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스토리3
<첫눈 오는 날은 언제나 사랑이 꿈틀거린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는 날
10월 31일
하늘이 정신 못 차리고 눈이 왔던 해 그날이지 않을까.
그 날은 겨울이 오기전인데도 첫눈이 왔다.
그 날도 눈이 오기 전까지는 그냥 저냥 평상시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 일 뿐이었다.
따분한 수업
수업 시간에 까먹는 도시락
길게 줄 서 있는 매점
침을 튀기는 꼰대선생들
뒤에서 못된 짓하는 아이들
집에 가라고 종이 울릴 때까지는 이런 따분함을 견뎌야 한다.
애꿎은 샤프를 딩굴딩굴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수업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에서 먼지 같은 게 날렸다.
화산재인가?
유달산에서 화산이 터질 리는 없고...
응? 눈...
설마 아직 10월인데...지금 그러면 겨울이네...
그럼 안되는데...
벌써...
뭐...
안될 것도 없다.
‘우아아아아아·~’
하늘이 쩌렁 쩌렁 울려 구름이 찢겨져 나간 듯 흩어진다.
까만 옷 입은 까까머리들이 소리를 있는 대로 질러 댄다.
강아지들도 아니고 눈 온다고 좋아라 하기는~~
어린 세키들 언제 철들래...
온 학교가 들썩여도 건물이 무너지지 않은 걸 보니 안심이 되긴 하네...
그렇게 소리 지를 정력으로 공부를 그렇게 해봐라·
선생도 수업하다 말고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추억 할 거리가 아직 남아 있는 건가
훌러덩 배겨 진 머리가 안쓰럽다. 밖에 나가면 추울텐 데 말이다.
아 뭐 오늘 눈이 왔으니 그 핑계로 과외는 건너뛰는 걸로...
과외 선생한테 전화해야겠다.
성공하면 눈이 오는 것도 나쁠 것 없는데 말이다.
눈이 와서 반 애들은 창문에 매미 떼처럼 들러붙어 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러렴
선생이 정신 차리고 수업 시작 하기 전 까지는 그러고 있자.
곧 미친 망아지들 처럼 밖에로 뛰쳐 나가면 더 좋고...
아무도 안보는 사이에 도시락을 꺼내서 한입 먹고 있었다.
‘피융~~~~~~툭~’
공기를 가르고 종이 뭉테기 하나가 나의 머리를 친다.
‘아니 어떤 자슥이 내 용안에 다가...·’
휙 뒤돌아 보니 반 문제아 이자 야구할 때 포수 보고 있는 기정이다.
누런 이를 드러내고 징그럽게 씨익 웃는다.
느끼한 표정으로 손으로 종이를 펼쳐 보라고 그런다.
‘에이 뭐하는거얏·~’
미팅 가자는 말이다.
어기적 어기적 기어코 내 자리로 오는 기정
내 자리에 와서 냄새나는 엉덩이를 책상 가생이에 걸터앉는 기정이다.
“아~그야 미팅하는데 같이 가야 쓰것다”
“돈 없어”
“돈 필요 없당께... 이 형님이 다 쏠텡께”
‘야야 니가 데꾸 오는애들 뻔하지...뭘“
“아야~ 걱정 하질 말랑께 아유 복장 터져...고건 나~가 보장한당께”
“나 학교 파하믄 과외 가야 해·”
“아따 과외하~냐 과외 불법인디 하믄 안되제...글씨 가잔께”
“딴 넘 데꾸 가라 난 안되니까”
“과외한다고 꼰지러 분다...”
“존만 세키 꼰지르기 전에 니 국민학교 때 방앗간에다가 불 지른 거 말할텡께...”
“.....”
“야 세키야 가자...니까 니 꼭 데꾸 나오라는 애가 있당께 아이고 답답해..”
“아유 꺼져라 내 인생이 안그래도 고달프다. 꺼져라”
며칠 전부터 저 지랄이다.
그러나 종이 뭉테기를 열어 본 나는 눈이 뎅그래져 기정이를 바라본다.
고릴라 같은 자식이 그거 보라는 듯이 더러운 입술을 씰룩거리고 웃어 제낀다.
종이에 적혀 있는 것은...
천 번을 불러도 모자를 이름 석자.
‘고은경’
안좌에 가면 할아버지가 계신다.
큰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의 큰 형님이시다.
할아버지 형제분들은 4남 1녀이시다.
둘째 할아버지와 셋째인 우리 할아버지는 동란 때 돌아 가셨다.
큰할아버님도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 가셨다.
큰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혼자 되신 할머니는 할아버지 몫의 유산을 받아
받은 유산은 황무지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처분해서
거의 대부분을 섬에 성당을 지으셨다.
남은 재산으로 목포 시대 오거리에 목욕탕을 하셨다.
괴팍하고 악독하기로 소문난 할아버지는 유독 날 챙기셨고 좋아 해 주셨다.
어릴 때 자주 찾아 뵈러 갔었던 것도 아들이 없었던 할아버지가 자주 부르셔서 그랬다.
할아버지 댁에 다니러 가긴 하지만 특별한 놀 거리가 없어 재미없어 하는 나를
또래인 옆집 계집아이랑 놀게 하셨다.
마당에 동백 나무나 학교에서 놀다 지치면 바닷가 갯벌에 나가 망둥이 처럼 기어 다녔다.
갯벌에 나갈 때는 언제나 양동이를 가지고 나갔다.
그 아인 갯벌에 손을 넣어 꺼내면 낙지가 손목을 타고 꿈틀거리고 나왔다.
잡은 낙지를 양동이 한 가득 담아 오면 그 아이 집에서 끓여 내는 된장국 맛을 아직도 잊지못한다.
그렇게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그 아이랑 놀았다.
까맣고 작은 짱돌 같은 아이
그 아이가 ‘고은경’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잠깐 스치 듯 보고 보지 못한 게 벌써 5년이던가 잊고 있었다.
섬에서 사는 것은 때때로 불편한 게 한 두 개 아니다.
바람이 불고 풍랑이 심하면 배는 뜨지 않았고
섬 사람들은 장 보러 나왔다가 돌아가지 못하는 날이면
할머니의 목욕탕에서 배가 뜰 때까지 며칠이고 지냈다.
그렇게 찾아 와 주는 동네 사람들을 좋아하는 할머니는 그럴 때면
잔치라도 벌려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시다.
동네 분들도 따뜻한 목욕탕에서 지내는 걸 친척집에서 신세 지는 것 보다 더 좋아했다.
그럴 때 은경이네도 몇 번이고 지내다 갔다고 했다.
물론 은경이도...
은경이를 처음 본 것은 올해 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있다가 옆 동네 아이들과 야구시합 내기가 크게 벌어 졌다.
현금과 야구 용품 일체를 걸고 하는 일생일대 최고의 내기시합이 있었다.
발단은 하굣길에 일어 난 사건 때문이다.
학교 파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은 한시간정도 걸린다.
버스 타고 가야 할 거리지만 버스비 아껴서 탁구를 치고 간다.
하굣길에 공사 현장이 있고 현장 끝나는 지점에는
뚝방길이 있고 뚝방길 건너편에는 문태 고등학교 아이들의 하굣길이다.
옆에 반 한아이가 돌을 던지다.
뚝방길 너머로...
“개 새키들아 디져부러”
씨~부리고 공사장 짱돌을 집어 던졌다.
‘아 개....저게 무슨 짓이야’
그러고 시작된 짱돌 투석전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자동으로 시작된 전쟁
처음에야 몇 개 안되었지만 인생이 재미 없는 것 투성이인
고삐리들한테 이것 만큼 재미난 일이 어디 있을까
죽어라고 던졌다.
누가 맞고 디지라고 던지지 않았으나 시간이 갈 수록 미친 고삐리들이늘어 갔고
날아 다니는 돌의 숫자도 늘어갔다.
박이 터져서 피가 나고 아이고 소리가 나도 멈추질 않았다.
양쪽 다 마찬가지였다.
나도 물론 던졌다.
어두워 져서도 한참을 그러고 던졌던 것 같다.
'퍽퍽...'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며칠 동안 소문이 나서 더 많은 아이들이 합세해 투석전은 심해졌다.
나도 돌에 맞아 머리가 터졌다.
그 때 맞아 지금도 이상한가 싶기도 하다.
확실히 그 때 이후 간뎅이가 부은 건 사실이다.
집에 와서 들키지 않게 어머니 몰래 빨래까지 해야 했다.
몇몇 아이들이 중학교 때 친한 친구를 통해 중재를 시도했다.
문고 애들하고 얘기 된 거는 결판을 내기 위한 야구 시합을 하기로 한 거다.
그저 일 만드는 일이라면 머리가 잘 돌아 간다니까.
현금과 야구 시합에 사용한 야구 장비 일체 고대로 두고 가는 내기 야구시합이다.
은경이를 다시 본 날이 야구 시합이 있던 날이었다.
학교 파하고 글러브랑 배트를 들고 나가려 집에 뛰어 들어 가 옷 갈아 입는데
할머니가 날 부르신다.
“아야 니 모르나?”
“네? 저 바빠요”
얼굴만 삐죽히 내밀고...
“뭘요?”
응?
식탁에 여자 아이가 밥을 먹고 있는데...
‘예쁘다’
“너 어릴 때 발가벗고 같이 놀던 부산댁 딸래미 알제?”
“야야 그러지 말고 좀 봐봐라 엄청 예뻐졌다”
‘무정댁이라면...은경이....’
“뭔... 발가벗고 놀아요...”
얼굴을 붉히고 식탁에 앉는다.
“니가 은경이라고...안녕”
“......”
우리 두 사람 대화에 쑥스럽다는 듯 살짝 미소만 짓는 은경이다.
그런데 예뻐도 너무 에쁘다.
할머니가 덜어주는 밥을 깨작거리며 살짝 살짝 은경를 보는게 고작이다.
“야가 목포여상 다닌단다야”
“목포여상? 너 밴드부지?”
“응”
‘고은경’
기억속의 은경이는 아주 아주 조그맣고 까맣고 까만 아이였다.
갯벌에 겁도 없이 손 집어 넣어서 낙지 잡고 대충 훑어 입으로 가져가는 그런 아이가 그 은경이라니...
오마니 이렇게 뽀얗고 그렇다니...
그것보다도
왜 어째서 못 알아 본 걸까
아침마다 등굣길 버스에서 보는 아이가 은경이었는데 말이다.
버스 타고 다니는 것들 중 절반 이상이 은경이 타는 버스 타려고 안달이 난
그 은경이 내 눈앞에 있고 그 은경이가 그 은경이라니...
은경이는 목포 시내에서도 유명한 아이다.
목포 행사할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고적대
그 고적대 중에서도 제일 예쁜 은경이가 내가 아는 그 고은경이란다.
그 아이를 보고 난 후 10초만에 사랑에 빠졌다.
그 은경이가 그 은경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 까지는 신경도 안썻다.
밴드부 복장으로 버스에 타는 목포여상 밴드부 아이들을 볼 때 마다
심장이 콩닥 콩닥 뛰긴 했다.
초미니 스커트에 뽀얀 허벅지를 그대로 내놓은 아이들은
알록달록 화장까지 해서 우리랑 다른 곳에 사는 딴 세상 아이들인 줄 알았지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우리 은경이다.
그 아이가 나랑 갯벌에서 놀던 은경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할머니 밥 잘 먹었습니다.”
“그랴 아야· 부산댁에게 잘 먹겠다고 전해 주렴”
“네 안녕히 계세요”
“......”
은경이는 그렇게 갔다.
“뭘?”
“응 낙지 좀 부탁해서 가지고 왔단다.”
“쟤는 아직도 낙지 잡나?”
“무슨...뭍에 나온지 벌써 몇 년째인데...”
“중핵교 들어서 왔당께”
"그래요“
“어디서 지내요?”
“용강동에서 자취한단다. 아이가 야물딱져야~~~”
“우리 장손도 저런 아랑 데불고 살아얄텐디...”
“아유 할머니도 참내...그래불까”
할머니랑 나는 한참 웃는다.
야구 장비를 챙겨서 야구 시합하러 가는 나
나는 설레어 그 날 이후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 같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말이다.
야구시합은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겼던 것 같기도 하고 시합 중에 패 싸움이 나서 파토난 것 같기도 하고
야구 글러브가 아직도 집 차오에 있는 것 보니 진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첫눈 오는 날 까까머리 아이들4명은 콜롬방에 미팅하러 나갔다.
우리들 8명은 커다란 맘모스 빵을 시켜서 우유랑 먹는다.
‘꺄르르르’
여고생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연신 자지러진다.
푼수 기정이 덕분이다.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는 나는 은경이를 흘끗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다.
우유 냄새인지 바른 분 냄새인지...
엄마나 할머니에게서는 맡지 못할 냄새 여고생들의 냄새가 몽롱하게 만들었다.
콜롬방의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솜털을 뿌리 듯 하늘거리며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늦은 시간까지 콜롬방에서 웃고 떠들고 다들 재미지게 놀았나보다.
각자 집으로 돌아 갈 때 은경이 집까지 바래다주러 그 아이의 집까지 걸었다.
버스 타면 10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지만 우린 걸었다.
하얗게 물들어 버린 끝도 없는 초원을 걷는 것 같았다.
모든 걸 집어 삼킨 하얀 눈은 커다란 캔버스가 되어 우리들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그 곳에 우리들의 이야기만 쓰면 된다.
은경이 쓴 털모자에는 몽실 몽실 내리는 눈이 많이도 쌓였다.
“서울간다매”
“,,,,,,”
"응 겨울이 오면... 방학 시작하믄 간다."
한참을 걷고 있을 때 먼저 말을 꺼낸 건 은경이다.
“좋겠다 나도 서울에서 공부하고 싶었는데...”
“아니 안좋아...”
“왜 안좋아... 부럽다니까”“......”
“니 공부 잘한다더라”
“뭐 별로...너야 말로 공부 잘한다면서...”
“......”
“난 그림을 그릴거야”
“그림?”
“응”
“그림 잘 그리나?”
“아니 그냥 좋아해...”
“그래 그림도 잘 그리고...못하는 게 없네...”
날 보고 웃어주는 은경
“은경이는 뭐가 되고 싶은데...”
“응?”
“졸업하면 뭐 할건데?”
“아 졸업하면...그냥...아직...”
“대학교 가고 싶은데...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대학은 서울로 와...”
“응...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꼭... 와서 보자”
“......”
첫눈 오는 날 하얀 밤을 우리들은 걷고 또 걸었다.
은경이를 다시 본 것은 십년이 지난 후이다.
은경이는 끝내 대학을 가지 못했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 바로 취직을 해야 했다.
할머니가 오랜 지병으로 돌아가신 날 은경이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 부산댁 가족이 왔다.
물론 은경이도 볼 수 있었다.
은경이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화장품 외판원이 되었다.
예쁘장한 외모 덕분에 아주 인기 있어 돈도 잘 벌었단다.
“은경아”
“응”
“왔어”
“응”
“결혼식장에 가지 못해 미안”
“아니 뭐 군대 있었잖아...”
‘아이는?“
“둘”
“아들 딸?”
“아들만 둘이야”
“그래 잘 살지...?”
“응...니는 재밌나?”
'응 아니...재미없다'
"근데 은경아 고등학교 때 버스에서 나 알아 봤나?"
"응 첫눈에 알아봤다"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