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 투자하는 과정에서 나야 계약서 쓰고 돈만 주면 되었기에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스파 오픈은 총지배인 친구와 단 둘이
준비를 해야 했던지라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쓸 일이 산더미같이 많았다.
하지만 이걸 겪으면서 태국인들의 사업방식과 태국의 사업환경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태국의 상가건물은 보통 2층이나 3층짜리 건물이다.
한 층만 임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2층, 3층짜리 건물 전체
한 동 단위로 거래가 된다. 즉 건물 전체를 임대 해야한다.
2층짜리를 임대하는 경우 1층은 상업용으로 2층은 주거용으로
3층짜리를 임대하는 경우 1,2층은 상업용으로 3층은 주거용으로
사용하는게 일반적이다.
최소 임대기간은 2년이다. 건물주들이 보통 3년 이상 계약을 선호하는데
내 경우엔 건물주인 호텔사장 이모와 친분이 있어 다행히 2년 임대계약을 했다.
스파 투자 지분은 내가 60%, 호텔 총지배인 친구가 40%로 내가 빅보스다.
원래는 내가 80%, 그 친구가 20% 였으나 이왕 사업을 하는거
니 지분을 좀 더 늘리라며 이모가 돈을 빌려줬다고 한다.
1층과 2층은 스파공간, 3층은 주거공간으로 만들어서
향후 여기에 올 경우 호텔방 대신 여기서 머물 생각이었다.
우선 업자를 수배해서 3층짜리 건물 전체를 싹 다 새단장을 해야했다.
그리고 층별로 인테리어를 새로 싹 하고
목욕시설 등 스파에 필요한 각종 시설, 안마 의자와 마사지 침대 등 가구류,
침대보, 사이즈별 타월, 각종 마사지오일, 마사지사들 유니폼, 아로마 향초
매니큐어/패티큐어 등에 필요한 각종 도구들과 도구통, 마사지사용 의자
닥터피쉬 업자 수배해서 물고기 구입, 어항 및 산소공급 설비
손님용 간식들과 커피, 차 및 각종 음료에 찻잔 세트 구입
3층 주거공간용 각종 가구 및 전자제품 구입
직원 및 마사지사들 수배, 가격 및 인테리어를 알아보기 위한 근처 동종업체 탐사 등
여기 다 적기도 어려울 정도로 할 일이 많았다.
스파에 들어가는 설비와 물품 조달을 위해 직접 수십군데의 업자를 수배하고
견적이 맞는지도 보고 일일이 가서 구입을 해야하는 품목도 많고...
총지배인 친구가 맡아서 주로 했지만 호텔일만으로도 바쁜 친구이고
작은거 하나를 사도 나와 상의를 해야 했기에 나도 모든 일에 관여를 하게 되었다.
근데 일이 다 내 뜻대로 되나? 당연히 안된다. 여기선 더욱 더...
한국에서 하루면 될 일이 여기선 일주일이 아니라 한달도 걸린다.
내부수리, 인테리어, 설비, 물품 조달 등을 하면서 많은 현지업자들을 상대하다보니
아니 어떻게 사업을, 일을 이따위로 하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경우도 많다.
이해가 안가면 어쩌리? 난 어차피 외국인이고 이 동네가 원래 그런걸..ㅎㅎ
그동안 편하게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로 일하고 펜대만 굴리던 내가
자영업 하는 사장님들을 존경하게 된게 이 때부터이다.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정직한 동업자인 총지배인 친구의 노력으로
모든 준비가 마무리 되고 개업식이 코 앞으로 다가 온 어느 날 밤.
동업자 왈, 스파 내부 수리를 맡았던 공사업자가 찾아 왔단다.
잔금 좀 달라고 온 것이리라.
50대 후반 아저씨인데 그 동안 공사일자를 자꾸 어겨서 우릴 상당히 힘들게 만들었다.
정해진 날짜 좀 어기는거야 여기선 사실 상당히 흔한 일인데 아직 현지화가 덜 된
나로선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미리 태국인들 특성을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내가 애초에 잔금을 전체 공사대금의
50%로 정했음에도 그렇다.
그래서 너도 골탕 좀 먹어보라고 잔금 달라고 몇 번 찾아 온 걸
만나주지 않고 일부러 잔금 주는 걸 미루고 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계약서도 없고 구두계약이다. 계약서를 쓴다고 달라지지도 않는다.
여기 일하는 방식이 이렇다.
그래도 오늘은 잔금을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업자 아재를 만나러 갔다.
가보니 어라....이 아재가 오늘은 와이프까지 데려왔네.
날 보더니 하는 말이 낼 모레 막내딸 대학교 새학기 시작해서 학비 내야하는데
돈이 없으니 잔금 좀 달라며 사정을 한다.
그러더니 뒤에 주차해 놓은 자기 차를 향해 손짓을 한다.
손짓과 함께 차에서 누군가 내리는데 밤이라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불빛이 있는 우리가 서있는 쪽으로 다가와 업자 아재 옆에 서니
이제야 누구인지 잘 보이는데....
어우야~ 깜딱이야!!! 아니...이런 흑진주를 봤나!
그렇게 몸매 좋고 예쁜 여성은 그 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너무 까맣지도 그렇다고 누렇지도 않은 적당히 까무잡잡하면서 탱탱하고 윤기있는 피부,
유난히 희고 커다란 눈동자, 동양적이면서도 서구적인듯한 또렷한 이목구비,
입고 있는 바지의 볼륨감을 최대한으로 살리고 있는 글래머한 몸매
그냥 이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정 겪은 나였지만 숨이 막히는 것이 한 순간 말이 안나왔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데 업자 아재가 자기 딸이라고 소개를 한다.
그리곤 딸에게 나한테 인사를 하라고 시키니
아재 딸은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태국식 인사를 한다.
나도 정신을 차린 후 답례 인사를 하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한 후 급히 3층으로 올라갔다.
아니 도대체 내가 여태 무슨 짓을 한것인가?
저런 바람직한 학생이 공부할 학비를 여태 미루고 주지 않고 있었다니...
나 자신에게 무척 화가 났다.
심한 죄책감을 느끼며 그리고 그런 잔인한 짓을 한 내 자신을 저주하며
아재에게 주려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잔금봉투와 함께 현금 5000바트를 따로 챙겼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혹시 나중에 유용하게 쓸 일이 있을까 싶어
한국에서 사왔던 한국 화장품들을 따로 잔뜩 챙겨서 내려왔다.
잔금이 든 봉투를 장인어른ㅋㅋ 아니 아재에게 건네주며
손짓으로 아재 딸을 슬쩍 가르킨 후 5000바트를 따로 더 주었다.
딸 용돈으로 주라는 의미였는데 그 때 아재가 내 손짓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아재의 딸에게 최대한 무심한 듯 화장품 봉투를 내밀었다.
아재 딸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숙인채 받아야 할지 말지 망설인다.
난 아무 말 없이 봉투를 열어 안에 화장품이 들었다는 것을 보여준 후
딸의 손을 잡아 끌어 봉투를 건네 주었다.
순간 그녀의 예쁜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살짝 스쳐가는 것이 보였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화장 안한 지금도 너무 예쁘지만 이 화장품으로 더 예쁘게 꾸미고 다녀~'
마음 속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그로부터 약 2년이 흐른 어느 날
쇼핑할 일이 좀 있어서 홀로 쇼핑몰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날 부르는 듯한 여자의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린다.
"피 카~(오빠~)"
본능적으로 난 시계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왜냐면 난 왼쪽 얼굴이 오른쪽보다 더 자신있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본 그 순간,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숨이 막혔다.
2년 전 내 마음이 전해졌던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