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영화나 한 판 때리러 갈래?" 석구가 검은색 기지 바지를 주섬주섬 입으며 말했다.
"영화? 뭔 영환데?"
"뭐라카더라? 아! 우리도 할 말은...뭐시라카던데...여튼 홍콩영화다"
"할 말? 뭔 할 말?"
"모르지ㅋㅋ 나도 아직 안 봤으니...근데 보고 온 놈들이 잼있다 카더라~"
"그래? 그럼 마 함 가보지 뭐. 건 그렇고... 마! 빨리 입어라. 샘들 내려올 시간 다 됐다"
혹여 퇴근하시는 선생님께 걸리기라도 하면 보나마나 귀때기 잡힌 후
"대입이 낼모레인데..이 쉐기들이..아부지 모하시노?"... 하고 바로 싸대기다.
그렇게 우린 이번 주말엔 또 뭘 하며 놀지 주말계획을 짜며
학교 밑 인적없는 좁은 골목에서 서둘러 교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 입었다.
양 손은 검은색 기지바지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고
미리 준비해 온 까만 정장구두의 뒷꿈치를 꺾어 신은 채
따각따각 때론 따그닥따그닥 큰 소리를 내며
이런저런 쓰잘데기 없는 얘기, 주로 가시나 얘기를 하면서
우린 학교 밑으로 쭈욱 뻗어있는 아스팔트 길을 걸어 내려갔다.
황량하게 버려진 철길도 건너고 100번, 144번 시내버스 차고지도 지나
드디어 해운대 시장통 입구 맞은편 음악다방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석구가 솔을 꺼내 내게 한 까치 권하려다 이내 손을 멈추고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 듯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이따 가시나들 만날지도 모르는데... 솔은 좀 쪽팔리니까 88 하나 사까?"
"ㅎㅎㅎ 마, 니 X리는대로 해라~"
우린 다방누님이 가져온 88을 뜯어 한 대씩 피워 물었다.
석구는 담배연기로 도나쓰도 몇 개 만들고 공중에도 멋있는 척 후~ 불어대며
맛나게 담배를 빨면서 찬찬히 주위를 살피더니만
"오늘 물 X나 꾸리하네. 에이~씨, 노래나 신청해야겠다. 니 뭐 들을래?"
하늘이 무너질 듯 실망한 눈초리로 날 보며 물었다.
"난 테이콘미"
"뭐? 테...테 뭐라고?"
잠시 후
Take On Me의 시작을 알리는 강렬한 드럼비트가 내 가슴을 두드리고
정확히 6초후 나오는 한 줄기 씬디사이저 소리가 내 귓가를 짜릿하게 만든다.
Take on me (take on me)
Take me on (take on me)
I'll be gone
In a day or two
그래...노래가사처럼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담배꽁초가 노란 플라스틱 재떨이 위를 수북히 뒤덮었을 때 쯤
우린 음악다방을 나와 해운대 시장통 입구를 향해 걸었다.
주말이라 시장통은 여느 때보다 더 분주해 보인다.
같은 반 친구 집이자 시장통에 하나 밖에 없는 약국을 지나고
기름이 펄펄 끓는 커다란 가마솥에 닭을 통째로 튀기고 있는 통닭집도 지나고
토요일에 학교 끝나고 가끔 가서 먹던 한그릇 500원 시장통 짜장면집도 지나
드디어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큰 길로 접어들었다.
익숙한 바다내음이 코 끝을 찌르기 시작한다.
백사장 앞에 도착하자 우린 잠시 멈춰서 주위를 둘러봤다.
자주 보는 광경이지만 파란색 바다를 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고 설랜다.
저 멀리 푸른바다 수평선 위로 지나가는 배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야! 야! 저 봐봐라!!!" 석구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마치 큰 일이라도 난 듯 다급하게 말한다.
"어데?"
"저기! 저기!"
석구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니 전방 약 20미터쯤에
여고생 2명이 나란히 백사장 위를 걸어가는게 보인다.
그 중 한 명이 바닷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잡아 귀 뒤로 넘기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내 눈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아.......................................!!!
순간, 커팅크루의 노래가 떠오른다.
Oh Wha I, I just died in your arms tonight
It must've been some kind of kiss
I should have walked away, I should have walked away
노래가사처럼 그 때 그녀를 못 본 척 그냥 지나쳐 갔어야 하는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