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로를 걸어 드디어 아카시아 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아카시아 꽃이 피는 계절이면 향긋한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매일 아침 여기까지 왔던 기억이
그 시절 아카시아 향기마냥 은은하면서도 아련하게 납니다.
아카시아 나무가 있는 옆으로 버려진 듯한 밭과 여전히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는 작은 도랑을 양쪽으로 끼고 작은 길이 100미터 가량 쭈욱 뻗어 있습니다.
오르막으로 끝나는 그 작은 길 마지막에 군데군데 페인트 칠이 벗겨진 쇠로 만든 낡은 문 하나가 보입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운동장엔 아무도 없고 건물은 옛날 그대로 변한게 없어 보입니다.
교실 옆 한 쪽 이름 모를 꽃들과 식물들을 키우던 곳도, 토끼며 다람쥐며 작은 동물들을 키우던 곳도 예전 그대롭니다.
한 가지 달라진 건 어릴 적 크고 거대하게 보이던 모든 것들이 이젠 작고 예쁜 미니어처처럼 보인다는 것 뿐입니다.
"옛날 그대로네....." 내 말에
"응... 그렇지 뭐" 아직까지 근처 마을에 살고 있는 친구가 무심한 듯 고개도 안 돌린 채 대답합니다.
교실 뒤편으로 작은 관사가 보입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몇 올 남지 않았던 학교에서 연세가 가장 많았던 선생님께서 사셨던 곳.
저랑 친구에게 친손자 대하듯 상냥하게 매일 저녁 붓글씨를 가르쳐 주셨던 곳입니다.
"매일 저녁 오던거 기억나?" 친구에게 물어봅니다.
"하하!" 붓글씨에 영 취미가 없었던 친구는 그저 웃기만 합니다.
"돌아가셨겠지?"
"그렇겠지.....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친구는 여전히 무심한 듯 대답합니다.
"그래...그렇겠다...."
둘 다 그렇게 멀찍이서 아무도 없는 텅빈 교실만 바라봅니다.
"너, 걔 기억하냐?" 말이 없던 친구가 먼저 물어 봅니다
"누구?"
"왜 그 니가 좋아했던...."
작은 나무들이 마치 그 시절 우리들처럼 빼곡하니 사이좋게 서있는 학교 뒷산을 바라보며 잠시 그 옛날 앳된 얼굴들을 더듬어 봅니다.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동그라니 큰 눈을 가진 평소 말이 없던 예쁘장한 단발머리 소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아!!!......OO이?"
시골 작은 마을, 같은 마을에 살았고 같은 학교, 것도 한 학년에 겨우 2개 반 밖에 없던 작은 학교에 같이 다녔지만
매일 그 소녀 얼굴만 보면 마냥 행복했던 기억만 날 뿐 그 소녀와 말을 나눈 기억은 당췌 나질 않습니다.
단지 기억이 안 나는 것 뿐인지 아니면 진짜 서로 말을 나눈 적이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지낸대? 잘 있겠지?" 이번엔 내가 무심한 척 친구에게 물어 봅니다.
"걔......."
"얼마전에..............갔다더라"
잠시, 아무 생각 아무 느낌이 나질 않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뭔지 모를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깊숙한 그곳으로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가슴 속에 뭔가 아주 뜨거운게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모르는 새 어깨도 살짝 들썩이기 시작합니다.
소리는 내지 않으려 애써봅니다. 친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손이 내 한쪽 어깨에 살며시 조심스레 내려와 앉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니 아련하게 보입니다.
까까머리에 코 밑에 콧물자국이 살짝 붙어 있는 7살짜리 꼬맹이의 얼굴이...
눈 주위를 손으로 만져보니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