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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7-18 08:41
[정보] 모든 감독들이 탐냈던 ‘일류참모’ 정해성
 글쓴이 : 삿짱
조회 : 1,419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707071662580800

정해성(59)은 축구판에서 ‘의리의 남자’ 혹은 ‘뚝심의 사나이’로 통한다.

지난 4일 울리 슈틸리케(63ㆍ독일) 전 감독의 뒤를 이어 신태용(47)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에 선임되자 정해성은 바로 다음날 대한축구협회를 찾아 수석코치에서 사퇴했다. 지난 4월 벼랑 끝에 몰린 슈틸리케호의 수석코치로 긴급 투입된 지 불과 석 달 만이었다. 그는 내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까지 계약이 보장돼 있었다. 미적미적 자리를 지켜 잔여 연봉 중 적지 않은 돈을 보상금조로 받고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자 뻘인 신 감독이 편한 마음으로 코치를 물색할 수 있도록 미련 없이 물러났다

정해성은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럭키금성 선수로 뛰었다. 1986년 후반기부터 주장도 맡았다. 그 때는 프로 6년 차가 되면 재계약금 3,000만 원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아파트 한 채 값이 4,000만 원 안팎이던 시절이다. 1989년을 마치고 번듯한 집 한 채 사려던 그의 꿈은 “1년 더 뛰면 뭐하나. 은퇴하고 지도자를 해라”는 구단의 권유로 물거품이 됐다. 지금 같으면 재계약금을 안 주려는 ‘꼼수’로 난리가 날 법 했지만 정해성은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못내 미안했던 구단은 이듬 해 말 그에게 격려금으로 2,000만원을 내밀었다. 정 감독은 “돈은 됐으니 공부 좀 하게 해외 좀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1992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8개월 연수를 하고 돌아온 뒤 2군 코치로 선수들을 조련해, 1군 코치로 승격했다. 1993년 고재욱(66) 감독이 경질되자 구단은 정해성에게 “감독대행을 맡아라”고 했다. 스승 자리를 꿰차고 앉을 그가 아니었다.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이후 정해성은 박성화(62) 유공 감독 아래서 스카우트를 했다. 1군 코치까지 지낸 그에게 스카우트는 성에 차지 않는 자리일 수 있었지만 묵묵히 ‘보석’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당시 프로축구 포항 사무국 직원이었던 안기헌 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는 “다른 스카우트와 달리 부지런하고 꼼꼼하게 메모하며 선수를 살피던 모습이 선하다”고 했다. 안기헌 전무는 2013년 정몽규(55) 축구협회장이 취임해 첫 집행부를 꾸릴 때 “다른 맘 안 품고 우직하게 일만 할 사람”이라며 정해성을 경기위원장, 심판위원장 등 요직에 연이어 천거했다.

정해성은 고재욱과 박성화 외에도 국가대표와 프로에서 박종환(79), 이회택(71), 허정무(62) 등 한국 축구를 주름 잡은 인물들을 코치로서 보좌했다. 하나 같이 개성 강하고 대가 센 감독들도 ‘코치 정해성’은 신뢰했다. 그가 평소 감독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면서도 진짜 필요할 때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참모였기 때문이다. 또한 정해성은 선수들로부터 신망이 컸다. 선수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코치인 동시에 가장 믿고 따르는 선생님이었다. 2002년 한ㆍ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쓴 거스 히딩크(71ㆍ네덜란드) 감독도 선수 관리는 정해성 코치에게 일임했다.

정해성은 모시고 있던 감독이 물러나 지휘봉을 물려받을 기회가 몇 번 더 있었지만 그 때마다 거절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후 허정무 감독이 연임을 고사한 뒤 축구협회가 제안한 국가대표 사령탑 자리도 마다했다. 정해성이 ‘의리’를 지킬 때마다 가장 힘든 건 그의 아내였다. 그의 아내는 정해성이 구단에서 나와 ‘백수’일 때 보험영업을 하며 살림을 책임진 적도 있다.

정해성은 분명 ‘일류감독’은 아니었다. 프로축구 제주(2004~07)와 전남(2010~12)을 맡아 뚜렷한 성과를 내진 못했다. 하지만 ‘일류참모’가 누구냐고 물으면 축구인 열에 아홉은 그를 꼽을 정도다.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1990년부터 27년 동안 공백기를 다 합쳐도 2년 남짓이다. 정해성은 “운이 좋았다.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몸을 낮추지만 그건 단순한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다. 책임감과 의리, 헌신으로 무장한 그를 감독들이 탐내고 놔주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7/27/2010072701253.html

[SC 페이퍼진] 잊을 수 없는 순간들 : 정해성 '눈물의 축구인생'
스포츠조선= 최재성 기자
입력 2010.07.27.

대학때 불량배 분풀이에 중상…태극마크 날려
고1 나이에 충북 시골 초등교 부정선수로 출전
 
#1. 소년체전 우승 주역

유괴를 당한 적이 있다. 새총 만들 고무줄 준다는 말에 졸래졸래 따라갔다가 알몸이 됐다. 대여섯 살 때로 기억한다. 먹고 사는 게 큰 걱정거리였던
60년대 초반에 구경조차 하기 힘든 고가의 외제 옷을 입었으니 '나 데려가슈' 하고 광고한 거나 다름없었다. 어설픈 유괴범은 다행히 옷만 벗겨
갔다. 그 시절 부산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아버지는 지프를 몰고 다녔고, 어머니는 폴크스바겐을 탔다. 운수업, 청과조합, 양조장 등 벌여놓은
사업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부산에서 유통되는 과일과 채소를 그 청과조합에서 다 주물렀다니 말 다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수완과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를 나온 어머니의 시류를 읽은 감각이 이뤄낸 성공이었다.

한데 운수 쪽에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버스와 택시기사들이 툭하면 사고를 치는데 보험이 정착되지 않은 시절이라 번번이 현금으로 틀어막아야
했다. 그렇게 끝도 없이 뭉칫돈이 빠져나가면서 기둥이 흔들렸고, 그예 바닥을 보고 말았다.

"5학년이 되던 해에 집안이 다 망가져 서울로 올라왔어요. 저는 서울교대부설초등학교로 전학했고요. 그런데 국어시간이 되면 저한테만 책읽기를
시키는 거예요. 서울말 배우라고. 그때 스트레스 많이 받았습니다. 공부가 싫고, 교실도 싫어지더라고요." 몸이 참 날렵했다. 특히 가을 운동회는
독무대였다. 마침 교감 선생님의 권유도 있어 핸드볼을 시작했고,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6학년 때는 서울시대회에서 우승을 이끌며 MVP에 오르기도
했다.

한영중에 입학하니 럭비에 씨름부까지 다 있는데 하필 핸드볼팀이 없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축구는 죽어도 안 된다는 아버지 엄포에 야구를 시작했는데
통 재미가 없었다. 시키는 거라고는 공 줍기와 베이스러닝이 전부였다. 몇 달이 가도록 방망이 한 번 못 잡아 봤다. 이게 무슨 운동인가 싶어
6개월 만에 걷어치웠다. 키 작고 몸도 작아 농구나 럭비는 어림도 없었다. 이래저래 따져 보니 할 거라고는 공부밖에 없었다. 그러나 갑갑증이
나 책상머리에 붙어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2학년 말 아버지 몰래 축구부에 들어갔다. 귀가가 늦을 때마다 공부 핑계를 댔고. 키는 작았지만,
기술은 좋았다. 꼬박 1년을 눈여겨본 한영고 감독이 "1년 쉬면서 연습 더 하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 바람에 아버지께 이실직고하고 1년
유급을 허락받았다. 뒤이어 감독이 제안한 게 소년체전 충북 초등부 예선 출전이었다. 친구인 옥천 죽향초등학교 감독이 선수 지원을 요청했던 모양이다.
어디 없이 부정선수투성이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못 알아볼 테니 예선만 통과시켜 주고 오라고 했다. 대전 근처라는 얘기만 듣고 동기 둘과 함께 그 학교 감독을 따라나섰다. 폭설을
뚫고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를 번갈아 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사택으로 들어서니 입이 쩍 벌어졌다. 뒤는 산, 앞은 밭. 외딴 초가였다. 감독이
거둬 키우는 4학년짜리 꼬맹이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하고 있었다. 그날 바로 사고를 쳤다. 군불 땐답시고 있는 나무 아궁이에 다 털어넣는
바람에 구들이 달아 장판에 이불까지 탔고, 엉겁결에 문 밖으로 던져둔 이불에 불씨가 살아 마루까지 다 태워 먹었다. 절절 끓는 방에서 밤새
이마 맞대고 수군거리던 동기 녀석 둘은 이튿날 보따리 챙겨 도망쳤다. 이제 초가에는 감독, 부정선수, 꼬맹이 이렇게 셋만 남았다.

"그날부터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밥도 짓고 하면서 살았죠. 낮에는 연습하고요. 예선에 나갔더니 정말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학교는 안 다녔지만,
나이로 치면 고1 아닙니까. 그 예선에 최순호도 나왔어요." 승승장구 끝에 예선을 통과했다. 들통나면 큰일이라 애당초 본선에는 안 뛰기로 했는데
욕심이 생긴 감독이 이판사판 밀어붙여 기어이 우승컵을 따냈다. 다들 결승 헤딩골 넣은 친구가 초등학생치고는 많이 삭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부정선수일
거라는 의심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고2때 가출 다방서 일해
 
 #2. 어려서 산전수전 다 겪고

죽향초 감독 주선으로 대구 계성고에 입학했다가 달포 만에 줄행랑쳤다. 하루가 멀다고 엉덩이에 불이 나니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동기가 선배가 된 한영고는 영 내키질 않았다. 그 길로 죽향초 감독을 찾아가 서울로 보내달라고 했더니 중앙고에다 줄을 댔다. 20여 명이 몰린

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하고 입학 절차를 밟았다. 한데 서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허겁지겁 대구와 죽향을 오가다 흘린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또

1년을 쉬었다. 적도 두지 않은 채 팀에 합류해 훈련만 하며 1년을 보내고 이듬해 입학했다. 축구부원들과의 관계가 참 묘했다. 3학년은 원래

동기, 2학년은 훈련 동기, 1학년은 입학 동기였다.

그래선지 선배들이 유독 못살게 굴었다. 너무들 볶아 대니 견딜 수가 없어 학교와 축구를 다 포기하고 말았다. 2학년 후반이었다. 집까지 뛰쳐나와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종로2가 다방에 들어가 걸레질도 하고 심부름도 했다. 축구 접은 건 아쉬워도 복장은 편했다. 그러나 수시로 다방에 들락거리며

학교 소식을 전해 주던 친구의 배신으로 그 생활도 얼마 안 가 막을 내렸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들이닥친 것이다. 다음날 학교에 가 한 달 근신

처분을 받았다. 8교시 수업 다 받고, 훈련 때 골대 뒤에 열중쉬어 자세로 구경하는 게 벌이었다. 근신 끝나는 날 감독이 다 있는 데서 말했다.

"해성이, 내년에 주장해."

완장 차고 팀을 이끌던 77년 고교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중앙고 축구부 70년 역사에 유일한 타이틀이다.

그 우승에도 곡절이 많았다. 대회를 앞두고 건국대에서 가진 전북체고와의 연습경기서 0대2로 완패했다. 군기 좀 잡을 요량으로 '학교 가서 집합하라'고

했더니 겁을 집어먹은 1~2학년들이 버스 정류장에다 공을 팽개쳐 두고 몽땅 도망가 버렸다. 강촌에서 놀다가 1주일 만에 돌아온 녀석들에게 "선수권대회

결과 보고 얘기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죽자사자 뛰어 우승컵을 따낸 것이다.

어려서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공 하나는 잘 찼다. 고교랭킹 2위였으니 스카우트 쟁탈전은 예견된 일이었다. 특히 공사와 고려대가 극한의 줄다리기를

벌였다. '선수 둘을 추가로 받아주겠다'는 조건을 내건 공사는 아버지를 납치하다시피 해 입학 동의를 얻어냈지만, 고려대는 어머니의 오케이 사인을

받은 후 모자를 부산으로 피신시켜 공사 입학시험 날짜를 넘겨 버렸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속인 꼴이 됐지만, 결론적으로는 어머니의 판단이 옳았다.

며칠 후 전군에 '스카우트 금지령'이 내린 것이다. 하마터면 고려대도 못 가고 공사 입학도 취소될 뻔했다.


중환자실서 깨어나자 마자 "먹을 것 달라"
 
 #3. "배고파요. 밥 주세요"

2학년 때 김정남 감독이 팀을 맡았고, 때를 같이해 중앙 미드필더에서 오른쪽 풀백으로 내려앉았다. 그해 말 A대표팀 화랑의 지휘봉을 잡은

김 감독이 따로 부르더니 "춘계연맹전 끝나고 합류하게 될 테니 대표팀 준비하라"고 했다. 이듬해 춘계연맹전 첫 경기를 가볍게 이기고 창경원으로

벚꽃놀이 갔다가 저녁에 학교 앞에서 연세대 선수들과 맥주 파티를 벌였다. 그날 그 자리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화장실 갔다 오다가 바깥이 시끌시끌해 나가보니 연대 친구가 동네 불량배와 시비가 붙었더라고요. 간신히 말려 놨더니 또 으르렁대길래 안 되겠다

싶어 연대 애들 보내고 자리를 정리했죠. 그리고 맨 나중에 숙소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통수가 후끈하더니 뜨끈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돌아보니 그 불량배였다. 눈이 뒤집힌 그는 뒤통수 갈기면서 깨져나가고 남은 병 주둥이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복부를 향해 마저 휘둘렀다. 그의

팔목을 잡고 죽기 살기로 버텼으나 이성 잃은 야수를 당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불량배는 그렇게 잔인하게 분풀이를 하고 달아났다.

안쪽까지 깊게 찔린 옆구리를 손으로 틀어막은 채 택시 잡아타고 고려대부속병으로 날아갔다. 억세게 운수 사나운 날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운 좋은 날이기도 했다. 그날 마침 인근 성균관대에서 데모하는 바람에 의사들이 비상대기하고 있었고, 기다렸다는 듯 세 명이서 달려들어 넘어가는

숨을 붙든 것이다. 눈을 뜨니 허기가 져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의사가 눈에 띄어 밥 좀 달라고 했더니 "세상에 가느냐 마느냐 하는 중환자실에

누워 밥 달라는 놈은 너밖에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곳곳에 자상이 컸고, 위에는 구멍까지 나 꼬박 8개월을 병원에서 지냈다. 사고도 여간

큰 사고가 아니었으니 선수 명단에서 지워진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바람에 김 감독은 사표를 던졌고.

81년 1월 1일. 정초부터 폭설이 내렸다. 병원에 오래 누워 있었고, 퇴원해서도 회복에 신경 썼더니 몸이 가뿐했다. 그래서 안암동 하숙집을

나서 미아리까지 한 바퀴 뛰어 봤다. 괜찮았다. 곧장 의사를 찾아가 체크 좀 해 달라고 했더니 "조깅은 괜찮은데 무리하면 안 된다"고 했다.

됐다 싶어 학교 체육위원회를 찾아갔으나 사람 취급을 안 했다. 그 자리에 꼬박 1주일을 꿇어앉아 공 차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결국, 학교에서

손을 들었다. 1년 쉬었다고 그 실력 어디 갈까. 5월에 일찌감치 제일은행에 스카우트돼 촉탁사원 발령을 받았고, 얼마 후 첫 봉급 18만원도

받았다. 그해 전국체전 우승이 학교를 위한 마지막 봉사였다.


"의리-책임감-실력 있다" 코치직
러브콜 잇달아…
 
 #4. 쓸만한 참모

제일은행에서 2년 보내고 83년 말 프로팀 럭키금성에 입단해 여섯 시즌을 뛰었다. 특히 준우승한 89년엔 32게임 중 28게임에 출전했고,

수비수로 1골-2어시스트라는 플러스 알파까지 기록했다. 연봉 인상 요인이 가득했다. 그해 연봉이 2800만원이었으니 50%만 올라도 1400만원이

떨어지는 데다 규정상 6년차에겐 재계약금 3000만원이 자동으로 붙게 돼 있었다. 당시 4400만원이면 아파트 한 채였다. 어이없는 사고로

태극마크 날리고 병원에 누워 있을 때만 해도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한데 연봉 협상을 코앞에 두고 고재욱 감독이 부르더니 잘라 말했다. "2군리그도 생겼는데 은퇴하고 코치나 해라." 그 정도면 윗선에서 이미

결론났다는 얘기다. 이튿날 구단에서 내민 코치 계약서를 보는 순간 속에서 불덩이가 확 솟았다. 2200만원. 아파트가 날아간 것만으로도 환장할

판인데 600만원 깎이기까지 했다. 울화통이 터져 구승회 단장에게 한마디 했다. "돈은 제대로 주고 일 시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단장이 받았다. "생활비 모자라면 와. 내 돈 줄게."

지도자 첫해인 90년 2군을 맡아 꼴찌 했다. "그때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어차피 세월 가면 최순호 최강희 이태호 같은 친구들하고

경쟁해야 하는데 여건도 안 되고 국가대표 10년씩 한 친구들한테 명성에서도 뒤지니 지도자 하려면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거죠." 꼴찌를

했는데도 단장이 부르더니 격려금 2000만원을 내놨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봉투를 밀어내며 "돈 필요 없으니 공부 좀 시켜주세요" 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단장이 "허허, 이놈 봐라. 돈을 마다하고 공부시켜 달라네" 하더니 분데스리가 연수 코스를 뚫었다. 그렇다고 손 부끄럽게 내민

봉투 되집어넣을 단장이던가. 2000만원까지 챙긴 건 당연지사. 92년 FC한자로스톡→샬케04→보훔을 돌며 8개월을 보내고 10월에 귀국했다.

첫 시험무대인 아디다스컵 경기에 무명의 2군 연습생들을 데리고 나가 정예 멤버의 유공을 4대1로 두들겼다. 그 바람에 1군 코치로 올라가

93년 준우승에 힘을 보탰다. 그해 겨울 1급 심판교육을 받다가 난데없는 호출을 받고 구단 사무실로 들어갔다. "고 감독 경질됐으니 감독대행을

맡으라"고 했다. 순간 '의리본색'이 발동해 그 자리서 사표를 던졌다. 설마 식구들 밥 굶기겠나 싶었다. 심판 자격증도 땄겠다, 곧장 춘계중고연맹전에

뛰어들어 휘슬을 불었다. 그 즈음 박성화 유공 감독의 요청으로 스카우트 일도 겸했다.

박 감독을 시작으로 지휘봉 잡는 사람마다 정해성을 찾았다. 의리 있고, 책임감 강하고, 실력까지 갖췄으니 참모로는 제격이었던 것이다. 95년

포항 코치(허정무 감독)→96년 A대표팀 트레이너(박종환 감독)→96~98년 전남 코치(허정무 감독)→99~2000년 올림픽대표팀 코치(허정무

감독)→2001~2002년 월드컵대표팀 코치(히딩크 감독)→2003년 전남 코치(이회택 감독)→2004~2005년 부천 감독→2006~2007년

제주 감독→2007년 12월~2010년 7월 월드컵대표팀 코치(허정무 감독). 21년간 지도자 생활을 해 오는 동안 공백이라고는 교체시기에

잠깐씩 쉰 6개월이 전부다. 모든 감독이 탐을 낸 참모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92년 첫 인연 허감독이 부르면 언제 어디서나 'OK'
 
 #5. 허정무 감독과의 끈

프로 첫해 현대와의 2차전에서 실수 하나 했다고 무려 8개월 동안 출전선수 명단에서 빼던 박세학 감독이 시즌 종반 현대와의 안동 경기를 앞두고

불렀다. "괜찮냐." "기회만 주십시오." "허정무 잡아." "네." 선뜻 대답은 했지만, 답이 안 나왔다. 네덜란드에서 갓 돌아와 펄펄 나는

그를 어떻게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밤새 고민하다 결론 내렸다. '방법 없다. 그냥 부수자.' 휘슬 울리기 무섭게 달려들어 차고, 밟고, 찍고….

0대2로 졌지만, 그날 이후 베스트 멤버로 올라앉았다. 허 감독은 지금도 가끔 발을 까 보이며 "그날 너한테 밟혀서 생긴 흉터"라며 핀잔을

주곤 한다.

분데스리가에서 연수중이던 92년, 포철 코치로 있던 허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스웨덴에서 열리는 유럽컵을 함께 보러 가자는 제안이었다.

그냥 축구계 형님이었던 허정무와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자동차를 빌려 보름 동안 쏘다니며 멋진 경기도 많이 봤지만, 서로의

좋은 점도 많이 봤다.

유공에서 스카우트 일을 하고 있던 94년 여름 허 감독이 다시 찾았다. "나이가 몇인데 스카우트 하냐." "할 게 없으니까요." "내년부터

나하고 할래." "저야 고맙죠." 이렇게 둘은 한배를 탔고, 95년 포항 준우승, 96~98년 전남 22경기 연속무패, 2000년 시드니올림픽

조별예선 2승1패 등의 업적을 쌓으며 국내 최고의 지도자 라인을 만들어 갔다.

허정무는 자신이 지휘봉을 놓을 때마다 정해성으로 하여금 다른 지도자 밑에 가서 공부할 기회를 줬고, 정해성은 자리를 잡고 있다가도 허정무가

부르면 수판알 튕기지 않고 달려갔다. 그 마지막 결합이 2010년 남아공월드컵이었다. 2007년 11월 제주 감독직을 사퇴하고 나이 쉰에 영국으로

축구 유학을 떠났을 때다. 런던에 머물며 인터넷 뒤져 집 구하고, 중고차 알아보며 틈틈이 동창들 만나 골프도 즐겼다. 모처럼 만의 여유였다.

그러나 천생 두 다리 뻗고 쉴 팔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런던에 발 딛은 지 28일째 되는 날 허 감독이 전화를 걸어왔다. "들어와." 대답도

간단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제 막 인생의 새 항로로 노를 젓기 시작한 이를 부르는 사람이나 부른다고 그 자리서 뱃머리 돌리는 사람이나

참 그 감독에 그 코치다. 한국의 사상 첫 월드컵 원정 16강의 역사는 그렇게 출발했다.

정해성 프로필
 
출생: 1958년 3월 4일(부산)

학력: 서울교대부설초등학교→한영중→중앙고→고려대

선수경력: 82~83년 제일은행, 84~89년 K-리그 럭키금성
주요경력: 90~93년 럭키금성 코치, 94년 유공 스카우트, 95년 포항제철 코치, 96년 A대표팀 트레이너, 96~98년 전남 코치, 99~2000년 올림픽대표팀 코치, 2001~2002년 월드컵대표팀 코치, 2003년 전남 코치, 2004~2005년 부천 감독, 2006~2007년 제주 감독, 2007년 12월~2010년 7월 월드컵대표팀 코치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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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1004 24-07-18 10:44
   
뭘 어쩌라고?

왜 옛날에 못 챙겨서 이제 좀 땡길라고 했는데 후배들이 막는겨?

이제 대한민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좀 쉬시라고 그래!

대한민국 축구는 알아서 자알 돌아갈테니깐.
무한용병 24-07-18 11:25
   
뭐여... 대통령이라도 당선 됐나?

그는 누구인가??? 뭐 이런거?
솔직히 24-07-18 12:52
   
이 색히도 고려대 라인이네. 땅명보 밀은 색히가 이 색히인듯.

인맥,의리 축구 고만해라.
58년 개띠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색히인데 언제 정신차릴래?
안경선배 24-07-18 14:35
   
40년만에 올림픽 탈락시키는데 일조하고 감독 선임 도중 빤스런...  으리으리하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