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밖으로 나오니
경사진 언덕에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운전기사의 뒤를 따라 사람 한 둘이 겨우 다닐만한 좁디 좁은 경사진 골목길을
경사를 따라 거세게 흘러내리는 빗물이 신발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올랐다.
이 곳 집들은
벽은 겉에 미장도 없이 회색 시멘트 블럭으로만 되어 있고
지붕은 양철지붕이요
집 입구의 문은 당장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이 낡은 작은 나무 문이거나
아니면 아예 커튼처럼 천으로만 되어 있었다.
이 집과 저 집을 구분짓는 담벼락 같은건 없었고
오직 구불구불 오르락 내리락 좁은 골목길이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운전기사가 걸음을 멈춰 서더니
커튼으로 된 문을 향해 따갈로그로 크게 한 마디를 하니 잠시 후
커튼을 제치고 소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얼굴을 내민다.
그녀는 운전기사를 보자 알아보는 듯 환한 미소를 짓는다.
운전기사가 그녀에게 따갈로그로 뭐라뭐라 얘길 하자
그녀는 내 얼굴을 한 번 보더니 이내 집 안쪽을 향해 따갈로그로 소리를 쳤다.
잠시 후 소녀가 상기된 얼굴을 내밀었다.
나를 보더니 역시나 특유의 부끄러운 미소를 짓는다.
소녀의 어머니는 커튼을 들어올리며 나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난 운전기사에게 차에서 기다리라고 한 후 소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의 집 역시 시멘트 블럭으로 된 벽과 양철 지붕으로 된 집이었다.
커튼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낡은 식탁과 주방기구들이 있는걸로 보아
여기가 부엌인 모양이다.
부엌의 바닥은 그냥 흙으로 되어 있었고 살짝 울퉁불퉁한 것이
가마솥이 있고 아궁이에 군불을 때던 옛날 우리네 시골집 부엌 바닥과 닮아 있었다.
주방 한 쪽 벽에 문 대신에 커튼이 있는걸 보니 그 너머가 침실이 아닐까 싶었다.
한 손엔 케익과 빵을, 다른 한 손엔 우산을 든 채 어색하게 서있는 나에게
소녀의 어머니가 식탁 앞 의자에 앉으라며 손짓으로 권한다.
내가 식탁 앞에 앉자 소녀의 어머니는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밥이 담긴 접시 하나와 냄비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놓더니
냄비 뚜껑을 열어 냄비 안을 보여줬다.
간장으로 간을 한 듯한 검은 국물 그리고 그 국물 속에 큼직한 고기 덩어리들이 보였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난 가슴 한 켠이 뜨거워지며 아무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
차창 밖으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어둑어둑해진 하늘이 보였다.
소녀의 어머니가 소녀와 무척이나 닮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멍하게 앉아 있는 내게 먹으라며 손짓으로 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시멘트 블럭과 녹이 쓴 양철지붕 집
커튼으로 된 문
내 앞에 차려져 있던 밥과 고기
약간의 밥과 작은 고기 덩어리 하나를 먹은 후
감사의 인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가려는 나를 미소로 배웅하던 소녀의 얼굴도...
간 밤에 잠을 설친 탓에 새벽녘에 눈을 떴다.
창 밖을 보며 커피 한 잔과 함께 담배 한 대를 피운 후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어제 해둔 예약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일요일 아침, 호텔 리무진은 그렇게 다시 한 번 소녀의 집을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