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쓸데없는 물음이었다. 오히려 한국사회의 경직성만 내보이고 말았다. 한국사회의 다수의 의견은 아니더라도 언론인이란 어떤 특정한 사회에 대한 대표성을 갖는다. 그것을 기사로 내보냈다. 마치 카라의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이 그들을 비난할 근거가 되는 것처럼. 공격의 빌미를 만든다. 한국인들이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강요된 결과라고. 주입된 사실을 억압된 분위기 속에 되뇌이고 있을 뿐이라고. 독도영유권에 대한 주장 자체가 우스워지고 말았다. 쇼비니즘 자체가 우스꽝스럽고 공포스럽다. 안에서는 공포이고 밖에서 보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많이 성숙했다. 의외로 기사의 파급력은 크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그같은 기사에 휩쓸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독도란 그만큼 민감한 소재인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열패감과 위기의식은 영토에 대한 타인의 의도에 대해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인을 인식한다. 그렇더라도 국가적인 지향과 유리된 개인의 삶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입장표명을 거부할 수 있다. 그 권리를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민주사회라 할 수 있다. 민주화된지도 벌써 30년이 넘어간다.
독도는 독도, 카라는 카라다. 모든 개인은 개인이다. 개인의 입장이 있다. 개인의 삶이 있다. 단지 선택한다. 그래서 개인이다. 국가는 공적으로 공식적인 역할을 한다. 개인은 사적으로 개인적인 역할을 한다. 국가의 역할이 공적인 의무에 따른다면 개인의 역할은 사적 선택을 따른다. 그것은 하물며 특정한 개인이 자의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개인에게는 개인의 삶도 중요하다. 국가적 이슈에 매몰되지 않는 것도 개인의 권리다. 어느새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독도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그같은 모든 개인들이라는 것을.
박지윤 당시 MC의 판단은 매우 정확했다. 그럴 자리가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적당히 중간에서 자르는 것이 옳다.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코미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