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처음 하이브가 ‘경영권 침탈’이란 키워드로 사태를 공론화했을 때, 민희진은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이만큼 전세를 뒤집은 걸 보면 그 기자회견의 파급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정말이지 모두가 홀려 버린 것만 같았다. 회견이 끝난 직후 인터넷은 민희진 이야기로 떠들썩했고, 공중파 기자들은 “파격”이란 격찬을 쏟아내기 바빴다. 민희진이 한 일은 정확히 여론 선동이었다(여기서 선동은 중립적인 어감으로 쓴 단어다). 그는 분쟁의 상대방인 방시혁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회견에 나왔고, 주어진 논점을 해명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논점을 새롭게 던졌다. 그렇게 판도를 확장하는 동시에 주도권을 가져갔다. 사람들은 솔직함과 충동적이란 키워드로 회견을 평가했지만, 사실은 주도면밀하게 준비되고 통제되었다는 인상이 든다.
이 작업이 유효했던 건 그가 사람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화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분쟁의 쟁점은 배임과 경영권의 향배, 주주 간 계약이지만 상법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고 딱딱한 주제다. 초반 여론은 자신을 밀어준 회사의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민희진을 욕하며 사태를 단순화해 소비했다. ‘돈과 조직의 위력’이라는 사회의 섭리에 흙탕물을 일으키지 말라는 규탄이었다는 점에서, 여론의 시점을 지배 계층에 의탁한 일종의 허위의식이었다.
이 상황에서 민희진은 민중적인 버전의 '서사'를 들고 나와 판도를 깼다. 회견장에서 미주알고주알 떠든 신변잡기 같은 얘기들은 뉴진스와의 모녀관계, 직장인의 애환, ‘개저씨’에게 수모 겪는 여성의 수난, 여론이 나쁜 타 레이블 아이돌을 끌어들인 콩쥐팥쥐 동화에 케이팝 산업의 부조리를 넘나들었다.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인 화제와 아이돌 팬덤이 전문가처럼 떠들 수 있는 떡밥을 던져 리젠의 뇌관에 불을 댕겼다. 민 씨는 여자/엄마/직장인/예술가를 자처하며 사람들이 몰입할 수 있는 약자/피해자의 포지션을 점유했고, 하이브는 정확히 그 정체성들의 대립 항에 있는 강자/가해자라고 고발당했다. 이 구도를 완성하는 강렬한 외마디가 "개저씨"였다.
이 과정은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모노드라마로 연행되었다. 울고 웃고 화내고 욕하고 부르짖는, 통상적 기자회견에서 상상조차 못 할 압도적인 감정의 홍수에 휩쓸려 저 화제들은 다중의 눈과 귀에 들이닥쳤다. 이건 사실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포맷의 퍼포먼스였다. 전형적인 ‘인터넷 방송’ 감성이다. 아프리카 BJ들의 방송이 저런 식으로 진행된다. 카메라 앞에서 울고 화내고 욕하고 소리 지르고 남을 디스한다. 그런 화끈한 정동의 엑기스가 ‘텐션’과 ‘도파민’으로 소비된다. 인터넷 포맷의 방송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는 그런 광경을 격식 있는 자리에서 목도하는 것이 굉장히 새로우면서도 익숙하고 그래서 신기한 경험이었을 것 같다. 반면 그 경험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에게는 그저 ‘파격’ 혹은 일탈로 보였을 것이다. 민희진은 동시대 사람들의 지배적 코드, 특히 젊은 인터넷 다중의 코드에 맞춤형으로 호소했다.
민희진이 한 일을 요약하자면, 분쟁의 서사 구도를 각색하고 선역과 악역을 재배치해 생생하게 스토리텔링한 것이다. 선과 악, 도덕주의로 구성된 단순하고 고전적인 권선징악의 서사를 제시하며 선역과 도덕성의 자리를 차지했다. 민희진이 기자회견에서부터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제기한 모든 토픽은 하이브를 공공의 ‘빌런’으로 재현하기 위한 것이고 ‘하이브의 죄악’을 심판해 달라고 여론에 호소하고 있다. 멀티 레이블의 다양성, 랜덤 포카 같은 상술에 대한 비판, 17일 제기된 앨범 밀어내기 이슈까지, 쌍방 분쟁에 직접 관계는 없지만 어찌됐건 도덕적으로 추궁할 수 있는 공적 주제들이 모두 그를 위해 소환된 것이다
민희진의 선동은 오늘날 득세하는 어떤 유형의 정치인들을 연상시킨다. 자신이 기층 집단, ‘보통 사람’들을 대변한다고 자임하며 엘리트를 향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건 전형적인 포퓰리스트의 논법이다. 사회적 갈등 구도에 올라탄 뒤 사람들의 분노를 조장하고 그를 해소할 수 있는 타깃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까지 끌고 와 갈등의 코드를 한 가닥 더 엮어 놓았는데, 그것이 일본인 출신 아이돌 미야와키 사쿠라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뉴진스의 몫을 빼앗아간 ‘타자’로 지목한 퍼포먼스였다. 일본인 여성 때문에 한국 여성들이 차별당했다고 호소한 것이다. 현재 유튜브와 커뮤니티 음지를 떠돌고 있는 르세라핌과 하이브에 관한 각종 ‘친일파’ 음모론은 이 반일코드로 인해 파생됐다.
정말로 위험한 건 이 과정이 책임 없는 주체들에 대한 징벌로 수행된다는 것이다. 민희진의 입에서 뉴진스와 아일릿, 르세라핌이 불려 나왔고, 그들은 민 씨와 방 씨의 "내 새끼"들로서 선역과 악역에 포함됐다. 아일릿의 뉴진스 카피, 뉴진스의 데뷔가 르세라핌보다 밀린 일화는 이 케이팝 ‘콩쥐팥쥐’ 동화의 중심 사건이며, 민희진이 그 서사를 성립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폭로한 비화다. 앙코르 논란과 코첼라 논란으로 형성된 르세라핌을 향한 적의에 다시금 불이 붙었고, 아일릿 역시 ‘가짜 뉴진스’라 불리며 봉두난발로 저잣거리에 끌려 나왔다.
여론은 권선징악에 몰입한 군중의 가학성과 응보심리에 의해 뒤집힌 면이 크다. 기자회견 이후 아일릿과 르세라핌에 관한 악플은 커뮤니티와 유튜브, 모든 SNS에서 폭증했다. 르세라핌과 아일릿은 회사와 계약을 하고 회사를 따라서 활동했을 뿐이다. 그들이 악역이 된 건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저 기자회견의 모노드라마를 연행하며 선역이 된 이들의 반대편에 있다는 이유다. 이들을 향한 악플을 보면 정말이지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룹 계정은 물론 멤버 개개인 인스타 계정까지 악플에 점령당한 상태고 노골적인 악플에 좋아요 만 개가 찍힌다. 여론은 저들과 함께 콜라보를 한 다른 연예인 계정에까지 몰려가 뉴진스를 들먹이고 빈정거리면서 ‘손절’을 종용하고 있다. 민희진은 끊임없이 저 두 그룹을 거론하고 있으며 현재 연예 커뮤니티와 SNS에서 민희진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두 그룹을 향한 적대적 여론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건 도덕적으로 굉장히 왜곡되고 위험한 여론 동원 방식이다.
'현실의 서사화'는 민중이 현실을 이해하고 몰입하는 손쉬운 수단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야기 형식의 플롯에 현실을 끼워 맞춰 인식을 왜곡하는 덫이기도 하다. 민희진 대 하이브의 선악 구도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관계는 기각되고 부합하는 사실만 채택되고 과장된다. 이런 프레임으론 그토록 회자되는 "케이팝 산업의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그에 따른 모든 논의와 결론도 부정확해진다. 현재 하이브가 저질렀다고 고발되는 부조리는 케이팝 산업 전반에 대한 성찰로 연결되지 않고 하이브만의 잘못으로 타자화되고 있다. 이건 공적 의제가 여론전의 수단으로 전용된 데서 온 현상이다.
민희진은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의 상황은 남성중심사회를 비판하는 렌즈로 쓰이고 있다. 그것은 민희진 스스로 포지셔닝한 “개저씨들 사회에서 핍박받는 여성 직장인”의 이미지와 구도 때문일 것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엔터 산업에서 희소하기 짝이 없는 “성공한 여성”을 남성 임원들의 공세로부터 지켜 내는 것은 그 자체로 여성주의에 부합한다는 공감대가 자리잡은 것 같다. 한겨레 21에서 발행된 “이 여자가 유별나다고 손가락질하기 전에”가 정확히 그런 스탠스의 글이다. 이 글은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사태를 평가하지만 민희진이 그동안 어떤 행보와 가치를 지향했는지는 살피지 않고 남성 집단의 보편성에 대해 규정되는 여성 개개인의 자리에 도식적으로 대입한다. 실은 그 기자회견에서조차 민희진이 '남성적 보편성'에 복무하는 관점을 드러냈음에도 말이다.
여자 연습생들의 나이를 품평하고 뉴진스 멤버의 외모를 평가했고 여성을 곧 모성과 등치하는 가부장적 인습을 답습했다. 업계의 어른에 해당하는 나이 든 여성이 아일릿과 르세라핌 멤버들, 업계에서 막 데뷔한 젊은 여성들을 피아 구도로 구분하며 거명하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도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여성들의 연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민희진이 기획자로서 보여준 모습 역시 여성주의는커녕 그 반대에 해당하는 성격이 짙다. 대표적으로 뉴진스의 ‘OMG’ MV가 공개됐을 땐 그룹을 향해 제기되는 젠더적 관점의 비판을 정신적 문제가 있는 악플러들의 소행처럼 묘사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17일 뉴스로 나온 이야기, 어도어 부대표 관련 성희롱 신고가 접수되자 부대표에게 여성 직원들을 강압적 자세로 대하라고 요구했다는 말도 넘겨 듣기 힘들다. 민희진은 여성주의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를 여론전의 수단으로 동원하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민희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태도는 특히 진보 언론에서 강한 것 같다. 그들이 민희진에게 끌리는 이유는 알만하다. 그는 민중적 프레임으로 엘리트 계층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였고, 제도권 미디어를 동원한 언론플레이를 한 번의 기자회견으로 뒤집었다. 유튜브와 커뮤니티에서는 풀뿌리 여론의 비호를 얻고 있다. 여기엔 진보 언론이 매력을 느낄 만한 서사적 요소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 욕망이 사태에 관한 객관화된 평가와 성찰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민희진의 기자회견은 단순히 공적 말하기에 부합하는 격식이 없기 때문에 부적절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대목이 너무나도 많이 섞여 있고, 올바르지 않음으로 촉발된 정념은 여론이 매혹된 핵심 기제였다. 그 스펙터클과 카타르시스, 가치 전도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극우화’라 부르는 현상의 기저에 깔린 정동과 그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내 억울함은 날 합리화하는 절대적 명분이 되고, ‘내 새끼와 남의 새끼’는 나의 생존주의에 도덕적 정당성을 주는 구도가 된다. 욕먹을 이유가 있는 사람한텐 어떤 행동을 퍼부어도 상관이 없다는 믿음 또한 실행된다. 생존주의와 응보론, 대결을 위해 수단화된 이념, 군중의 폭력성… 이런 것들이 기자회견에 대한 열광 뒤편에서 사람들의 사회적 자아와 강렬하게 공명하며 재생산된다. 지금껏 ‘민희진 현상’을 분석하는 많은 논평이 나왔지만, 이 점을 캐묻고 돌아보는 의견은 못 봤다. 언론과 식자들이 이 사건을 결국엔 ‘연예가 가십’의 일환으로 보며 폐해를 가볍게 여긴다는 증거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 우리 사회의 코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민희진의 ‘무엇’에 열광하고 있을까 < culture critic < 미디어비평 < 기사본문 - 미디어스 (media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