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칠년전 추석이 지난 가을 어느 월요일 아침.
밤새 덤비는 모기떼의 시달림에 선잠에서 깨어나 짜증이 한가득일때
어림짐작으로 오른쪽 팔에만 십여방의 모기물린 자국을 보며
기분이 매우 찝찝함을 누르고 마저 잠을 청했으나 한시간여 지난후 깨어나
여느날 처럼 출근을 준비하던중 들려오는 당시 6살배기 아들놈의 도란도란 통화소리에
거 참 별일이네 벌써 일어났나? 하고 아들녀석에게 누구랑 통화한거니 물으니
아들녀석 왈 "응 할아버지랑 통화했어" 란 해맑은 웃음에 시계를 보니 오전 6시30분
'야 이놈아 그렇게 일찍 전활하면 어째? ' 하니 "할아버지가 보고싶어서 헤헤~"
그리곤 서둘러 출근을 했고 정신없이 오전 일과를 마칠 무렵 집에서 걸려온 전화.
집사람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가느다랗게 떨리는 음성.
"아버님이 쓰러지셨데 빨리 와, 지금 응급실에 계신대..."
순간 마치 둔기로 뒷통수를 맞은양 멍하니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차를 몰고 집으로가 집사람과 애들을 태우고 출발했으나 도저히 운전을 할수 없어서
죽전 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곤 한양대 병원 응급실로 향했지요..
막 도착하기 직전에 집사람이 울면서 이미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말에 또 한번 무너져 내렸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하니 운명하신지 세시간이 지난후 였습다.
믿기지가 않았지요, 엊그제 찾아뵙고 어제 저녁까지 맛나게 드시는것을 보고 집으로 내려왔는데...
눈물조차 나지가 않더군요, 아니 이건 꿈이려니 아주 지독한 악몽이려니.....
막상 혼이 빠진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아버님의 육신을 마주하니
온몸에 난 구멍이란 구멍에서 눈물 콧물 목구녕에선 기괴한 소리를 내며 꺼이꺼이 목놓아 울어버렸습니다.
정말 괴로운것은 부친의 염을 할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님의 존안을 뵙는것이라 더 했을것입니다.
그리 장례를 치르고 선산으로 뫼신후 제일 걱정인것은 어머님의 건강이였지요.
당시 부모님께서 함께 운영하시던 미니슈퍼는 누님네 집이 바로 근처라
초등학교 4학년인 큰조카가 어머니를 많이 도와드렸습니다
지금도 어머니께선 큰조카가 없었으면 견디기가 힘들었을꺼라 말씀을 하십니다.
상을 모두 치르고 직장에 복귀해서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우리의 소소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매주 주말엔 본가에서 보내는게 암묵적인 룰이되었고 아이들도 역시 주말이나 공휴일 전날은
당연하다는듯이 지들의 보따리를 챙기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을 했으니 바로 이런것들이었으니
어쩌다 회식이라도 해서 노래방을 가면 한번도 아버님을 뫼시고 가지 못한것이 걸리고
맛난 음식을 먹을때, 휴가로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갈때 등등...
왜 아버님을 모시고 해보지 못했던것이 그리도 많은지....
참으로 허 한게 남몰래 눈물도 참 믾이 흘렸었네요.
아버님께서 그리 황망하게 떠나신후 모든게 제 몫이였습니다.
그간 아버님께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도 못해본 일들이 전부 제 손에서
해결해야될 일들이었지요, 종중일 이며 일가 친척 집안의 대소사며....
그리하여 思父哭아닌 思父曲을 쓰며 아버님을 추모하였는데 글이 낙서 수준이라
이리 올리기엔 부족하나 올려 봅니다.
그리운 님.
지금 너무도 그립고 보고싶습니다.
제게 주신 사랑의 마음이 그립습니다.
하나 하나 기억속에 남은 따스했던
눈길이며 손길이 아직 가슴속에 남아있는데
그토록 애정어린 사랑이 그리운것은
다시는 느끼지 못함에 현실의 마음이 너무도 시리고 애절합니다.
태산이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도 막아주시던
커다란 우산이셨습니다
장대비 폭우도 막아주시던
태산도 큰 우산도 없는 지금은
황량한 벌판에 발가벗겨진 몸으로
그 큰 품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오십이 가까운 지금에
처음으로 간절히 불러봅니다.
아버지,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당시 제가 즐겨부르던 부르며 눈물 콧물 흘리던
노래 정수라의 아버지의 의자 들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