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바람이 찬 봄날, 화분을 손보러 빨간 벽돌집 뒤켠 공터로 나오니
다섯살바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모여앉은 아이들이 자기의 꿈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이
내 어린 시절의 한자락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아이가 한참을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야, 너는 뭐가 될래?"
"그래, 빨리 정해라."
친구들이 지친 듯 쪼그리고 앉아 재촉하는데도 그 아이는 망설이기만 했다.
그때 내가 빙긋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빨리 말해라. 친구들이 기다리잖아."
그러자 머쓱해진 그 아이기 뭔가 결심한 듯 벌떡 일어서더니
햇볕이 잘 드는 벽으로 뛰어들어가 기대어 섰다.
"난 햇볕이이야, 너희들 모두 이리로 와 봐."
나는 속으로 '어허, 제법이네' 하며 그 아이를 힐끗 쳐다봤다.
어리둥절해 하던 아이들도 모두 달려가 그 아이 옆에 섰다.
"와, 따뜻하다" 하며 벽에 붙어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정겨웠다.
나는 가끔씩 노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제공하곤 했다.
오늘은 색색 플라스틱 포크에 토끼모양으로 깎은 사과를 들고 나오다가
무심결에 햇볕이 되고 싶은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우리 할머니는 시장에서 나물을 파는데
할머니가 앉아 계신 곳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아요."
그 아이는 잠깐 동안만 할머니를 비추고는
금방 다른 데로 옮겨가는 햇볕이 알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햇볕이 되어
할머니를 하루 종일 따뜻하게 비춰 줄 거라고 했다.
나는 그 아이를 꼭 안아 주었는데 햇살을 가득 품은 것처럼 따뜻했다.
어느 해 가을, 지방의 한 교도소에서 재소자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다른 때와는 달리 20년 이상 복역한 수인들은 물론
모범수의 가족까지 초청된 특별행사였습니다.
운동회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운동장 가득 울려퍼졌습니다.
"본인은 아무쪼록 오늘 이 행사가 탈없이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오랫동안 가족과 격리됐던 재소자들에게도,
무덤보다 더 깊은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살아온 가족들에게도
그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미 지난 며칠간 예선을 치른 구기종목의 결승전을 시작으로
각 취업장 별 각축전과 열띤 응원전이 벌어졌습니다.
달리기를 할 때도 줄다리기를 할 때도 얼마나 열심인지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를 방불케 했습니다.
여기 저기서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잘한다. 내 아들… 이겨라! 이겨라!"
"여보, 힘내요… 힘내!"
뭐니뭐니해도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부모님을 등에 업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 효도관광 달리기 대회였습니다.
그런데 참가자들이 하나 둘 출발선상에 모이면서
한껏 고조됐던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푸른 수의를 입은 선수들이 그 쓸쓸한 등을 부모님 앞에 내밀었고
마침내 출발신호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달리는 주자를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들의 눈물을 훔쳐 주느라 당신 눈가의 눈물을 닦지 못하는 어머니...
아들의 축 처진 등이 안쓰러워 차마 업히지 못하는 아버지...
교도소 운동장은 이내 울음바다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니, 서로가 골인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듯한
이상한 경주였습니다.
그것은 결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의 레이스였습니다.
그들이 원한 건 1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함께 있는 시간을
단 1초라도 연장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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