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왜 뮤즈가 필요한가
“모르는 소리 마. 외계인은 청계천 다리 밑에 살아.” 두 사람은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김인권이 손예진한테 쏘아붙였다. “연기도 못하는 주제에.” 손예진이 울음을 터뜨렸다. 손예진은 설경구한테 안겨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타워>의 연출자인 김지훈 감독이 뛰어 들어왔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넋이 나간 김지훈 감독은 김인권한테 사정했다. “그냥 외계인이 달나라에 산다고 예진이한테 말해주면 안 될까?”
손예진이 주범이었다. “감독님을 상대로 몰래 카메라 해요. 재미있잖아요.” 그 말 한마디에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설경구만 손사래를 쳤다. 정작 상황이 벌어지자 맨 먼저 나선 게 설경구였다. 휴지상자를 냅다 집어던지며 분위기를 잡았다. 모두가 손예진이 하자는 대로 움직였다. 손예진은 <타워> 촬영장의 유일한 여배우였다. 스태프들은 손예진을 훔쳐보면서 일을 했다. 감독조차 손예진을 마주 보면서 용기를 냈다. [타워]에 출연한 배우 이한위는 말했다. “<타워> 촬영장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손예진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예진은 <타워> 촬영장의 뮤즈였다.
에디 세즈윅은 팩토리 걸이었다. 앤디 워홀은 에디 세즈윅을 보자마자 한눈에 잠재력을 알아봤다. 앤디 워홀이 세운 예술 공장인 팩토리에는 1960년대를 주름잡았던 예술 제조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에디 세즈윅은 영감의 원천이자 삶이 중심이 됐다. 모두가 그녀를 흠모했다. 모두가 그녀를 갖고 싶어 했다. 누구도 그녀를 갖지 못했다. 그 좌절된 달콤한 욕망이 팩토리를 움직이는 에너지원이었다. 모두가 에디 세즈윅을 연상하며 시나리오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에디 세즈윅 앞에 밥 딜런이 나타났다. 에디 세즈윅을 사로잡았다. 밥 딜런한테 에디 세즈윅은 뮤즈였다. 질투에 불탄 앤디 워홀은 자신의 뮤즈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사실 팩토리가 없는 에디 세즈윅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모든 걸 갖고 있었지만 단 한 가지, 창작의 재능은 지니지 못했다. 뮤즈는 헤로인에 손을 댔다. 나중에 밥 딜런은 에디 세즈윅을 연상시키는 노래를 작곡했다. “저스트 라이크 어 우먼”이었다. “그녀는 바로 여자야. 그녀는 사랑하고 아파해. 바로 여자니까. 하지만 결국엔 작은 소녀처럼 부서져버렸지.” 에디 세즈윅은 1971년 사망했다. 앤디 워홀의 팩토리 시대도 끝나버렸다.
남자는 원래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다. 남자는 파괴할 뿐이다. 본성이다. 남자아이들한테 장난감을 쥐여주면 쉽게 알 수 있다. 남자아이들은 다짜고짜 장난감을 분해하기 시작한다. 과학적인 호기심 탓이 아니다. 남자아이들한테 놀이란 승부다. 어떤 형태의 장난감이라도 결국엔 서로 빼앗거나 망가뜨리면서 힘을 과시하는 용도로 쓴다. 남자아이들은 주변의 모든 사물을 무기화한다. 사춘기에 이르면 성욕은 남자의 거의 모든 지적 능력을 잠식한다. 삽입하고 분출하기를 욕망하느라 공부하고 사유하는 거의 모든 생산적인 활동을 마다하게 된다.
그런 흉포한 남자를 창조자로 만드는 건 여자다. 남자는 여성의 자궁을 빌려서 번식한다. 남자가 빚어내는 거의 모든 창작 활동 역시 여성의 정신적 자궁을 필요로 한다. 남자의 파괴적 본능을 창작의 열정으로 변압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여자다. 2000년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에서는 남성의 언어 능력과 성욕에 관련된 실험을 하나 했다. 실험에 참가한 남자들한테 섹시한 여성의 사진을 보여준 다음 그 여자와 데이트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참가한 남자 대다수의 언어적 창의성이 강화됐다. 남자는 여자를 욕망할 때 가장 창조적이 된다.
남자는 여자를 얻기 위해 시를 쓰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린다. 남자들끼리만 있으면 그저 파괴하고 싸울 뿐이다. 여자가 있어서 남자들은 자신의 파괴적인 본능을 창작으로 치환한다. 그렇게 변화된 창작력은 오히려 여성의 창작력보다 더 강력하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시를 쓰는 법이 없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시를 쓴다. 더 애절하고 더 절실하기에 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여자는 남자가 창작을 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다.
뮤즈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여자다. 말하자면 뮤즈란 고품질의 변압기다. 성욕이란 파괴적인 고압 전류를 다양한 창작 활동에 쓰일 수 있는 생산적 열정의 전류로 변압시키는 역할을 한다. 평범한 여자라도 어떤 남자한텐 창조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흔히 연애나 결혼이 그런 변압 과정이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서 마침내 생산을 하게 되는 과정이 연애이고 결혼이다. 정작 생산이 끝난 다음이 문제다. 어느 순간부터 여자의 변압 기능은 낮아진다. 남자는 더 이상 여자한테 생산적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 성적인 욕망을 느끼지 못한단 뜻이다. 결혼이 창조의 무덤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뮤즈는 다르다. 무한대의 용량을 지닌 변압기다. 한 남자가 아니라 수많은 남자한테 한꺼번에 영감을 준다. 누구의 여자도 될 수 없기 때문에 남자들은 끊임없이 그녀를 욕망하게 된다. 넘치는 성욕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된다. <타워> 촬영장을 움직인, 숨겨진 작동 원리는 손에진이었다. 겉보기엔 제작비와 시나리오가 영화의 기본 요소 같다. 현장에선 전혀 다른 원리가 작용된다. 제작비와 시나리오만으론 연출도 연기도 섹시해질 수 없다. 불타는 세트장에서 배우들이 위험천만한 연기에 도전하게 만들 수 있는 건 그걸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자의 존재 뿐이다. 남자가 한 발 더 나아가서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 수 있는 건 뮤즈 뿐이란 얘기다.
<은교>는 늙은 시인과 뮤즈의 이야기다. 늙어버린 시인 이적요는 평생 쌓아온 명성으르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적요함 속에 가둬버린다. 이적요 시인이 잃어버린 건 성욕이다. 그걸 잃어버린 순간 이적요는 꽃이 피지 않는 고목나무 같은 남자가 된다. 교복을 입은 10대 소녀 은교한테 이적요는 성욕과 열정을 느낀다. 이적요는 꿈을 꾼다. 다시 젊어진 이적요는 은교와 사랑을 나눈다. 은교라는 뮤즈를 통해 이적요의 성욕은 새로운 창작물로 변압된다. 그렇게 시인 이적요는 소설 <은교>르 쓴다. 뮤즈는 남자한테 에너지를 주지는 않는다. 뮤즈는 스위치이며 변압기일 뿐이다. 이적요는 뮤즈를 위해 스스로 남은 모든 걸 태워버린다. 평범한 남녀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곤 한다. 남자는 여자를 얻기 위해 꽃을 사고 옷을 사 입고 자신을 가꾸기 시작한다. 더 나은 남자가 되기 위해 애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여자를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여자를 얻기 위해서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인 소설가 멜빈 유달은 식당 웨이트리스이니 캐럴 코넬리한테 사랑을 느낀다. 유달은 캐럴 코넬리에게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드오."
예술 창작에만 뮤즈가 필요한 게 아니다. 돈과 권력이 오가는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도 여자는 필수다. 도쿄 아카사카는 밤의 국회라고 불렸다. 아카사카에 밀집해 있는 요정들 때문이었다. 밤만 되면 아카사카엔 일본의 정관계 유력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낮에는 인접한 나가타초에 밀집한 국회의사당과 총리 관저와 영빈관에서 일하는 남자들이었다. 남자들끼리 앉아선 어제 잤던 여자와 오늘 자고 싶은 여자들 얘기만 한다. 좌절된 성욕을 입으로 발산하는 짓일 뿐이다. 술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들 모두가 흑심을 품을 만한 여자가 그 자리에 존재하는 순간 대화엔 심도가 생긴다. 남자들은 정치와 경제와 역사와 미래를 논하기 시작한다. 본능이다. 그렇게 비즈니스가 이루어진다. 이제 도쿄 아카사카 지역은 더는 밤의 국회가 아니다. 아카사카를 대표했던 유명 요정 긴류마저 문을 닫았다. 긴류는 나카소네와 고이즈미의 단골집이었다. 일본 정치가 가장 활기찼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총리가 모두 긴류의 단골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저치의 뮤즈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긴류가 망하고 남자들의 파괴적 본능을 창조적 정치력으로 변압시켰던 밤의 꽃들도 자취를 감추자 일본 정치도 힘을 잃어버렸다.
삼성동과 역삼도 일대의 룸살롱촌 역시 한국 남자 사회의 충만한 성욕이 경제력으로 변압되는 거대한 변전소다. 삼성전자 서초동 본사부터 포스코 본사가 위치한 포스코 사거리까지는 수많은 기업의 본사가 줄지어 있다. 대ㅣ업 본사 건물 사이사이엔 벤처 기업과 벤쳐 캐피탈들이 자생하고 있다. 그 너머 이곳 저곳엔 각종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투자사들이 자리 잡고 있다. 드문드문 게임 회사들과 외국계 기업들도 위치해 있다. 밤이 되면 그들은 인근 룸살롱이나 비즈니스 클럽으로 모여든다. 서로 정보를 교류하고 피아를 구분한다. 이 때 필요한 건 남자들끼리 서로 본색을 드러내게 만들어줄 요소다. 일단 술이다. 술만으론 부족하다. 비즈니스의 뮤즈가 필요하다. 아카사카와 똑같다.
남자가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성욕이며 대상으로서의 여자다. 도쿄 아카사카와 서울 테헤란로에서 벌어지는 정치와 경제의 작동원리는 기본적으론 <타워> 촬영장과 워홀의 팩토리 창작 현장이 작동했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뮤즈로서 존재했던 여자들은 남자들이 뛰고 구르고 춤추고 다투고 거래하고 창조하게 만들었다. 뮤즈가 없을 때 남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남자는 스스로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홍대 인디 음악계에 속설이 하나 있다. 음반 하나를 만들려면 곡 수 만큼 실연을 해봐야 한다는 얘기다.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었지만 남자란 똑같다. 밥 딜런한텐 이디 세지윅이 있었다. 에릭 클랩턴과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에게는 패트리샤 앤 보이드가 있었다. 전성기 <플레이보이>지에는 헐벗은 여자 사진과 진지한 정치 사설이 함께 실렸다. 케네디 형제들한텐 마릴린 먼로가 있었고 사르코지에겐 카를라 브루니가 있었다. 그렇게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만 세상을 창조한다.
글/신기주
뮤즈의 운명
<차오 맨해튼.은 이디 세지윅의 유작이다. 이디 세지윅은 <치오 맨해튼> 촬영이 끝나고 3개월 뒤인 1971년 11월에 침대에서 돌연사했다. 스물여덟 살이었다. <차오 맨해튼>은 이디 세지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맨해튼 예술계의 뮤즈였던 여자가 약에 절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여자는 뉴욕 시절을 추억한다. 앤디 워홀과 이디 세지윅의 팩토리 시절 동영상이 군데군데 삽입돼 있다. 정작 영화 속 이디 세지윅의 모습은 참담하다. 상반신을 탈의하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약에 전 모습으로 등장한다. 영화 내내 그 모습이다. 어눌한 말투도 중독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영화 속 세지윅의 가족들은 그런 딸의 모습을 힘들어 한다. 뜨내기 음악가 청년이 이디 세지윅의 주위를 맴돈다.
그가 원하는 건 세지윅과의 섹스와 영감이다. 사실 <차오 맨해튼>이란 영화 자체가 세지윅한테서 영감을 착취한 결과물이다. 그렇게 세지윅은 스크린 안과 밖에서 끝까지 숭배받는 뮤즈이자 이용당하는 여자였다.
남자들은 뮤즈한테 사랑을 갈구하고 영감을 얻어가지만 정작 뮤즈한테 남는 건 추억 뿐이다. 에릭 클랩턴과 조지 해리슨의 뮤즈였던 패트리샤 앤 보이드가 평생 남긴 온전한 창작물이란 뮤즈였던 시절을 추억한 자서전 뿐이다.
<차오 맨해튼>엔 세지윅의 사망 기사가 실린 신문이 등장한다. 제목엔 세지윅의 이름조차 없었다. "앤디의 스타가 28세로 사망했다."가 전부였다.
죽어서도 세지윅은 앤디 워홀의 뮤즈일 뿐이었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 세상을 창조한다. 결국엔 여자를 파괴힌다.
아마도 작년 에스콰이어 6월호에 실린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