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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의 한계 싱가포르, 친중외교의 종언
작년 11월 하순, 싱가포르군이 대만에서 군사훈련을 마친뒤 민간수송선으로 반송중인 군용차량 9대를 귀로중 홍콩 세관당국에 압수된지 2개월. "무기밀수혐의" 때문이라고 했다가 지난주 홍콩 당국으로부터 반환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싱가폴 외무성이 발표했다. 타국군의 장갑차 압수하는 이례적인 사태에 갈등이 깊어 싱가포르와 중국의 모습은 양국관계 악화를 보였다.
역사적 배경을 되돌아보자. 원래 싱가포르와 중국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양국이 국교를 수립한것은 90년대로 늦었으나 국민의 약 4분의3을 화교가 차지하는 이나라의 지도층은 자신의 지정학적 입장을 의식하고 국가를 운영해왔다. 화교는 동아시아와 중동을 잇는 해상교통로의 요충지 말라카 해협의 장점에 주목. 독자적인 생존전략을 세워 동남아시아에 굴지의 독재형 개발국가를 건설했다.
'건국의 아버지'리콴유는 마오쩌둥에서 덩샤오핑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비슷한 독재적인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공사 모두 친하게 교제해왔다. 89년 6월 천안문사건이 발발한 뒤에도 리는 덩의 강권적인 수법을 옹호하여 서방진영에서 물의를 빚었다. 반면 리는 대만의 장징궈, 리덩후이등 각 총통과도 친분을 거듭했다. 리와 덩의 사이를 중개하고 중국인끼리는 싸우지 않는다는 약속을 쌍방에서 얻어낼 정도였다. 리.등은 화교의 뿌리가 중국 대륙에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 대중외교도 '친한 친척끼리의 교류'를 넘지 않았다. 덩의 사후, 싱가포르는 그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하는, 속국같은 행동으로 중국을 기쁘게했다. 기념비의 제막식이 11년 11월에 행해졌을때 중국을 대표해 참석한것은 시진핑 당시 국가부주석이었다.
리는 15년 3월에 타계하였고, 후계자의 자리에 오른 아들 리셴룽도 양국의 정치적인 중개에 주력했다. 같은해 11월 당시의 마잉주총통과 시진핑 국가주석, 두 정상이 국공내전후 처음으로 서로 손을잡은 무대도 싱가포르였다. "동남아 최고의 친중국"라고 야유받는 가운데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 강연을 선보일때 예를 들어가며 일본의 아시아침략을 시끄럽게 비판했다.
하지만 시진핑 정부가 패권주의를 강화함에 따라 싱가포르의 태도도 점차 변화해왔다. 난사제도등 남중국해 대부분의 영유권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중국의 오만한 태도에, 싱가포르는 처음부터 따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든것이 끝난 느낌이다. 이번 홍콩에서 군용차량 압수에 대해서도 싱가포르는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대해 중국 외교부는 "'하나의 중국'원칙을 엄격히 지키도록 요구한다"며 강경한 자세를 바꾸지않았다.
좁은 국토사정에 훈련장을 확보할수없는 싱가포르는 70년대부터 대만에서 군사훈련을 전개해왔다. 이것도 리콴유와 장징궈가 한 약속중 하나다. 싱가폴군은 중국을 의식한 작전계획도 대만에 편드는 전략도 없다. 훈련에 장갑차가 사용된것도 처음이 아니다.
"건국의 아버지"딸도 비판
이전에는 중국도 훈련에 대해 이해를 표명하며 "하이난섬을 훈련장으로 제공하여도 좋고, 인민 해방군과의 합동훈련도 환영한다"고 성원을 보냈을 정도다. 하지만 지난해 훈련의 동지였던 마는 총통의 자리에서 내려서고 등장한 차이잉원 총통은 "하나의 중국"원칙의 수용을 거부하고있다. 대만에 대한 시진핑의 적대감은 대만과 우호관계를 중시하는 싱가포르에도 향하고있다.
1월초 리콴유의 딸 리웨이링은 "시진핑의 반부패 투쟁은 정치적 보복에 불과하다"고 공개적으로 베이징의 최고지도자를 비판했다. 조국의 군용차량이 억류된것에 대한 초초함이겠지만 다시 한번 양국의 갈등이 뿌리깊음이 드러났다. 압류는 중국의 독선적인 해양진출에 타국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있것에 대한 보복에 지나지 않는다. 화교국가 싱가포르 인심도 얻을수없는 중국은 이제 국제사회에서 친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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