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정 본은 하동 문열공파 16대손이시다.
어릴 떄는 영재 소릴 들었지만 나이 들어서는 좀처럼 관직을 받지 못했다.
일찍 가정을 이루니 책임감도 있을 법 한데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동네 점방에서 훈수나 두며 지냈다.
동가숙 서가숙하는 처지로 가세가 엉망이었음에도 가정을 돌보는 일이 없었다.
쌀독에 쌀이 없는 날이 더 많았으나 걱정하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주막에서 만난 이하응이 할아버지를 마음에 들어 했다.
대원군이 되어 몇번이고 청을 넣었을 때도 콧방귀만 뀌는 분이었다.
"주막에서 술 동냥이나 하던 이하응이가 언제적 부터 대원군이더냐"
할아버지는 슬하에 네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 중 셋째 아드님이 우리 증조부 되시는 분이다.
셋째를 보신 날 할아버지는 흥선대원군이 인편을 보내 설득하니 그제서야 수락하였다한다.
나라에서 부름을 받았을진데 마냥 거절하는 것도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 하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친지들과 친우들은 만세를 불렀다.
세번째 만에 수락하니 집안에서는 잔치를 벌였다한다.
대원군은 삼고초려하여 귀하게 모신 분이니 대접에 소흘함이 없도록 신신당부 하셨다 한다.
때 되면 잊지 않고 세심한 배려를 하셨다하니 그가 할아버지를 귀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대원군은 경북궁 재건 중에 화재가 나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곧고 타협없는 청렴한 성품으로 맡은 일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해 나갔다.
대원군은 누차에 걸쳐 자신의 수족과 같음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한다,
대원군은 그 후에도 곁에 두고 중요한 일을 맡기셨음은 당연하겠다.
할아버지는 대원군의 심복 중에 심복이었음을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기 몇해 전 할아버지는 정적들의 제거 대상이었다.
흥선 대원군의 사람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할아버지 또한 유배 길에 오르셨다.
유배지는 머나먼 전라도 땅
청호에서 배를 타고 반나절을 들어 가야 하는 곳이다.
신안군 안좌도
식솔들을 데리고 귀양을 가는 할아버지는 낙담하는 일은 없었다.
대원군의 복권과 귀국을 위해 먼 섬에서도 무진장 노력하셨다.
아쉽게도 오랜 귀양살이는 식솔들의 생활은 고되었다.
농사와 고기를 잡는 일을 해야 했으며 같이 간 종복들도 면천 시켜 주어
자유롭게 살게 하였을 때 쯤은 섬 생활도 이력이 났다.
할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흥선 대원군의 부고를 들어야 했다.
머나먼 섬에서 무기력하게 받아야 하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리라
할아버지는 하늘을 우러러 대성통곡하였고 정적들을 원통해 하였다.
그럼에도 유배살이의 곤궁한 처지에 어찌지 못했다,
흥선 대원군의 죽음으로 돌아 갈 곳 없는 처량한 신세
의욕을 잃은 할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낙담이 컷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귀양이 풀린 것은 흥선대원군이 돌아가신지 4년째 되던 해였다.
서울 집으로 귀향하는 할아버지
길을 나서는 식솔들은 네 아들과 할머니 뿐이었다.
돌아가기 하루전날 나의 증조 할아버지인 세째아드님은 서울에 가지 않겠다 전했다.
가족들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동네 처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증조할아버지
이미 본가로 돌아 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증조 할아버지는 가족들과 헤어져 낙도에서의 생활을 선택한 것이다.
귀향 하루 전날 동네 처자인 우리 증조 할머니와 혼례식을 올렸다.
정한수 뿐인 아주 조촐한 혼례였다.
동네분들 모두 그들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오랜 유배생활을 벗어난 가족들에게도 축복을 마다 하지 않았다.
비록 가족들과 헤어지는 날이이었으나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날이기도 하다.
가족과 마지막임을 알기에 증조할아버지는 그날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 하셨다.
증조 할아버님와 증조 할머님은 슬하에 4남 2녀의 자식을 두셨다.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님 본인들은 섬을 떠나신 적이 없었다.
서울 아버님의 부고를 받았을 때에도 가보지 못하여 목놓아 우셨다.
본인들과 다르게 자식들은 서울 본가로 보내 공부를 시키셨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행복하셨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