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창문 커튼을 걷어보니 밖은 이미 어둑어둑하다.
장거리 비행으로 피곤했던지라 세상 모르고 잤나부다.
마이클 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자다 일어난 목소리다.
"마이클, 잘 잤냐? 뭐 좀 먹으러갈래? 10분안에 준비하고 1층 로비에서 보자"
잠시 후 마이클은 누가 봐도 자다 방금 일어난 머리 모양을 한 채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녀석, 그래도 아시아 출장은 이번이 처음이라 그런지 얼굴엔 설레임이 잔뜩 묻어 있다.
마이클은 사내에서 마컴, 특히 광고쪽 전문가다.
우리 회사엔 브랜드들도 많고 전세계에서 광고비 지출이 가장 많은 회사이다보니
광고쪽은 항상 바쁜데 그 와중에 해외출장이라니 해외여행처럼 신이 난 모양이다.
"어디가서 뭐 드실거에요?"
"여기까지 왔으니 여기 음식 먹어볼래?"
"넹"
"근처에 내가 아는 식당이 있으니까 가보자"
그렇게 우리는 호텔을 나와 온갖 유혹과 그보다 더 큰 위험이 뒤섞여 있는 마닐라의 밤길을 나섰다.
보통은 출장기간 내내 현지 법인에서 차량, 운전기사, 비서를 제공해 안내를 해주지만
공항으로부터 호텔에 도착한 후 이미 다 돌려 보낸 상태라 그들은 내일 아침이나 되야 올 예정이다.
시내 한복판이라고는 하지만 자칫 길을 잘못 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기에
난 기억을 최대한 되살리려 애를 쓰며 걸었다.
LA카페 근처 지저분하고 좁은 인도를 걷고 있었다.
"저기 LA카페가 있네요? ㅎㅎ"
LA 출신인 마이클이 신기한 듯 한 마디 한다.
"저긴 니가 생각하는 그런 카페는 아닌데, 가보고 싶음 밥 먹고 이따 가봐 ㅎㅎ"
"네? 무슨 카페인데요?"
LA카페에 대해 호기심이 발동한 마이클에게 잠시 설명을 해 준 후 다시 길을 나서려는데
인도 한 쪽에 혼자 쭈그려 앉아 있는 소녀가 보인다.
이 밤중에 위험한 곳에 왜 혼자? 괜한 호기심이 발동해 가까이 가서 물었다.
"왜 여기 앉아 있니?"
소녀는 부끄러운 듯 내 얼굴이 아니라 다른 쪽을 보면서 씨익 웃기만 한다.
따갈로그는 겨우 몇 마디만 아는 수준인지라 영어로 물었는데 못 알아들은건가?
가까이서 보니 잘해봐야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녀다.
작고 마른 몸에는 꽃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고,
입술엔 옅은 립스틱을 발랐고
어깨엔 아이들이 맬 법한 헬로키티 같은 무늬가 있는 작은 핸드백을 메고 있는데
발에는 낡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어리게 보이지 않으려고 서툴지만 한 껏 어른티를 내려고 노력한 모습인데
마치 어린 딸이 엄마 흉내를 낸 듯한 모습이었다.
소녀의 눈 높이에 맞춰 나도 쭈그려 앉아 천천히 다시 한 번 물었다.
"여기...위험해...왜...혼자 있어?"
그러자 소녀는 여전히 쑥스러운 미소를 지은채 팔을 쭉 뻗어 LA카페 쪽을 가리키며
"기다려요...언니"
서툰 영어로 답을 한다.
아...
LA카페에는 같이 못들어가니 언니를 여기서 기다리는 모양이다.
여기는 마닐라 중심의 유흥가다.
사방팔방에서 온 외국인 여행객들,
그들을 노리는 유흥업소들과 필리핀 밤의 여성들,
그리고 불량배, 마약, 퍽치기, 떼로 다니며 강제구걸을 하는 아이들 등
어린 소녀가 혼자 있을만한 곳은 없다.
"너 밥 먹었니?" 밥 먹는 흉내를 내며 물었다.
또 한껏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젓는다.
"배 고프니? 밥 먹으러 가자...같이...시니강...라푸라푸...아도보...냠냠"
소녀는 시니강, 라푸라푸, 아도보 라는 말에 함박 웃음을 짓는다.
배가 고팠는지,
아니면 혼자 언니를 기다리는 것이 지루했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밖에서 위험하게 혼자 기다리는 것보다
우리를 따라 나서는게 더 낫다고 판단했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소녀는 우리를 따라 나섰다.
쓰다보니...
손꾸락에 쥐가 나서
이만 총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