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밖 재신임, 협회가 달라졌다?!
이유가 무엇이든, 축구협회가 이번에 슈틸리케 감독을 재신임하기로 결정한 것은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집은 것이다. 이제까지 협회는 A대표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여론의 향배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1986년부터 2014년까지 8회 연속 본선 진출의 성과를 냈는데, 이 중 전임 감독 도입 이후 예선과 본선을 1명의 감독으로 모두 치른 적은 초대인 김호(1994년 월드컵)와 베어벡 감독 경질 이후 월드컵 예선 직전 부임한 허정무(2010년 월드컵) 감독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처럼 극도로 악화된 여론에도 불구하고 협회가 A대표팀 감독을 재신임한 것은 분명 이례적인 결과다.
어떤 면에서 이번 결정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기도 하다. 슈틸리케 감독의 최대 미션은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따내는 것이다. 부진한 경기 내용과 불안한 순위를 부정할 수 없지만, 대표팀의 본선행 가능성은 여전히 유의미하게 높은 상황이다. '이대로면 본선에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우려를 근거로 아직 만료되지 않은 계약을 중도에 해지하기엔 명분이 마땅치 않다. 여론이 감독 해임을 요구하는 것과, 협회가 실제로 감독을 해임하는 것 사이에는 이성적 판단의 경계가 있어야 한다. 이번 재신임은, 그런 점에서 과거에서 진일보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명분이 아닌 우려가 감독 해고의 가장 큰 이유였던 시대와 결별하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A대표팀은 한 나라 축구의 정점에 놓인 존재다. 해당 국적을 가진 이들 중 가장 축구를 잘 하는 선수들이 모인 팀이기도 하지만, 여러 면에서 그 나라 축구의 현재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이 거두는 성과는 그 나라 축구의 미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그 나라 축구협회에서 대표팀은 거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그 A대표팀의 성과를 책임진 감독이라는 자리는 그래서 존중받아야 한다. 주도면밀한 검토를 통해 임명하고, 그 뒤엔 그가 최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히딩크 이후의 대표팀 감독은 대부분 협회의 지원과 지지를 받기 보다는, 홀로 남겨진 채 고투하다 여론 재판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론 아닌 평가' 슈틸리케 유임의 긍정적인 면
그 불의의 역사는 꽤 길다. 차범근 감독의 경우, 98년 월드컵 최종예선을 손쉽게 통과하고서도 경질설에 시달려야 했다. 이미 본선 티켓을 손에 쥐었지만, 홈에서 일본에게 패한 것이 반대론자들의 목청을 높여준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협회가 보여준 단호하지 못한 태도는, 결국 본선에서 네덜란드에게 0-5로 패배한 뒤 현장에서 감독을 전격 해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예상 밖의 퇴장이 발생하기 전까지 선전했던 1차전(멕시코)이나, 2차전 상대인 네덜란드와의 전력차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협회는 차 감독을 대회가 끝나기도 전에 귀국시켜 여론의 뭇매를 맞도록 방치했다.
2002년 이후로도 A대표팀 감독의 수난시대는 이어졌다. 코엘류와 본프레레를 거쳐 본선은 아드보카트가 감독을 맡았던 2006년 월드컵, 최강희 감독이 예선을, 홍명보 감독이 본선을 나눠 이끈 2014년 월드컵까지, 대한민국 A대표팀 감독직은 본선 티켓을 따고서도 안심하거나 당당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그런 점에서 협회의 이번 결정은, A대표팀 감독직을 협회의 방패막이나 희생양으로 삼던 과거와 단절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현대 축구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아시아 축구 역시 발전하고 있고, 과거에 비하면 대표팀 축구의 국가간 격차는 점점 줄어드는 중이다. 즉, 대한민국이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내용과 결과를 양손에 당연히 거머쥘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아시아의 맹주라는 과장된 표현은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종예선에서의 고전이 그 자체로 감독 경질의 이유가 될 수 있느냐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대한민국은 여전히 조 2위에 올라 있다. 불안한 순위이긴 하지만 본선 직행 가능성이 (앞서 언급했듯) 여전히 유의미한 수준으로 남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 경질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지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냉정한 현실 인식, 악순환 고리 끊는 계기로
물론 A대표팀은 여론과 완전히 동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 팀이 아니다. 악화된 여론은 감독 경질시 고려되어야 할 여러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이 그간 너무 컸던 게 사실이다. 변화된 환경에서 여전히 본선 직행 가능성이 남아있는 지금, 위기의 감독을 경질하지 않고 재신임한 결정은 그래서 의미를 부여할만한 것이다. 매 대회 예선 감독과 본선 감독이 다른 악순환의 고리를 깰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슈틸리케 감독이 경쟁국들에 비해 커리어가 형편없고 팀 운영 과정에서 약점이 많이 노출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더 뛰어난 경력의 감독을 데려오기 힘든 우리 여건이나 그러지 못한 협회의 오판이 문제인 것이지 슈틸리케 감독 개인을 경질하는 것으로 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당장 감독을 자르는 미봉책이 여론에게 사이다 같은 소식이 될 지는 모르지만, 팀의 연속성을 단절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면 장기적 관점에서의 발전은 요원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랬듯 다음 월드컵 준비 과정에서도 같은 요구와 대처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이 시점에 좋은 감독이 등장하길 바라는 것도 무리다. 설령 더 나은 경력의 감독을 모시고 올 수 있다해도 그것이 과연 경질을 합리화시킬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애초에 더 좋은 경력, 더 비싼 감독을 데려오지 않고 소 잃은 뒤 외양간 고치는 식의 대처를 반복하는걸 권장할 수는 없다. 시공 때 돈 아끼고, 보수 공사에 더 큰 돈 쓰는 비효율적인 낭비를 반복하기 보단, 러시아 월드컵 이후의 차기 감독 선임을 지금부터 길게 준비하는게 더 나은 투자일 것이다. 경질 뒤 새로운 감독을 선임해 남은 예선 잘 치르고 본선에서 성과를 낸다한들 그것을 해피엔딩이라 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을 방치한 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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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읽다보니 차범근 감독 본선 중도에 경질 한 것이 떠오르네요.
그당시 정말 당황했었죠. 한심한 팬과 축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