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욱의 뷰티풀게임] '작은 코 다친' 베트남 축구의 근거있는 자신감
[뷰티풀게임=서형욱] 다소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베트남 축구가 한국 축구에 도전장을 던진 것은.
최근 미얀마에서 개막된 AFC 19세 이하 청소년 대회 맞대결을 앞두고 베트남이 한국을 꺾을 수 있는 상대로 분류했다는 소식이 외신을 통해 타전되면서 국내 축구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전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였던데다 별다른 경쟁 관계도 없던 베트남 축구가 한국 축구를 이길 수 있다고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은 우리에겐 분명 낯선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난데없는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느낀 이들도 적지 않았다.
베트남 U19 대표팀은 자국 리그나 성인 대표팀의 인기를 능가한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베트남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낯익은 나라지만 적어도 축구에서만큼은 그다지 인연이 깊지 않은 국가다. 과거에는 제법 교류가 잦았지만 상대 전적(16승6무2패)에서 보듯 실력 차가 크게 벌어져 있던데다 최근에는 그나마 만나기도 쉽지 않아 축구에 관한 한 국내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나라였다. (마지막 대결은 2004년 9월 독일월드컵 지역예선 2-1 승) 당장 이번 달 FIFA 랭킹만 살펴도 두 나라의 격차는 크다. 대한민국은 현재 63위로 아시아에서 4번째로 높지만(이란 44위, 일본 48위, 우즈베키스탄 58위), 베트남은 142위로 아시아에서도 21번째다.
베트남이 한국 축구를 넘볼 수 있던 이유
그러던 중, 이번 AFC 19세 이하 선수권대회에서 베트남은 한국, 일본, 중국과 본선 한 조에 속했다. 그리고 대회 개막이 임박하자 베트남은 자신들이 조별리그를 통과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며 '최강' 일본은 어렵지만 '강호' 한국과는 해볼 만하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한국이 이번 대회 예선전에서 인도네시아에 패배한 적이 있는 것도 베트남이 의욕을 불태운 이유였지만, 베트남 U19 팀이 최근 국내외에서 크게 주목받으면서 고조된 자신감이야말로 가장 큰 자산이었다. 9일로 예정되어 있던 한국-베트남전이 여느 아시아 대회 못지 않게 관심을 끈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베트남 축구의 자신감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베트남은 앞서 아시안게임 첫 경기에서도 강호 이란을 4-1로 대파한 경험이 있다. 게다가 이번 대회에 참가한 U19팀은 '베트남 메시'라 불리는 응우엔 꽁 프엉을 앞세워 국가적 기대와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중이었다. 2007년, 아스널 팬인 베트남의 갑부 도안 응구옌 둑이 아스널과 합작해 설립한 아스널 아카데미를 통해 발굴/육성된 꽁 프엉은, 이 아카데미 출신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U19 대표팀이 자국 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데에 주축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후원이 늘어난 덕택에 프랑스인 기욤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U19 대표팀은 축구협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여러 차례 해외 전지훈련 및 친선경기를 다녀왔다. 기대와 투자를 바탕으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이른바 '황금 세대'다.
베트남 내에서 아스널의 인기는 폭발적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14년 들어 유럽 클럽 유스팀들과 수시로 경기를 갖고 영국 전지훈련을 치르는 과정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인 것은 안팎의 기대가 드높아진 계기였다. 특히, 지난 3월 런던 원정에서 아스널 U19 팀을 3-0으로 완파한 것은 이 팀에 거는 기대가 임계치를 넘어서는 결정타였다. '아스널'의 이름값은 대단했다. 사실, 이 경기는 베트남 U19 대표팀이 3월까지 치른 10경기 중 유일한 승리였고 그나마 공식전이 아닌 비공식 친선전이었다. 하지만 아스널을 꺾었다는 사실은 이 팀이 갖고 있는 한계와 현실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후 베트남 U19 대표팀은 벨기에, 프랑스, 일본, 브루나이 원정을 거쳐 9월 자국에서 열린 AFF U19 대회에서 일본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를 냈다. 일본에게는 최근 3연패를 당한데다 그들 스스로 '넘을 수 없는 상대'라 규정하고 있던 터여서 결승에서 0-1로 진 결과를 뿌듯하게 여길 정도였다.
아스널, 베트남 메시, 그리고 황금 세대
꽁 프언 등을 앞세운 U19 대표팀 소재의 만화책이 출간됐다.
이 과정에서 U19 대표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일본과의 결승전을 앞두고 이 경기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2박 3일간 줄을 선 것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무려 40,000석이나 되는 경기장에서 열리는 시합이었지만 밤샘 대기를 하고서도 표를 구하지 못한 많은 팬들이 베트남 축구협회 사무실을 급습해 경찰들이 출동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지난 달에는 U19 대표팀을 소재로 한 축구만화까지 출간되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10월로 예정된 AFC U19 대회에 대한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찬물이 쏟아졌다. 대한민국 U19 대표팀과의 경기가 무려 0-6의 참패로 끝난 것이다. 전반전에 선전하는 듯 보였던 베트남 U19 대표팀은 기술과 힘의 열세를 드러내며 수비 허점을 고스란히 노출한 채 큰 점수 차로 패했다. '큰 코' 아니, '작은 코'를 심하게 다친 셈이다. 이 경기는 대회 첫 시합이었고 베트남은 이제 일본, 중국과 남은 시합을 치러야 한다. "일본에 이어 조 2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고 희망가를 부르던 베트남 축구팬들에게는 우울한 결과일 수 밖에 없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베트남 U19 대표팀. 성인 축구마저 압도하는 이들의 인기를 뒷받침하는 팬들의 응원 열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베트남 축구팬들의 높은 기대와 선수들의 자신만만하던 모습을 폄하할 수는 없다. 어찌됐건 베트남 축구는 최근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지금의 U19 대표팀이 있다. 그들을 얕잡아 보거나 '허세 부리지 말라'고 충고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역시 비슷한 경험을 수 없이 했기 때문이다. 월드컵이 열리는 4년마다 우리가 가졌던 높은 기대감도 - 규모나 수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 결국엔 베트남 축구팬들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결국엔 이러한 관심이 투자를 이끌어내고 발전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광범위한 노력이 투자로 이어지는 것도 눈길을 끈다. 최근에는 FIFA도 베트남 유스 발전 기금으로 1백만 달러를 출연하기도 했다.
'하수'가 아닌 '동반자'를 위하여…K리그를 위한 제언
베트남 축구의 성장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자국 내의 뜨거운 열기와 늘어나는 투자는 그러한 긍정적 전망의 한 축이다. 아시아 축구의 동반자로서, 그리고 조금 더 냉정한 접근법으로 보자면 미래의 시장으로서 우리에게 베트남 축구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무시해서는 안되는 존재다. 지금 베트남 축구가 - 그리고 베트남 사회가 - 일본 축구에 호의적인 것, 그들을 모델로 삼으려 하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경기에서 보았듯, 베트남이 지금의 열기를 성과로 이어가려면 극복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영국이나 일본 등 기존에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수 위의 축구 나라들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려 할 것이다. 틀을 깨지 않고서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대중 문화가 베트남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그리고 베트남 축구가 성장세를 거듭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이를테면 '베트남 메시'라 불릴만큼 재능과 인기를 겸비한 U19 스타 응우엔 꽁 프엉을 비롯한 베트남 유망주를 K리그로 데려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톱스타가 뛰는 리그이니 중계나 원정 응원을 오려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고 이를 통해 K리그는 베트남 내에 팬덤을 만들 수도 있다. 박지성의 입단이 국내 맨유팬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듯,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백승호와 이승우가 수준급 선수로 성장했듯, 우리는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 축구약소국들과 발전적 제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베트남 축구가 한국을 넘보는 것은 아직 '허세'나 '꿈'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이러한 열기와 투자가 계속된다면 우리가 언제까지나 그들을 6-0으로 이길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베트남 축구의 이유있는 허세가 우리에게도 발전과 분발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