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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6-17 05:52
[잡담] 1954년 6월 17일 우리나라 첫 월드컵 출전
 글쓴이 : 두부국
조회 : 3,099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대한민국 VS 헝가리

1954 6 17일 스위스 월드컵 개막 이틀째.
취리히 하르트투름 경기장에는 17천 명의 관중이 B조 헝가리와 대한민국의 경기를 보러 모여들었다. 1장뿐인 아시아지역 출전권을 획득한 대한민국이 푸스카스, 콕시스 등의 선수로 구성된 강력한 우승후보 헝가리의 적수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제네바에서 한국전쟁 참전 16개국 회의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한국팀의 출전을 여러 번 방송했고, 사람들은 이제 막 전쟁을 극복하고 있는 미지의 한국팀에 관심이 많았다.
 
경기가 시작되고, 출발은 좋았다. 전반 10분까지는 김용식 감독의 주문대로 수비에 집중하며 헝가리 선수들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그러나 전반 12분에 푸스카스에게 선제골을 내어준 이후로 한국 선수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시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헝가리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전반전에서만 4골을 허용했다. 후반전은 더욱 처참했는데 헝가리 선수들의 태클이 없었음에도 한국 선수들이 여기저기서 주저앉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쥐가 나고 만 것인데 48시간에 이르는 비행에 따른 극심한 피로와 시차, 경기를 불과 10여 시간 앞두고 스위스에 도착해 아직 몸이 풀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전력을 다해 뛴 결과였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선수들은 더욱 이를 악물고 뛰었고, 골키퍼 홍덕영은 수십 개의 슈팅을 막아내며 선전했지만 결과는 09. 대한민국의 이름을 달고 출전한 첫 월드컵의 첫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경기장에 입장하고 있는 대한민국, 헝가리 선수들
경기 시작 전 도열한 대한민국 선수들 / 헝가리와의 경기를 앞두고 푸스카스와 악수를 나누는 한국팀 주장 주영광선수


운명의 첫 한일전

스위스월드컵 극동지역 예선전이 치러지던 1954 3, 대한민국은 36년에 이르는 일제의 수탈로 황폐해진 땅에 한국전쟁이라는 참상까지 이어지며 폐허나 다름 없는 나라였다.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 맞붙어야 할 예선전의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원래는 FIFA방식에 따라 홈앤드어웨이로 양국에서 번갈아 경기를 치러야 했지만 일본과의 국교 수립 전인 데다 일본인이 한국땅을 밟게 할 수 없다는 정부의 방침으로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치러졌다.
 
출국 허가를 받는 자리에서 대표팀 이유형 감독은 만약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선수단 모두가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약속을 했다. 그만큼 8.15 해방 이후 처음으로 벌어지는 한일전에 임하는 선수단의 각오는 남달랐다. 그리고 마침내 3 7, 도쿄 메이지진구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1차전에서 한국 선수들은 눈비가 쏟아지는 악천후를 뚫고 51이라는 압도적인 점수차로 승리했다. 일주일 후 열린 2차전에서 22로 비기면서 한국은 11무로 월드컵 첫 출전권을 획득했다.

스위스월드컵 공식 포스터 / 대한민국 대표팀 경기복(헝가리는 붉은색) /최초로 18개의 가죽 조각으로 만든 스위스월드컵 공인구


스위스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일본을 물리쳤다는 기쁨도 잠시, 한국팀의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피로가 미처 풀리기도 전에 5 1일부터 9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 출전해야 했다. 이 대회에서 자유중국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나 이때의 대표팀은 보다 강력한 팀을 구성하기 위해 귀국과 동시에 해체되었다. 이후 5 22일부터 3일간 청·백·홍 3개 팀으로 나누어 선발전을 다시 치른 후에야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할 선수단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1954년은 아직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때였다. 대다수 국민들의 생활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정부 역시 선수단이 미리 현지에 도착해서 적응훈련을 할 수 있을 만한 지원을 해줄 형편이 아니었다. 선수단은 비행시간만 48시간이 걸리는 장장 사흘간의 여정을 떠났다. 더구나 비행기는 미군 전용기라 한국 선수들의 발은 바닥에 닿지도 않아서 근육의 피로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선수단이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한 것은 6 16일 밤. 월드컵 대회는 이미 개막했고, 바로 다음 날 있을 헝가리와의 첫 경기까지는 10여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경기를 준비하기는커녕 피로를 풀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첫 출전이라 기본적인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서 한국 선수들의 유니폼에는 등번호조차 없었다. 한밤중에 번호가 있는 하얀 천을 구해와서 밤새 일일이 유니폼에 천조각을 꿰매야 했다. 이처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한국팀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월드컵 대표팀은 등번호가 적힌 유니폼이 없어서 경기 전날 밤 하얀 천을 구해와 일일이 꿰맨 후에야 경기 출전이 가능했다


높았던 세계의 벽, 그러나 도전은 계속되었다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대패한 한국팀은 20일에 열린 터키와의 경기에서도 07로 지고 말았다. 이로써 예선 탈락이 확정된 한국 선수단은 서독과는 싸워보지도 못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은 그렇게 짧고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세계 무대를 향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한국 축구의 현실을 깨달은 축구인들은 내실을 다지는 데 힘을 기울였고, 각종 국내 축구대회가 활기를 띠면서 중학 및 고등학교 축구선수권대회, 대학축구선수권대회, 도시대항축구대회 등이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월드컵 무대를 밟은 지 2년 후인 1956년에는 홍콩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축구 열기에 더욱 불을 지폈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잔디구장인 효창운동장이 개장했고, 그곳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축구선수권에서 우리나라가 또 다시 우승컵을 안으며 세계 무대와의 거리를 좁히는 듯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다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기까지는 무려 32년이 걸렸다.

1960년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짙은 색 유니폼)이 베트남 대표팀과 1차전을 치르고 있다


월드컵 첫 승리를 거머쥐기까지

그 후 2002년 5월 31일, 대한민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한 한일 월드컵이 개막했다. 192개국이 지역 예선을 치른 후 32개국이 본선에 참가한 2002년 월드컵은 월드컵 사상 최초의 공동 개최라는 타이틀도 있었지만, 한국 대표 팀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였다. 48년 동안 단 한 번도 거머쥐지 못한 월드컵 본선 승리를 대한민국에서 쟁취해보겠다는 것. 히딩크 감독을 선두로 비장한 각오로 뭉친 한국 대표 팀은 드디어 6월 4일, 부산 주경기장에서 폴란드와 맞붙게 되었다. 경기장은 경기 시작 한참 전부터 관중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릴 때쯤은 붉은 옷차림으로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로 가득 차 이미 열광의 도가니였다. 전반 초반, 폴란드의 거센 공격에 잠시 주춤했던 한국은 전반 26분, 이을용 선수가 왼쪽에서 강하게 밀어준 볼에 황선홍 선수가 왼발을 갖다 대면서 시원하게 폴란드의 골대를 갈랐다. 이후 후반 8분에 유상철 선수의 오른발 중거리 슛이 더해지면서 2:0. 우리나라 첫 월드컵 승리가 확정되었다.

며칠 후 미국전에서의 1:1 무승부에 이어 포르투갈전에서 1:0으로 승리하면서 한국 월드컵 역사 사상 처음으로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기록했다. 18일에 열린 16강전에서는 강호 이탈리아를 상대로 2:1이라는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8강에 올랐고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격전 끝에 5:3으로 승리를 거두며 사상 초유의 4강 신화를 이루어냈다.


혼의 시작은 그날이었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이후 8회 연속 본선 진출이라는 아시아 유일의 기록에서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의 쾌거까지. 62년 전 그날 이후, 대한민국도 한국 축구도 많은 것이 달라지고 그 위상이 높아졌지만 아직까지 한국 축구는 분명 세계 최강은 아니다. 그럼에도 전국민이 선수들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것은 기록과 통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투혼. 불가능한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는 힘이자 쓰러질 때까지 싸울 수 있게 하는 힘.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나라 첫 월드컵 첫 경기였던 1954년의 그날을 09의 패배로 기억하지 않는다. 끝까지 싸워냈던 선수들의 투혼으로 기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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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보고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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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BAR 16-06-17 10:16
   
잘 봤습니다.
흑백 사진 속에서
먼 옛날 우리 대표 선수들의 모습에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
62년이 지난 지금 박수를 보냅니다.
카카는밀란 16-06-17 10:59
   
전쟁막끝난직후고 그렇게힘들게 갔는데 축구할맛이 났을까요 선수들
세니안 16-06-17 11:21
   
엑박이네용 ㅠ
나르스 16-06-17 12:03
   
선수 명단을 보니 대부분 특무대, 해군, 병참단, 헌병사령부 등등의 현역 군인이 대부분이네요
당시 상황상 축구선수는 현역 군인이어야 선수생활을 하기가 좋았나 봅니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나라가 아시아에 한장밖에 없는 출전권을 차지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고 봅니다.
젓가락사단 16-06-17 20:23
   
당시 참가했던 골키퍼 선생님  인터뷰 생각나네여... 얼마나 슈팅을 많이 맞고. 슛이 강하던지..가슴팍이며..팔이며..피멍이 들었다던.. 온몸에 피곤과..시차적응..잔디 적응도 못한채..치룬.경기들..
얼마나 힘들었을지..상상도 안됩니다..
월드컵 본선에서  당한  저 기록이 아직도 안깨졋다고 들었던것 같은데..
아프고 짠하지만..귀한 역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