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환경에서 제2의 김연아가 어떻게 나오겠는가!"열악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피겨 스케이팅의 불모지 한국에서 '피겨 여왕' 김연아가 탄생한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난달 28일 태릉 국제스케이트장과 빙상장을 찾은 < 스포츠서울닷컴 > 취재진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현장에서 만난 지도자와 선수들은 줄곧 안타까운 반응을 보였고, 이들을 지켜보는 학부모 역시 답답해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표팀 선수들이 훈련하고, 또 '유망주'들이 자라나는 '한국 스포츠의 산실' 태릉 선수촌에서 '미래 없는 피겨'를 떠올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여기는 괜찮은 편이다'는 한 대학 선수의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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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선수들이 훈련하는 태릉 빙상장. 이 빙상장에서 피겨 스케이팅, 쇼트트랙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대표팀 선수들이 시간을 나눠 '힘들게' 훈련하고 있다. / 태릉 = 배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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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낮 1시 30분쯤. 얼마 전 캐나다 런던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하며 재기에 성공한 김연아의 훈련 환경을 살펴보고자 가벼운 마음으로 태릉 빙상장을 찾았다. 지난달 20일 인천 국제공항에서 가진 귀국 기자회견에서 "태릉에서 어린 선수들과 훈련하니 좋았다. 훈련은 계속 국내에서 할 계획"이라는 김연아의 말을 떠올리며 빙상장으로 향하는 언덕을 올랐다. 하지만 봄기운이 완연한 이날 빙상장 안은 여러모로 싸늘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로 추웠고, 빙질도 좋지 않아 보였다. 관람석 곳곳에는 담요를 덮은 채 훈련 장면을 지켜보는 학보모 들이 눈에 띄었다. 이 시각 한 대학의 쇼트트랙 스케이팅팀이 대관해 훈련하고 있었는데, 한 학부모는 "환경이 정말 열악하다. 이것도 많이 따뜻해진 것이다. 또한 피겨, 아이스하키, 쇼트트랙이 모두 이곳에서 훈련하니, 빙질이 얼마나 안 좋겠는가. 안 그래도 스케이트 날에 무척 예민한 아이들인데…부상 위험이 무척 크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선수들이 몸을 풀만 한 장소를 찾는 것은 '사치'인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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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 빙상장에서 추위를 참아가며 자녀들의 훈련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학부모들. /태릉 = 배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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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 빙상장은 피겨, 쇼트트랙, 아이스하키 대표팀 선수들이 훈련하는 곳이다. 피겨 대표팀의 경우, 약 12명의 선수가 하루 4시간씩 한 데 모여 훈련하며 다른 대표팀과 시간을 나눠 이 빙상장을 '힘겹게' 사용한다. 장소가 협소해 효율적인 훈련이 이뤄지기 어렵고, 훈련을 더 하고 싶어도 다른 대표팀에 양보해야 하기에 서둘러 빙상장을 빠져나와야 한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훈련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대표팀 감독들 간의 '다툼'이 빈번히 발생한다. 빙상장에 다른 일정이 잡히면 각 대표팀은 훈련 시간을 변경해줘야 하는데, 이날 피겨 대표팀은 애초 오전 10시~오후 2시까지 하는 훈련 일정을 대회를 앞둔 대학 선수들을 위해 2시간씩 앞으로 당겨 치렀다. 게다가 피겨와 쇼트트랙, 아이스하키 등은 스케이트를 타는 방식이 모두 달라 설정해야 하는 빙판 온도가 모두 다르지만, 한 대표팀의 여건만 고려할 수 없어서 그저 '딱딱한' 빙판 위에서 훈련한다. 피겨는 딱딱한 빙판 위에서 훈련하면 무릎과 허리에 무리가 오고, 쇼트트랙과 아이스하키는 피겨 선수들의 엣지로 상처 난 빙판에서 넘어지기 쉽다. 한국 대표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현실'이다."왜 선수들이 몇천만 원씩 들여 굳이 외국에 나가겠는가!" 현장에서 만난 한 피겨 대표팀 관계자는 국내 훈련 환경에 대한 불만을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끌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간혹 거친 말도 내뱉은 그는 "대표팀 선수들조차 훈련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 사설 링크를 빌려 새벽에 타기도 한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훈련하니 서로 부딪히면 뼈가 부러지거나 살이 찢어지고, 빙상장 온도도 선수들이 훈련하기에 춥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의 이러한 훈련 환경을 알고는 비웃더라. 세계적인 기준에서 이곳은 완전히 수준 이하"라면서 "선수들이 국외 대회에 나가면 속도가 너무 나서 점프하기가 어렵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과거 축구 대표팀이 국제 대회서 천연 잔디 적응에 실패하고 저조한 성적을 낸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얘기다. 외국 피겨 대표팀은 보통 전용 경기장에서 최적 온도인 -4도에 맞춰 훈련한다. 기술 향상이 빠르고 엣지를 정확하게 연습할 수 있다. 이웃 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스케이트장이 1000여 개에 달한다. 반면 한국은 약 30개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 군포시 등에서 추진하다 흐지부지해진 피겨 전용 링크장은 단 한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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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피겨 꿈나무'(왼쪽)가 고르지 않은 빙판 위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피겨를 즐기러 온 일반인. /태릉 = 배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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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 꿈나무'들이 꿈을 키워나가는 국제스케이트장의 환경은 더욱 좋지 않았다. 빙상장 바로 옆에 있는 국제스케이트장은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는데, 이날 역시 일반인들과 꿈나무들이 함께 연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반인이 스케이트를 타면 빙판이 금세 울퉁불퉁해진다"는 게 관계자들의 목소리다. 이 스케이트장 한가운데 있는 링크에는 선수들을 보호하는 펜스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방이 휑하게 뚫려 있었다. 선수들이 빠른 속도로 점프하다 넘어지면 크게 다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쇼트트랙과 피겨 꿈나무들이 뒤섞여 훈련하는 풍경이 연출됐으며, 양측 모두 정상적인 훈련을 하기 어려운 눈치였다. "조금 있으면 쇼트트랙 선수들이 더 많이 올 것"이라며 한 피겨 지도자가 부상 등을 걱정하는 시선으로 꿈나무들을 바라봤다.
많은 이들이 "제2의 김연아가 하루빨리 나와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날 태릉에서 본 한국 피겨의 장래는 너무나도 어두워 보였다. 전용 링크장 설립 등 훈련 환경이 변하지 않는 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세계 최고가 된 '천재' 김연아 같은 선수는 다시 나오기 힘든 분위기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김연아 선수도 계속 태릉에서 훈련한다면, 경기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한 관계자의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