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트마르 크라머라는 이름을 보고 궁금해졌습니다.
제 '기억'속의 첫 외국인 감독은 비쇼베츠였거든요.
그래서 찾아봣습니다.
이런 감독님도 있었군요.
91년이면 학력고사때문에 모를만도..쿨럭;
크라머가 한국축구에 남긴 것들
[축구저널 - 최규일의 풋볼프리즘] ‘축구 교수’이자 ‘할아버지’였던 크라머 전 올림픽 대표팀 감독
1991년 1월의 어느 추운 날이었다. 훈련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운동장으로 향하던 올림픽 축구대표팀의 스트라이커 곽경근(현 K.K.K.FC 총감독)을 누군가 불러 세웠다. “뭘 하려는 거지?” “개인훈련이요.” “그걸 왜 해? 낮에 다했잖아. 밤에 쉬는 것도 훈련인데….” 별도의 훈련을 칭찬은 못해줄망정 못마땅해 한 이는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이었다.
앞서 1년 전 성인 대표팀은 90 이탈리아월드컵 조별리그에서 3전 전패로 탈락했다. 세계의 벽은 4년 전 월드컵 때보다 높았다. 당시 세계 축구의 대세였던 압박축구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대비해 유능한 외국인 지도자를 데려와 세계축구의 흐름을 따라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쳤다.
한국축구의 첫 외국인 사령탑 크라머는 그렇게 한국에 왔다. 그의 등장과 함께 올림픽 대표팀에 새바람이 불었다. 과학적인 훈련방식에 의한 압박축구, 선수의 심리상태와 스타일에 따른 1대1 맞춤훈련이 도입됐다. 개인 훈련이 사라졌고 단체 훈련 시간도 대폭 줄었다. 선착순이나 맹목적인 운동장 뺑뺑이도 없어졌다. 선수들은 크라머 감독을 ‘축구 교수’라는 별명 대신 그냥 편하게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가 시도한 한국 축구의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총감독인 크라머와 함께 올림픽 대표팀을 이끈 김삼락 감독은 180도 바뀐 대표팀 훈련 스타일이 낯설었다. 사실 ‘집중력 있는 짧은 훈련’을 신봉하는 크라머와 ‘선수 유니폼은 항상 땀이 흥건해야 한다’는 김삼락 감독은 애초부터 맞지 않는 조합이었다.
결국 안팎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한 크라머는 한국이 34년 만에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이뤘음에도 최종예선 직후 한국을 떠났다. 크라머의 실험은 한국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다. 부임 당시 이미 66살의 고령인 그는 자신을 흔드는 주위의 간섭과 홀대에 힘겨워했다. 참모는 아예 없었고 원군도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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