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긴 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최대한 간략하게 써 보겠습니다.
전 벤투가 한국국대감독을 맡고 난 뒤 여러가지를 깨닫고 갖은 감정(충격, 어이없음, 허탈함 등등)을 느끼고 있습니다.
먼저 제가 깨달은 것들을 요약해보겠습니다.
1.벤투는 유럽 기준으로 보면 좋은 감독이 아니라 평범한 감독이거나 혹은 큰 단점이 있는 평범한 감독이다.
2.그동안 한국국대를 맡았던 감독들은 히딩크를 제외하고는 평범한 수준의 감독조차 없었다.
3.한국 축구선수들의 수준 혹은 잠재력은 매우 높다.
4.그런데 한국축구 지도자들의 수준은 바닥이다.
5.한국축구선수들의 능력치 중 다른 부분은 대부분 상위권이지만 단 한가지 전술 이해도는 매우 떨어진다. 그 이유는 당연히 전술이해능력을 키워줄 좋은 지도자가 한국에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자,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국축구는 오랫동안 상대 코너킥 공격 상황에서 맨투맨 수비를 해 왔습니다. 너는 쟤, 너는 쟤, 너는 쟤를 맡아! 이런 식의 수비죠.
하지만, 이런 맨투맨 수비는 상당히 비효율적인 수비방법이 되기 십상입니다. 한국이 맨투맨 수비를 한다는 것을 상대가 알면, 선수를 한 쪽으로 몰아 빈 헛점을 만들어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맨투맨 수비 보다는, 선수들을 골대 앞 위험 지역을 일자로 배치시켜 막게하는, 각자 일정 공간을 맡아 수비하는 지역 방어 수비가 더 효율적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 방어 수비는 약점이 있습니다. 코너킥이 날아오는 순간 수비수들은 제자리에서 점프하고 상대 공격수는 달려들어오며 점프하는 런닝점프를 하기 때문에, 제자리 점프보다 런닝점프를 하면 더 높이 뛸 수 있기 때문에 수비수들의 키가 작을 경우, 키가 큰 상대 선수가 런닝점프를 해서 들어오면 높은 타점의 헤더슛을 쉽게 허용할 수 있습니다.
즉, 코너킥상황에서 지역방어수비는 평균키가 작은 팀은 런닝점프에 당할 수 있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대표팀은 대체로 세계에서 평균키가 큰 편에 속합니다. 그래서 지역 방어 수비일 때 어느 정도 상대 선수의 런닝점프와 높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기 때문에 큰 문제없이 방어할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바보처럼 코터킥 상황에서 맨투맨 수비를 했습니다.
슈틸리케 감독 때 코너킥 상황에서 지역방어 수비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좋았냐?
아뇨, 망했습니다. 지역방어 수비를 하면서 연이어 상대코너킥 상황에서 위험스런 장면이 연출되었고 골도 먹었죠. 그 바람에 선수들이 슈틸리케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야, 이대로 하다간 코너킥 때 마다 골 먹겠다. 다시 맨투맨 수비로 돌아가자!' 하는 촌극까지 벌어졌습니다.
왜냐? 슈틸리케 감독이 무능해서 코너킥 상황에서의 지역방어 수비를 제대로 모르고 선수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코너킥 상황에서 지역방어 수비는 무조건 선수들을 일자로 골대 앞에 세워 지역방어를 하는 게 아니라 일정 숫자를 골대 앞에 세우고 나머지 선수들은 상대의 노림수에 대비해야 합니다. 즉, 지역방어를 기본으로 하되 맨투맨 수비를 하는 선수를 몇 명 지정해서 섞어야 디테일이 완성되는 것이죠.
그런데 바보 슈틸리케는 이걸 잘 못했습니다.
바보처럼 오랫동안 코너킥 상황에서 맨투맨 수비를 해온 한국축구
그걸 또 지역방어를 한다고 시켰는데 제대로 모르고 시킨 슈틸리케.
이게 바로 한국축구의 쪽팔린 민낯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수들로 월드컵에서 독일을 이겼습니다.
이게 바로 한국축구의 놀랍게도 강인한 점입니다.
벤투가 한국축구 감독이 되면서 드디어 디테일이 완성된 코너킥 상황에서의 지역방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코너킥 상황에서의 지역방어"
이게 세계적인 명장이어야만 할 수 있는 건가요?
아뇨, 근데 한국축구는 벤투감독이 오기 전까지 이걸 제대로 못하고 있었습니다.
벤투가 절대 명장은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감독이고 어쩌면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 감독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벤투 이전의 한국국대 감독들이 너무나 너무나 수준이 낮았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축구가 월드컵 나갈 때 마다 독일을 이기는 등 뭔가 한방씩 보여주는 건 순전히 선수들의 수준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런 게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동안 측면 공격이 잘 안되는 이유가 좌우풀백의 능력이 모자라서인 줄 알았습니다.
아뇨, 알고 보니 좌우풀백의 능력이 모자라서 측면공격이 잘 안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한국축구의 스쿼드를 보면, 다른 포지션에 비해 좌우풀백의 능력치가 문제가 많은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측면 공격이 잘 안 되는 건, 풀백의 능력치 때문이 아니고 전술에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한국 공격수나 미드필더가 하프스페이스(축구장을 세로로 5등분 했을 때 제일 끝 측면 다음 공간)로 침투하면, 상대 중앙수비수는 한국의 중앙 공격수를 막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상대 측면 수비수가 하프스페이스로 침투해 들어오는 한국선수를 막기 위해 딸려들어옵니다.
그러면 그 순간 바로 한국풀백이 상대 측면을 돌진해 파고들어가면, 마크맨이 없어져서 일순간 자유의 몸이 됩니다.
물론 바로 다음 순간 상대 수비수가 커버플레이를 하며 달려들지만, 아주 짧은 순간 자유롭게 크로스를 올릴 수 있는 시간이 한국풀백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 때 올린 크로스가 얼마나 정확하게 날아가는가는 한국풀백의 능력치입니다.(한국풀백의 크로스가 그다지 정확하지는 못하죠.^^;;)
하지만 한국풀백이 자유롭게 크로스를 올릴 수 있는 한 타이밍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감독의 전술의 결과입니다.
벤투는 이걸 하고 있습니다. 벤투축구를 보면 이용이나 홍철이 상대수비의 마크가 떨어진 순간을 이용해 자유롭게 크로스를 올리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명장이어야만 할 수 있는 걸까요?
아뇨, 알고 보니 이것도 유럽의 웬만한 팀은 개나 소나 전부 다 하는 거였습니다.
이란이나 일본이나 호주도 합니다.
우리만 이걸 안 하고 있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측면 공격이 안 되는 것이 전술 문제인 줄 모르고 풀백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착각하고 있었죠.
계속 말씀드리지만, 이런 게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우린 그동안 상대의 역습을 차단하기 위해선 많은 수비수를 배치해야 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좌우 풀백 중 한명은 내려와 있어야 하고, 상대가 강하면 양쪽 풀백 다 올라가지 않는 축구를 하기도 했죠.
상대의 역습이 무서워서 공격 나가는 선수 숫자를 줄이니 공수 간격이 벌어지면서 뻥축구를 할 수 밖에 없는 는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상대 역습을 막는 것도 최대한 많은 수비수로 막는 것이 아니라, 전술적으로 상대 역습을 차단하는 임무를 특정 선수에게 맡겨서 효율적으로 방어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이것도 사실 유럽 축구를 보다 보면 개나 소나 다 하는 거였습니다.
우리만 모르고 있었을 뿐.
예로 들 것이 더 많지만, 글이 길어지니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벤투 반대하는 분들께 한 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벤투가 정말 문제가 있는 감독일지도 모르는데, 그냥 벤투를 경질하기엔 한국축구는 그동안 너무도 능력없는 감독들이 맡아왔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