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이 와서 하는 말이 태국엔 언제 다시 올거냐고 묻는다.
어차피 태국엔 다시 들어간건데 한국에서
볼 일 마치면 들어갈거다. 무슨 일이냐? 라고 답을 하니
직접 얼굴보고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가급적 빨리 와달라고 한다.
'잠시 안봤다고 벌써 내가 보고 싶은고얌? ㅋㅋ'...라고 생각하며
한국에서의 일이 마무리 되자마자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편의점에 들렀는데 마침 '바나나우유'가 눈에 띄었다.
갑자기 이게 태국에선 먹힐까?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궁금한건 또 못 참는 성격인지라
직원에게 바나나우유 세 박스를 달라고 했다.
작은 사이즈의 팩도 아닌 플라스틱 용기에 든 오리지날 바나나우유였다.
태국 공항에 내린 후 커다란 내 짐가방에다 바나나우유 세 박스까지 들고
직행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린 후 근처에 대기중인 오토바이 택시 2대를 불렀다.
한 대에는 내가 타고, 다른 한 대에는 짐가방이랑 바나나우유가 타고.
그렇게 호텔 앞에 도착하니 마침 호텔식당에 그녀와 그녀의 엄마,
이모, 이모 친구들에 이모 아들, 딸까지 단체로 앉아 있다.
오늘 무슨 곗날인가 생각하며 오토바이에서 내리는데
날 보더니 다들 엄청 반가워한다.
이모 친구들이 날 오빠, 오빠 부르면서 특별히 많이 반가워한다. ㅋㅋ
고등학생인 이모의 막내딸이 바나나우유 박스에 관심을 보인다.
꺼내서 식당 냉장고에 보관하기 위해 내가 박스를 열었고
안에 들어있는 바나나우유가 보이자마자
이모의 막내딸이 괴성을 지르더니 방방 뛰며 좋아한다.
왜 그러니? 아직 마셔 본 적은 없지만 TV에서 봤다던가
잡지에서 봤다던가 여튼 자기 친구들도 한국 바나나우유를 알고 있고
맛있다고 소문이 나 있어서 무지하게 마셔 보고 싶었단다.
그래서 거기에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씩 마셔 보라고 줬다.
다들 맛있다고 난리가 났다. 시원하지도 않고 뜨뜻했을텐데....
이모 딸이 한 박스 가져가면 안되냐고 묻길래 난 그러라고 했지만
옆에 있던 사촌언니인 총지배인 언냐에게 한 소리 듣고 4개만 허락되었다.
옆에 있던 이모 친구들 중 한 명이 '김찌(김치)도 먹고 싶다'고
한 마디 하니 이모와 이모 친구들 모두 꺄르르 웃느라 뒤집어진다.
동남아에서 현지인이 '김치'를 먹고 싶다고 말한다면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말 그대로 진짜 '김치'가 먹고 싶다는 의미도 되고
다른 하나는 한국인과 '관계'를 하고 싶다는 의미도 된다.
의미하는 바는 상황과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이 때 이모 친구들 중 한 명이 먹고 싶다고 말한 '김치'가
어떤 의미였는지는 설명 안해도 다들 아시리라...
태국은 성적인 부분이 한국보다 훨씬 개방적인 곳이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생활 속에 녹아 있고 유머, 노래, 춤 등에도 노골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한 면이 있는 듯 하다.
은밀한 신체 부위를 암시하는 사물도 한국과 비슷해서 의미가 통한다.
이 곳에서 있었던 재미 있었던 일들, 황당했던 일들, 화났던 일들, 야한 일들 등등
다 쓰자면 거의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은데
이 '썰'이 '투자하게 된 썰'이니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한다.
호텔에 도착한 그날 밤 그녀가 자기 방에서 얘기 좀 하자고 한다.
그녀는 호텔 1층 로비 한 쪽편에 따로 꾸며진 객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남녀칠십세 부동석이거늘...아니 다 큰 처녀가 것도 한밤 중에 자기 방으로 나를 불러?
허허....이런 경사가 있나.
그녀 방에 들어가보니 방 중앙에 있는 탁자 위에 레드와인과
안주거리들이 보인다. 앗! 이런.... 준비가 잘 되어 있군. 흐흐흐
그녀는 당시 40이 훌쩍 넘은 나이였지만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아직 결혼을 안한 상태였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
와인을 마시며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를 하는데 그녀가 호텔 얘기를 꺼낸다.
조만간 호텔 리노베이션을 할거라는 얘기와 호텔 옆에 붙어 있는 지상 3층짜리
건물 얘기다. 말이 3층 건물이지 우리로 치면 독립적인 3층짜리 건물 4개가
서로 딱 붙어 있는 형태이다. 이 건물도 이모의 소유라고 한다.
4개 중 하나는 현재 호텔 식당과 조리실, 식당 종업원들 숙소로 쓰고 있고
나머지 세개는 세를 놓고 있는데 그 중 한 개의 세입자가 곧 나간다고 한다.
그러곤 이어서 내게 가족사 얘기를 해준다.
막장 드라마 얘기가 아니라 그녀가 해준 실제 그녀의 가족사이다.
2탄에서 잠시 밝혔듯이 그녀 아버지는 젊어서 금은세공업을 했었고
이를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이후 태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벌어진다.
아버지에게 여자들이 많이 생긴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엄마를 발견했는데 그 때 장면이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베트남인인 엄마는 아버지로부터 쫓겨 났고 자신도 여동생과 함께 엄마와 생활을 하며 컸고
막내인 남동생은 아버지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학비는 도와줬지만 엄마에게 생활비는 전혀 주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왜 그녀가 40이 훌쩍 넘도록 결혼을 안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어쩐지....
그동안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엄마를 여러차례 만나보고 얘기도 해보고
평소 그녀를 통해 들어본 바
그녀의 엄마에 대한 느낌은 옛날 우리네 할머니들 같은 느낌이었다.
약해 보이지만 아주 강인한 여자!
남편의 바람기에도,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식들을 키워내는 그런 여성 말이다.
아주 어릴 적 나를 사랑으로 키워주신 나의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의 바람기 때문에
무척 고생을 하셨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가슴 한켠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이모는 가난하던 시절 언니인 그녀 엄마의 배려로 지금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정작 그녀는 지금 이모의 밑에서 호텔을 관리해주고 이모의 여러가지 사업적인 일을
처리해주며 월급을 받고 있다.
한 세대가 지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이거 뭐 대하드라마 '토지'도 아니고...허허 참
옛날 본인의 이모가 그랬듯이 이번엔 자신이 이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남편에게 버림받고 어렵게 자식들을 키우며 살아온 엄마를 위해 우뚝 선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아...ㅠㅠㅠㅠㅠㅠㅠㅠ
근데 왜 이런 얘길 나한테 하는걸까?
이번에 이모가 호텔 리노베이션을 하고 호텔 옆 3층 건물 한 동이 비는데
나에게 자기와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한다.
자신과 같이 호텔 리노베이션에 일부 투자를 하고 곧 비는 건물 한 동도 세를 내어
같이 스파를 열자고 한다.
왜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하느냐고 물으니
자기가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이 조금 있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라는데
주위에 같이 할만한 돈 있는 태국친구들을 많이 알고 있긴 하지만
돈이 걸린 문제에서 같은 태국인들은 믿기가 어렵다고 한다.
반면에 알게 된지 얼마 안되었지만 자기 느낌에 한국인인 내가 믿을만한 사람인거 같고
내 직장경력도 사업적으로 도움이 많이 될거 같단다.
응? 난 호텔 숙박 경험, 스파 경험이야 많지만 사업적으로는 전혀 모르는 분야인데?
준비와 관리 등 실무적인 건 자신이 맡아서 할테니 걱정하지 말란다.
내 방에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딴 후 담배를 한대 물고 앉았다.
언젠가 사업을 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기회란게 이렇게 느닷없이 오는구나.
순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중 하나인 '상도(商道)'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장사는 돈을 남기는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거라고.
결국 사업도 그렇고 우리네 인생사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거 아닌가.
엄마 앞에 우뚝 서고 싶다던 그녀의 말과 내 외할머니를 연상시키는 그녀 엄마의 인생역정을
떠올리며 그날 밤 그렇게 나는 마음 속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