 머물렸을때 활동한적도 없는 태국에서 먼저 1위를 차지합니다. 해외 첫 공연도 태국이었고 첫 해외 CF도 태국이었죠.
당시 DSP미디어는 사실 망한 회사였습니다. 캠코더 + 윈도우 무비메이커로 카라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도 했었죠.
DSP엔터는 연이은 신규사업, 방송제작 실패로 회사사정이 어려워졌고, 얼마전 작고하신 이호연 대표는 2008년 9월 자본금 5천만원짜리 자회사 DSP미디어로 분리되어 나옵니다. 2009년 3월 모회사(전 DSP엔터)가 자본잠식으로 상장폐지되면서 DSP미디어도 수십억원의 부채를 떠안고 자본금은 마이너스가 됩니다. 2010년 초 이호연 대표는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이후 경영일선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십니다.
이때가 카라가 루팡으로 컴백하기 직전이었죠. 2008년 이호연 대표가 방송제작에서 손을 떼고 DSP미디어로 다시 시작한 후 카라는 '락유'-'프리티걸'-'허니'-'워너''미스터'로 뜨기 시작했고 이호연 대표 마지막 손길이 닿은 '루팡'으로 정점을 찍게 됩니다. 하지만 이호연 대표가 모습을 감춘 이후 DSP미디어는 국내에서 이름값을 못하게 되죠.
2010년 8월 일본진출을 하지만 5개월만에 그리고 이호연 대표가 쓰러진지 1년만에 카라사태로 불리는 DSP와 카라의 분쟁이 시작됩니다. 이호연 대표가 건재하셨다면 그런 불미스러운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거라 생각됩니다. 이호연 대표의 걸그룹 사랑은 핑클 때부터 남다른 면이 있었거든요.
어쨌든 카라사태 이후 DSP는 직원도 늘어나고 정산시스템도 갖춰지고 소속 연예인 대우는 잘해주는거 같더군요.
2011년 카라사태가 마무리되면서 스윗튠은 카라에게 '스탭'을 무료로 주는데, 이곡은 '루팡'-'스탭'으로 이어지는 카라 콘서트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가 됩니다.
생각보다 글이 길어지네요. 나중에 더 적어야겠습니다.
2011년 TV도쿄에서 방영된 카라5명 주연 드라마 'URAKARA'(한국제목 '카라의 이중생활') 최종회 마지막 장면으로 마무리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카라는 노래 말고도 함께 한게 많군요. 5명 공동주연의 'URAKARA'도 있고.
5명이 각자 주인공으로 나선 단편드라마 '시크릿 러브'도 있고.
5명이 각자 주인공으로 분한 애니메이션 'KARA The Animation'도 있네요.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했던 카라의 첫 해외CF인 태국 광고로 끝을 내 봅니다.
음... 이대로 끝내기 아쉬워서 노래 하나만 더 올려봅니다. 일본곡 중에 귀여운 노래 하나 가져와봅니다.
안티가 많은 그룹이었죠.
노래 못하고, 라이브 못하는 그룹이라는 비아냥이 많았는데, 사실 뚜렷한 메인 보컬이 없이 멤버들 매력과 개성적인 목소리가 어울리는 특이한 팀이고, 라이브 못하는 그룹은 아니었죠.
그런데 기사 올라가면 안티댓글이 줄줄이 달렸고, 일본에서 성공하자 일본인들이 보는 유튜브 댓글에도 일본어 번역으로 노래 못한다고, 일본에서 돈벌려고 일본어로 노래하고 웃음파는 일본그룹이라고 비난하는 놈들도 많았죠. 마지막 해체때도 라디오스타 출연 후에 벌어진 안티댓글이 한몫했을 겁니다.
일본에서 최초로 한국어로 낸 베스트 음반이 탑권을 차지한 적도 있던것 같은데, 카라가 한국 가요사에 이룬 공은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