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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7-26 11:19
[정보] 정몽준 前 KFA 회장의 공과에 대한 고찰
 글쓴이 : 삿짱
조회 : 1,415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200282

정몽준 前 KFA 회장의 공과에 대한 고찰

빌게칸
카페매니저
 
2023.01.10. 13:48조회


1. 서론

국내 축구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을 거론할 때 정몽준 前 KFA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국내 축구계의 최고결정권자였기 때문이다.



정몽준 前 KFA 회장은 1993~2009년에 KFA 회장직을 수행했으며

1994~1998년에는 프로연맹 회장직을 겸임하기도 했다.



본문에서는 정몽준 前 KFA 회장의 주요 공과에 대해 다루었다.

KFA 회장으로서의 공과 뿐만 아니라 프로연맹 회장으로서의 공과도 함께 다루었다.



참고로, 오해의 소지를 방지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본문 내용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축구행정가로서의 정몽준에 국한되어 있으며

국회의원으로서의 정몽준은 당연히 제외되었다.











2. 1990년대 KFA 자금 지원 및 경영 개선 (공)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KFA는 재정적으로 열악했다.

정몽준 KFA 회장 취임 직전이었던 1992년 당시 KFA 예산은 34억원에 불과했다.

31년 전의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예산이 꽤 적었던 것이다.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16481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020800209211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02-08&officeId=00020&pageNo=11&printNo=21730&publishType=00020 참고 )



이에 따라, 정몽준 KFA 회장은 한동안 KFA에 많은 찬조금을 지원했다.

예를 들어, 1993년에는 37억원, 1994년에는 34억원, 1995년에는 44억원을 찬조금으로 지원했다.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30400209123009&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03-04&officeId=00020&pageNo=23&printNo=22446&publishType=00010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5122000329116001&editNo=30&printCount=1&publishDate=1995-12-20&officeId=00032&pageNo=16&printNo=15630&publishType=00010 참고 )



물론, 단순히 찬조금만 지급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스폰서 유치 등을 통해 자체 수입을 기존보다 증대시켰다.

이에 힘입어, 1999년 당시 KFA는 129억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 https://www.khan.co.kr/article/200010161918111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01&aid=0004489474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9012200239114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9-01-22&officeId=00023&pageNo=14&printNo=24273&publishType=00010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9052900329124003&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9-05-29&officeId=00032&pageNo=24&printNo=16760&publishType=00010 참고 )



​3. 2001년 스포츠토토 출범 기여 (공)

1998년을 기점으로 KFA는 스포츠토토 출범을 위한 입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스포츠토토가 출범하면 스포츠산업 발전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스포츠토토 운영수익 중 일부가 KFA에 배당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01&aid=0004341554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0130518?sid=100 참고 )



공교롭게도, 당시 정몽준 KFA 회장이 국회의원직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련된 입법 활동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실제로, 관련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을 때 여야 모두 사행성 조장을 이유로 대부분 반대했지만

정몽준 KFA 회장이 월드컵경기장 건립 자금 확보 등 법안의 장점을 내세워 국회의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9080500099133018&editNo=16&printCount=1&publishDate=1999-08-05&officeId=00009&pageNo=33&printNo=10438&publishType=00010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5/0000106264?sid=100 참고 )



2001년 스포츠토토 출범은 KFA 재정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축구토토 매출액 중 운영비, 환급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 중 일부가

관련 법령에 의거하여 KFA에 배당되고 있기 때문이다.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69241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69580 참고 )



예를 들어, 2015~2018년 사이클 기준으로, KFA 연평균 수입 769억원 중​

20%에 해당하는 154억원이 스포츠토토 배당금수입(체육진흥투표권수입)이었다.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62198 참고 )




4. 2000년대 초반 축구전용구장 건립 기여 (공)

정몽준 前 KFA 회장의 주도 하에 2002 FIFA 월드컵 유치에 성공한 후 월드컵경기장 10개가 건립되었다.

그 중 4개 경기장은 4만석 이상의 종합운동장, 6개 경기장은 4만석 이상의 축구전용구장으로 건립되었다.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69577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69578 참고 )



종합운동장으로 건립된 인천월드컵경기장, 광주월드컵경기장,

대구월드컵경기장, 부산월드컵경기장은 2002 FIFA 월드컵과 무관하게 이미 건립될 예정이었다.

노후화된 종합운동장을 대체함과 동시에 각종 체육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축구전용구장으로 건립된 서울월드컵경기장, 수원월드컵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

전주월드컵경기장, 울산월드컵경기장, 제주월드컵경기장은 2002 FIFA 월드컵 유치를 명분으로 건립​되었다.



해당 축구전용구장들은 2000년대 초반 이후 현재까지 K리그 경기 개최에 사용​되고 있다.

이를 통해 K리그 팬들이 과거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에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5. 2002 FIFA 월드컵 4강 진출 기여 (공)

2002 FIFA 월드컵 유치 성공은 2002 FIFA 월드컵 본선 자동 진출​은 물론이고

2002 FIFA 월드컵에서의 홈 어드벤티지 확보​를 의미했다.



중장기적으로 2002 FIFA 월드컵 본선을 준비할 수 있다는 점,

국제 대회에서 홈경기와 원정경기의 차이가 크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국가대표팀에게 큰 호재였다.



KFA는 2002 FIFA 월드컵 본선을 1년 반 정도 앞둔 시점에서

네덜란드의 1998 FIFA 월드컵 4강 진출을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했다.

이와 함께, 클럽팀에 준하는 선수 차출, 강팀과의 A매치 개최 등을 보장했다.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69579 참고 )



결과적으로, 히딩크 감독의 지도 하에 국가대표팀이 2002 FIFA 월드컵 4강 진출을 달성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대표팀의 목표가 FIFA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엄청난 성적을 기록한 것이다.



정몽준 KFA 회장이 국가대표팀을 직접 지도한 것은 아니지만

2002 FIFA 월드컵 유치, 유능한 감독 선임을 통해

2002 FIFA 월드컵 4강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6. 1997년 K리그 10팀 체제 구축 (공)

1993년 정몽준 KFA 회장 취임 당시 K리그 팀수는 6팀​이었다.

K리그의 운영 체제와는 별개로 절대적인 팀수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운영 체제로 디비전시스템을 채택하든, 프랜차이즈시스템을 채택하든,

국내 환경을 고려하면 1부리그 팀수를 최소 8~10팀 정도는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KFA는 2002 FIFA 월드컵 유치 추진 분위기를 기반으로

정부와 협력하여 K리그 팀수를 최소 10팀 이상 확대하고자 했다.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01&aid=0003786701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01&aid=0003780980 참고 )



그러한 목표 하에서, 1995년 전북다이노스(現 전북현대), 전남드래곤즈,

1996년 수원삼성, 1997년 대전시티즌(現 대전하나시티즌) 등 프로축구단이 연이어 창단되었다.

이에 힘입어 1997년을 기점으로 K리그 10팀 체제가 구축되었다.



​7. 1990년대 K리그 연고지 빌드업 개선 실패 (과)

본문 6번 파트에서 언급된 프로축구단 추가 창단이 K리그 연고지 빌드업 개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K리그 10팀 체제 구축에도 불구하고, 특별시 및 광역시 중에서 서울, 인천, 광주, 대구가 계속 비어 있었다.

대전의 경우에는 프로축구단이 존재했지만 재정적으로 많이 열악했다.



1982년 출범 당시부터 울산을 제외한 모든 특별시 및 광역시에

대기업구단을 갖추고 있던 프로야구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러한 차이는 곧 K리그와 프로야구 간의 흥행 및 선순환구조 격차로 이어졌다.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95561 참고 )



대한민국 인구의 상당수가 거주하는 특별시 및 광역시에서 구단의 자금력은 상당히 중요하다.

세상만사는 확률 싸움이므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야 사람들을 팬으로 만들 확률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운영비 100~200억원보다 운영비 300~400억원이 선수 영입 측면에서 더 유리하다.



이는 프로스포츠의 본질과 관련된 사항이므로 유럽축구 또한 마찬가지이다.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유럽 빅클럽들의 절대 다수가

해당 국가의 핵심도시를 연고로 하여 강한 자금력을 보유하고 있다.



추가적으로, 대한민국은 유럽의 여러 국가들에 비해 프로스포츠 흥행 측면에서 불리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전자보다 후자의 지역 연고의식이 더 강하며, 축구 저변 규모 또한 전자보다 후자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 하에서, 나름대로의 팬덤을 보유한 유럽 하부리그 구단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흥행적으로 불리한 환경에 놓여 있는 국내 프로스포츠의 경우에는

연고지 빌드업이라도 제대로 수행해야 체면치레는 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러하지 않은 경우에는 체면치레도 할 수 없다.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97930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99360 참고 )



8. 1996년 서울공동화정책 실시 및 후속 조치 부재 (과)

1990~1991년 K리그 연고지 재조정 이후 3년만에 KFA, 프로연맹은 서울공동화정책을 추진​했다.

그 후, 프로연맹은 1995년에 서울공동화정책을 의결했으며, 1996년에 이를 집행했다.

이에 따라, 서울 3개 구단은 강제로 연고이전을 당했으며, 서울은 완전히 비어졌다.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97108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97220 참고 )



서울축구전용구장 건립 시 서울 연고권을 유지할 수도 있다는

단서 조항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현실적으로 활용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실제로, LG치타스(現 FC서울)가 단서 조항 활용을 추진했지만 각종 제약으로 인하여 불발되었다.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19661 참고 )



애시당초 별개의 개념인 <연고권 유지>와 <축구전용구장 건립>을 엮은 것부터가 문제이며

서울공동화정책을 실시하지 않았더라도 2002 FIFA 월드컵 유치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근본적으로 국제 대회 유치는 로비 등 외교 전략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울 3개 구단을 당시에 비어 있었던 다른 광역시(인천, 대전, 광주, 대구)로 분산시킨 것도 아니다.

즉, 하이 리스크(서울 공동화)를 감수하고 하이 리턴(광역시 분산)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이 리스크만 감수하고 리턴은 전혀 없었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프로연맹은 서울공동화정책 집행 3년만에 서울을 다시 채우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27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서울 3개 구단 체제를 복원하지는 못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속담을 스스로 증명한 꼴이 되었다.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97108 참고 )



한편, 서울공동화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구단들이 각각 1차례씩 다른 연고지로 이전했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논란이 발생하는 등 후유증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97774 + https://cafe.naver.com/kleagueworld/196973 참고 )
[출처] 정몽준 前 KFA 회장의 공과에 대한 고찰 (K리그월드 & K League World) | 작성자 빌게칸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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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짱 24-07-26 11:22
   
몽주니어 정기선을 차기축협회장으로~!
타이버잔 24-07-26 11:25
   
어제 축구계 망치는 사촌의 자서전따위보다 이사람이 자서전 내면 몇배는 나앗을거 같네요.
월컵첫우승 24-07-26 16:24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