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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1-26 04:28
[잡담] 70~80년대 초에도 한국 축구를 아시아 축구의 맹주라고 언론에서 떠들었던 근거가 무엇일 거라 보시나요?
 글쓴이 : 심미안
조회 : 1,838  

그게 그 당시까지 아시안컵의 통산 성적 때문입니다. 월드컵 진출 횟수 때문에 쓴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호주가 AFC를 이탈하고 아시안컵 2회 우승국인 이란을 넘어서야 할 버거운 상대로 다뤘고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에는 쿠웨이트를 아시아에서 넘어야 할 강국으로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오일 머니로 급성장한 카타르 등의 중동 세가 대단했습니다.


84년 싱가포르 아시안컵을 다루는 당시 언론들은 개인기 좋은 중동의 모래바람을 유일한 동아시아 출전팀인 아시아의 맹주 한국이 조직력과 기동력만으로 버텨낼지 걱정이라서면서 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위협받는다고 했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자력으로 진출한 건 86년도 대회 때입니다. 그전에는 이스라엘, 말레이시아, 호주, 쿠웨이트 등에 막혀서 진출을 못 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아시아 대회에 출전하고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아시아에는 우리보다 항상 강하고 잘하는 팀이 2~3팀 이상은 존재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아시아에서 강했던 시기는 89~90(가장 막강했던 시기), 94~95, 2002~2003, 2010~2011년 정도입니다. (86~88<사우디가 백지장 한 장 차이로 우세>)


96년 12월에 열린 두바이 아시안컵 대회는 월드컵 유치에 나선 우리나라가 우승을 목표로 출전한 팀입니다. 어떤 팀이나 우승을 목표로 나가겠지만, 우리나라가 아시안컵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분들이 있기에 굳이 저런 표현까지 쓰는군요.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할 목적으로 협회에서 해외 원정을 추진합니다. 그 해 3월 수케르, 복시치 등의 특급 선수가 버티는 크로아티아와 원정 경기를 했는데, 진흙탕 수중전으로 친선 경기인데도 일진일퇴의 혈전을 벌였습니다. 비록 0대3으로 졌지만, 공수 전개 발란스가 좋고, 템포가 빠른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골대도 맞추고 골과 다름없는 상황을 두 번이나 만들 정도로 상당히 날카로운 공격력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다시 4월에 이스라엘 텔이비브로 또 원정을 가서 5대 4 승리를 합니다.



¶1996- 3월 두바이 4개국 친선경기


1996-04-30 이스라엘 친선 경기 이스라엘 대표 5-4승 김도훈, 유상철,신태용,황선홍(2골) 


1996-05-16 잠실 친선 경기 스웨덴 대표 0-2패 


1996-05-24 잠실 친선 경기 AC밀란(이탈리아) 3-2승 서정원,고정운,황선홍 


1996-05-27 잠실 친선 경기 유벤투스(이탈리아) 4-0승 서정원,고정운,유상철,하석주 

1996-06-01 수원 친선 경기 슈투트가르트 3-4패 서정원,노상래,김도훈 ¶



그 해는 올림픽 경기, 아시안컵 예선도 있고, 대표팀 경기가 많았던 시기인데, 유럽 원정이라는 무리한 일정을 추진해서 선수들의 컨디션에 문제를 일으켰다고 협회가 언론의 질타를 받았고, 대표 선수들의 불평이 심하다고 언론에도 나왔었죠.


여러 곡절을 거치고 96년 아시안컵에 참가하지만, 선수들의 컨디션 문제로 선수 선발 때부터 말도 많았는데, 대회 도중에 선수들의 음주, 태업으로 이란전 대패의 망신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축구 야사 2부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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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ram입니다 15-01-26 04:45
   
음 ........출동 인가............
하무드 15-01-26 05:43
   
음..96년에 텔아비브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의 친선경기를 관람했었는데 ,벌써 19년전 이야기네요..
암튼..그때당시 이스라엘에 5대0으로 이기고있었는데 , 친선전이기도하고 점수가 너무차이가 나서인지
골키퍼를 포함해 거의 7명이상을 교체했었습니다.. 그이후로 결국 5대4까지 점수차가 좁혀지긴했었는데..
그걸보고 ,이스라엘 친구넘이 하는 말....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역전할수있었는데 너무 아쉽다...이러더군요.
기가 차고 코가 막히는 얘기였죠...
호호호호 15-01-26 05:58
   
심미안님같은글이 많아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ram입니다 15-01-26 06:17
   
아직 ..도  주무시지도... 않고....

짠한 마음도 들고....찡~합니다

식사는 하고  있지요..그래요    쉬엄 쉬엄...건강도 생각 하셔야죳
왠튼 포인트 감사 ...꾸준한 글...부탁합니다    냠냠
          
호호호호 15-01-26 06:45
   
님도 안주무시는듯 여기 안자고 글쓰거나 눈팅하는분 많아요 ^^
핫초코님 15-01-26 06:08
   
음 딴지는 아닌데.. 비슷한 시대에 축구를 보신듯 한데..기억이 전혀 다르군요..
한국 축구가 아시아의 맹주...아시아의 강호라고 자칭한 건..
이른바 아시아 3대 컵인 메르데카..킹스컵..박스컵에서의 선전 때문일 텐데요...
물론 일본은 박스컵을 빼고 기린컵을 넣을 테고....
게다가.. 그 당시 아시아라고 자칭한 건 중동을 뺀 것이죠...
7-80년대 동안 5회의 아시안컵이 개최됐고.. 이란이 두번.. 사우디가 두번 쿠웨이트가 한번 우승했으며..
한국이 세번 준우승을 했습니다만...중동의 모래바람은 강력했지요..
그리고 그 당시 아시아의 맹주라는 건... 우리 언론이 자칭한 한 것이죠..지금 일본이 하는 것처럼 말이죠..
     
심미안 15-01-26 06:36
   
그 자칭한 근거가 이란이 우승을 3번했지만, 80년까지 우리나라는 7번의 아시안컵에서 우승 2회, 준우승 2회, 3위 1회로 통산 성적은 가장 좋습니다. 그냥 자칭한 게 아닙니다.
          
핫초코님 15-01-26 06:41
   
죄송합니다만..거듭 말씀드리다시피...아시안컵 성적으로 자칭한 게 아니라..
언론사 누구에게 물어도 아시아3대컵 플러스 멕시코 청소년 대회로 자칭한 겁니다....
86년부터는 월드컵 본선 진출로 자칭한 것이고요..
               
심미안 15-01-26 06:46
   
아! 정말 할 말이 없네요.
핫초코님 15-01-26 06:33
   
한가지만 더 정정을 해 드리면..96년 아시안컵 당시에는 이미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가
확정된 다음입니다..
때문에 대표팀 강화를 위해 최정예를 가동하기는 합니다만... 대한축협은 96년 대회부터
아시안컵을 월드컵예선 준비용 대회로 활용합니다..
당시 박종환 감독에게 아시안컵 성적 여하에 따라 월드컵 예선을 맡기겠다고 했고요..
말씀하시는 바와는 좀 다르게..당시 축협의 모든 촛점은 두달 후에 시작되는 월드컵예선에
맞춰져 있었고요.. 아시안컵은 그저 손발을 맞춰보는 대회였죠...
이 전통은 지금 현재 대회까지 이어집니다.. 대한축협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건 말건 큰 관심 없습니다..
주요 관심은 감독부임 후 얼마 안된  팀을 리빌딩하는 데에 있지요....
물론 목적은 곧 시작될 월드컵 예선전이고요..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하면...축협 폭파 당합니다..
스폰서는 모두 떨어져 나가죠....
     
심미안 15-01-26 06:45
   
월드컵 유치 국가 선정은 그해 6월에 확정 발표되었지만, 이미 아시안컵 예선은  전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아시안컵이 월드컵보다 비중이 낮고 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축협이 우승에 관심이 없다니요? 그런 근거가 조금이라도 성립하려면 박종환 감독을 해임할 이유가 없지요.
          
핫초코님 15-01-26 07:24
   
그냥 가려다가 딱 한마디만 더 말씀드리고 가면요...

제 연배이거나 더 많으시다면.. 대한민국에게 있어서 월드컵이란...
축구 그 이상의 회한과 통한의 역사이며....
도전과 극복의 역사이고... 일본을 통하지 않고 세계와 마주하는 유일한 창이었다는
사실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겁니다...

목발크로스로 불리는 차두리에 열광하는 이유는
하지장이 짧아요...머리 하나가 커요..아...다리에 쥐가 납니다..신장과 체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합니다..아 안타깝습니다... 때문입니다...
한때 비쇼베츠 감독을 불러서 올림픽팀을 오로지 체격 위주로만 뽑은 적도 있지요..
차두리는 뭔가 우리가 세계와 맞선다는 상징적인 아이콘이죠...

50년대에도 그러했지만..86년도부터 시작된 월드컵 역사는 쪽팔림의 연속이었죠...
선전했습니다....라고는 했지만 외신은 늘 한국팀을 비웃었고..마라도나는 조롱했죠..
98년조차도 벨기에 선수들은 한국 취재진을 당구장에서 만나며.. 비웃었죠..

한국 월드컵의 역사는 한국인의 이름으로 세계에 부딪히는 역사입니다...
때문에 한국의 월드컵에 대한 집착은 젊은세대분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해방 후 조차도 일본의 그늘에 가려서.. 일본을 통해야만 세계로 접촉하던 한국이
독자적으로 세계와 부딪히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한국 기업과 노동자들의 역사와..
한국 월드컵 도전사는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일본이 뭐라건 아시아축협이 뭐라건.. 대한축협의 A대표팀에 대한 목표는
오로지 한가지입니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것이고..이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죠..
그게 한국이 아시안컵을 등한시한 이유이고..그저 준비용 시험대 정도 취급한 이유죠...
               
more 15-01-26 09:18
   
본인생각을 팩트처럼 말씀하시네요
               
아까그넘 15-01-26 12:09
   
진짜 이건 원 미..
사이코패스도 이렇게는 안지어내겠다.
하얀그림자 15-01-26 09:41
   
96년 아시아컵 분위기는 " 우리가 관심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한번 마음만 먹으면 이번엔 들어 올릴 수 있다"라는 분위기 였었죠
박종환 감독도 감독으로서 프랑스  월드컵 출전을 위해 와신상담하던  시기였죠
(박종환은  김호 이회택 김정남 차범근등 이른바 축구엘리트들에게 중요고비(월드컵 올림픽등)에서  감독직을 빼앗깁니다... 즉  83년 청소년 대회 이후 인기에 비해 뚜렷한 업적이 없음.... 저는 개인적으로  박종환 감독의 엘리트 선수에 대한 장악력도  의심하고 있음 실제로 홍명보가 반기를 들기도 했고....)
이란전 후반은 그야말로 컨디션과 체력의 난조가 극에 달했다고 그러더군요
     
심미안 15-01-26 14:04
   
당시에는 축구 인맥이 부족했던 경희대 출신에 무명 선수 출신인 박종환 감독을 연,고대 한양대 출신들이 상당히 무시했었죠. 이란전 전날 음주를 하고 뛰었으니 후반에 체력적으로 버틸 수가 없였죠.
고구려만세 15-01-26 09:43
   
80년대는 오일머니로 심판매수해서 우리 국대가 억울하게 비기거나 진경기가 많앗죠. 티비 시청하면서 울분을 토한게 한두번이 아니랍니다.
     
심미안 15-01-26 14:01
   
맞습니다. 특히, 80년 쿠웨이트 아시안컵에서 억울한 판정이 많았죠. 예선에서 당시 우승국인 쿠웨이트를 상대로 한국이 어려운 경기를 할 거라고 누구라고 할 것이 없이 예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자 골잡이 정해원이 맹활약하고 일방적인 경기력으로 3대0으로 우리 대표팀이 승리합니다.

그리고 두 팀은 결승에서 다시 만났는데, 심판이 너무 일방적으로 홈팀에 유리한 편파 판정을 하기 시작했죠. 결과는 0대3으로 패배를 하게 됩니다. 만약, 그 대회가 쿠웨이트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했다면 우리나라가 우승했을 가능성이 높았던 대회였죠.
내가소라니 15-01-26 17:10
   
70년대 이전은 호주, 이스라엘 이런 팀들이 있을 때라서 최강, 맹주라는 말을 안썼습니다.
80년대 이후 호주, 이스라엘이 빠지고 어느 정도 아시아에서 성적을 거두고
특히 84년 청대 4강진출과, 86년부터 월드컵 단골이 되면서 아시아 강자라고 자칭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최강이라는 표현보다는 강자라는 표현을 잘 썼죠.
맹주도 여러번 월드컵 진출하면서 장기간 동안 정상자리에 있다고 하여 쓴거죠.
80년대 중반부터는 타대륙으로 빠진 나라도 있고 동남아국가들이 점점 상대가 안되고
중동에게도 전적이 좋아지면서(여전히 빡세긴 했지만) 아시아 강자라고 스스로 칭하게 됐죠.
70년대말 차범근이 있는 축대부터 몇개의 자그마한 대회를 석권하고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남북분단이 된 상황의 정부나 언론이 자화자찬을 심하게 하는 풍조일 때 쓰긴 했는데
진정한 강자로 군림하게 된 건 80년대부터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