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민이가 절 먼저 와락......”
추위를 많이 타기도 하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요즘이면 날이 더 차다. 집이 있는 곳이 템스강이 흐르는 복스홀 근처라 강바람이 더 차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곳은 이청용이 사는 곳이다.
이청용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잉글랜드 북서부 도시인 맨체스터에서 살았다. 소속팀 볼튼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다 올 초 이사를 했다. 맨체스터하고는 꽤 먼 런던으로 집을 옮겼다. 우리로 따지면 서울과 부산 정도의 거리다. 이적 때문이었다.
이청용은 5시즌 하고 반 시즌을 뛰던 볼튼을 떠나 올 초 남부 런던을 연고로 하는 크리스털 팰리스로 이적했다. 올 1월 호주 아시안컵에서의 부상으로 걱정이 컸지만, 2년 6개월 여 만에 프리미어리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상 복귀 이후 지난 시즌 막판에서야 실전 투입이 가능했던 이청용은 올 시즌 들어 교체 출전으로 몸과 감각을 끌어올리며 반전의 기회를 바라고 있다. 어제 치러진 찰턴전 어시스트 등 리그 컵에서 이어진 2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는 이러한 반전에 의미 있는 흐름이 될 수 있다.
잉글랜드 7시즌 째에 또 다른 도전 앞에 선 이청용이 요즘 팀 동료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손흥민 이야기다. 특히 지난 주말 토트넘과 팰리스의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앞두고는 더했다. 팰리스 선수들로선 상대해 싸워야 하는데 프리미어리그에 새로 건너온 손흥민이 어떤 선수인지 접해보지 못했으니 한국대표팀의 동료 이청용에게 오로지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청용은 손흥민에 대해 에둘러 빠르고 양발 슈팅이 강하다고 했다. 이청용이 뭉뚱그려 설명한 건 팀 동료들을 도와주기도 해야 하지만 후배를 챙기기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중립이었다. 또 선수의 특징을 말로 설명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팰리스 동료들은 이청용의 말을 듣고는 처음엔 반신반의 했다. 직접 부딪쳐 보지 못했으니 감이 없고 말만 듣고는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후배를 에둘러 설명한 이청용
살면서 가장 힘든 무표정
마음은 먼저 와락 안고 있었다
토트넘전 끝나고 인터뷰 하는 이청용
팰리스 동료들의 눈빛이 확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 주말 손흥민의 ‘사건’이 모든 걸 뒤바꾸어 놓았다. 손흥민은 토트넘의 선발 공격수로 나서 공격과 수비 가리지 않고 시종일관 뛰어 다녔다. 그러다 역습 기회에서 엄청난 속도와 양발 드리블에 이은 왼발 마무리 슈팅이 골로 연결되자 팰리스 벤치에 앉아 있던 모든 선수들이 이청용을 바라봤다. '니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이청용은 후배 손흥민의 환상적인 골 장면에 환하게 웃을 뻔했다가 팰리스 선수라는 ‘현실’을 인식하고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표정을 유지하느라 혼났다고 한다. 살면서 가장 힘든 몇 초간의 무표정이었다.
무표정과 같은 곤란함은 경기가 끝나고도 이어졌다. 이청용은 경기가 끝나고 손흥민의 활약을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지켜보는 눈도 있고 해서 라커룸으로 향하는 통로 안쪽으로 들어가 인사를 나누려 했다. 그래서 통로 쪽으로 향하려는데 손흥민이 얼른 다가와 이청용을 와락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이뤄진 일에 이청용은 꼼짝없이 안기고(?) 말았다. 손흥민으로선 형에 대한 고마움과 반가움, 든든함 등이 섞인 애틋함의 표현이었다. 너무나 고마워했다. 이청용도 처음엔 정신이 없었지만, 안고 있던 후배가 너무 자랑스럽고 또 고마웠다. 새로운 환경과 주위 기대 등 부담이 상당했을 텐데 이 모든 걸 이겨낸 후배가 진심으로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또 그렇게 큰 힘이 되었다. 와락 안겼지만, 마음은 먼저 와락 안고 있었다.
손흥민의 등장은 이청용에게도 큰 힘이다. 서로의 가까움을 떠나 기성용에 이은 또 한 명의 재능 출현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한국 선수 전체에 대한 시선과 존재감을 더할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시너지가 가능한 일인 것이다. 당장 잉글랜드 무대에서 뛰는 한국 선수들끼리 버팀목이 될 일이지만, 미래 프리미어리그에서 뛸 다음 세대 재능들에게도 적지 않은 힘이 될 일이다. 먼저 만들어 놓은 길인 것이다.
파듀 감독이 가장 강조하는 건?
같은 조건 아닌 다른 재능
다가오는 일요일 밤의 분수령
첼시전에서 파브레가스와 경합 중인 이청용
올 시즌을 커리어의 또 다른 출발로 만들려고 하는 이청용에게도 큰 힘이다. 경쟁과 반전의 부담과 초조함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청용은 치열한 주전 경쟁으로 시즌 초반 교체 출전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부상에선 완전히 회복했고 감각 등 실전 경쟁력을 풀로 채워야 하는 이청용으로선 시간이 따라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반전의 계기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팰리스가 올 시즌 두 번 치른 리그 컵에 모두 선발로 나서 풀타임 출전, 연속해서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흐름은 긍정적인 신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경쟁과 반전의 심적 부담으로 흔들릴 수도 있는데 런던 가까이에 마음을 터놓고 고민을 나눌 존재가 더해졌다는 건 다른 무엇보다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청용의 말에 따르면 팰리스의 앨런 파듀 감독은 선수의 신체 파워를 무엇보다 강조한다. 유소년 선수부터 1군 선수에 이르기까지 체력과 파워를 끌어올리는 훈련을 강하게 주문한다. 몸싸움이 많은 리그 특징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많이 뛰면서 수비를 강하게 하다 빠른 역습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축구를 선호하는 파듀 감독의 특징이 묻어난 주문이다. 파듀 감독이 팰리스 공격 라인에 볼라시, 펀천, 자하, 바카리 사코 등 힘 있고 빠른 선수들 위주로 배치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청용으로서도 몸에 힘을 더할 고민을 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같은 조건이 아닌 다른 재능으로 주전 경쟁을 이겨낼 생각도 하고 있다. 좋은 조합과 팀이 되려면 다양한 재능이 결합된 형태여야 한다. 같은 재능만으로 묶이면 투박하고 단순해질 수 있다. 서로 다른 다양한 능력과 재능이 결합할 때 그 조합과 팀은 더 강해질 수 있다. 파듀 감독은 실제 중앙 미드필드 라인은 다르게 구성하고 있기도 하다. 파워풀한 예디낙 대신 패싱력과 기술이 뛰어난 조합인 카바예-맥아더 라인을 중용하는 파듀 감독이다. 이청용이 파고들 포인트도 여기에 있다. 다른 공격수들이 갖지 못한(혹은 부족한) 경쟁력으로 싸워야 한다.
기존 선발 위주의 팀이 흔들리거나 순위가 추락하면 반전을 위한 라인업 등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시즌 초반 기복을 타고 있는 팰리스의 흐름을 볼 때 팀 전술과 분위기 전환을 위한 선택이 곧 따를 공산이 크다. 이청용에게 머지않은 시간 내 반전의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분석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리그 2경기에서 연패 중인 팰리스의 이번 주말 일요일 왓포드전은 선발 라인업 등 일대 흐름 변화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결과에 따라 라인업과 전술 형태가 달라질 수 있는 전환점이다. 팰리스 시즌 초반 행보의 분수령인 동시에 이청용 반전의 승부처인 것이다.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될까?
이청용으로선 기회가 온다면 지난 주말처럼 와락 안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