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방 전화벨이 울렸다.
운전기사가 돌아왔다는 프론트데스크의 전화였다.
로비로 내려가보니 난 누구? 여긴 어디? 표정을 한 두 모녀가
로비 한 쪽에 있는 의자에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게 보였다.
날 보더니 반가운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침 점심 때였기에 그들을 호텔 식당으로 데려갔다.
호텔 메뉴엔 사진도 없고 영어로만 적혀 있기에
내 맘대로 스테이크, 샐러드, 수프 그리고 필리핀 음식 몇 가지를 주문했다.
소녀와 어머니는 다른 음식은 손도 안 대고 맨밥과 수프만 먹길래
내가 다른 음식들도 맛 보시라는 뜻으로 손짓을 했더니 소녀 어머니가 겸연쩍게 웃는다.
소녀 왈 "퍼스트 타임...디스 푸드(이런 음식 처음이에요)"
그래서 내가 물었다. "졸리비는 먹어봤니?"
졸리비는 필리핀에서 가장 대중적인 패스트푸드 브랜드다.
먹어본 적 없다고 소녀가 답한다.
하긴 졸리비조차도 필리핀 도시 서민층이나 시골사람들에겐 부담스러운 음식이다.
내가 스테이크 조각과 샐러드를 소녀와 어머니 접시에 덜어주니 그제서야 먹는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물었다.
"투데이...위드 미...오케이?"
소녀가 어머니에게 따갈로그로 물은 후 내게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표시를 한다.
식사가 끝난 후 리무진 기사를 다시 불렀다.
우리는 필리핀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쇼핑몰이라며 자랑하던 SM몰로 향했다.
우선 신발가게를 찾아 갔다.
소녀를 만난 첫 날 봤던 다 떨어진 낡은 슬리퍼가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소녀와 어머니의 신발 몇 개를 산 후 옷가게에도 들러 옷도 몇 벌 샀다.
학용품을 좀 사주려고 학교에 다니는지 물었더니 소녀의 답이 없다.
그렇게 쇼핑도 하고, 쇼핑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구경도 좀 한 후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한 때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라는 얘기도 있었던 마닐라 베이.
직접 와 본 사람들은 느낄 것이다.
여기가 도대체 뭘 보고 세계 3대 미항이라는건지?
아마도 그 옛날 스페인 정복자들이 처음 왔을 때는 아주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우리 셋은 바다를 향해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근처에서 팔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소녀와 어머니에게 주었다.
데이트하고 있는 커플들과 놀러 온 가족들도 보이고
그들 사이로 비둘기인지 갈매기인지 새들이 분주히 날아 다니며 바닥에 떨어진 먹이를 찾고 있었다.
소녀는 근처 여기저기를 돌아 다니며 정박해 있던 커다란 크루즈선도 구경하고
모이를 먹고 있던 새들도 놀래켜 보고,
데이트 하고 있던 커플들 근처에도 가보며
한 손엔 아이스크림을 든 채 해맑은 얼굴로 근처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난 그런 소녀와 수평선 위로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해를 멍하니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소녀에게 물었다. "헝그리?"
고개를 끄덕인다.
"코리안 푸드, 오케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와 어머니를 내가 전에 가 본적이 있는 한국식당으로 데려갔다.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고기가 맛있는 집이다.
소녀와 어머니는 삼겹살를 먹고 난 소주를 마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었을 때쯤 소녀 어머니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봉투를 건네며 이걸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뭐라고 그런 말을 하나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통장으로 매달 송금을 좀 해주고 싶었으나 물어보나마다 이들에게
은행통장이 있을리 만무하다.
믿기기 않겠지만 아직까지도 동남아엔 은행 문턱조차 못 밟아 본 사람들이 꽤 많다.
신용카드는 커녕 은행통장조차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통장을 개설할 때 서민들에게는 부담되는 액수를 입금시켜야 만들어 준다.
그리고 일정기간 통장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돈은 차감되어 없어진다.
신용카드를 분실해서 새로 신청하려 해도 카드사에 따라 몇 만원을 요구한다.
아직까지도 동남아에서 신용카드 소유나 후불제 통신 가입은
안정된 직장(회사)과 일정액 이상 고정된 수입을 입증할 수 있는 대도시에 거주하는
전체 인구대비 비율로 봤을 때 극소수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동남아 사람들이 우리가 당연하게 이용하는 신분확인을 통한 전화요금 후불제가 아니라
대부분 편의점 등에서 돈 내고 사용시간을 충전하는 선불제를 이용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이와 같다.
그래서 동남아인 친구가 있을 경우, 그들의 전화번호가 수시로 바뀌어 연락두절이 되는 경우가 많다.
동남아 경제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넘어야 할 산은 다른 인프라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금융이다.
산업 인프라와 공장을 건설해 경제발전의 엔진을 만든다해도
그 엔진을 돌릴 연료인 금융이 매우 부실하기 때문이다.
경제개발에 열을 올리며 외자유치를 하고 있는 인구수 세계 4위의 인도네시아도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로 취약한 금융 자본과 시스템을 꼽고 있다.
한국식당에서의 저녁식사 후 우리 셋은 호텔로 돌아왔다.
운전기사에게 소녀와 어머니를 집까지 잘 데려다 주라며 팁을 좀 주었다.
소녀에게는 전화하는 흉내를 내며 내가 가끔 전화할테니
아까 쇼핑몰에서 사 준 핸드폰 잃어버리지 말고 잘 보관하라며 마지막 당부를 했다.
혹시나 못 알아들었을지도 몰라 운전기사에게 따갈로그로 통역도 부탁했다.
차가 출발하고 이내 차 뒷좌석에서 소녀가 뒤돌아보며 내게 손을 흔드는게 보였다.
잘 가렴~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미국으로 돌아왔다.
한 달에 두어 번씩 소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그렇게 반 년쯤 지났을까?
어느 순간부터 소녀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당장 가보고 싶어도 거리가 너무 머니 맘처럼 쉽지 않다.
그 얼마 후 중국출장이 있어 중국에 간 김에 마닐라로 향했다.
전에 묵었던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예전 그 운전기사가 있는지 프론트에 물었다.
내일 출근한다고 해서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렸다 아침 일찍 소녀의 집으로 향했다.
한 시간 반 동안의 설레임 반 걱정 반 끝에 소녀의 집에 도착했다.
소녀의 집 앞에서 운전기사가 소녀를 불렀다.
잠시 후 사람이 나왔고 운전기사가 그와 따갈로그로 대화를 한 후 내게 말했다.
얼마 전에 이 집으로 이사왔는데 이 사람은 소녀와 어머니를 모른다.
옆 집에 물어보라고 한다.
운전기사를 앞세워 소녀의 집과 붙어 있는 집들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녀가 어디로 갔는지 물어봤다.
이사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고,
소녀 어머니 고향으로 간다고 말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 이사갔는지 그리고 소녀 어머니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
어쨋든 소녀와 어머니는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았다.
그 후 시간이 한참 흘러 다시 필리핀 출장이 있었고
혹시나 해서 다시 한 번 그 소녀의 집을 찾아갔지만 소녀의 행방을 찾을 수는 없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처음 소녀의 집으로 찾아 갔을 때처럼 비가 억수같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에는
가끔 그 소녀 생각이 난다.
길에서 처음 만났을 때 수줍어 하던 얼굴
차 뒷좌석에서 내게 손을 흔들어 주던 마지막 모습도...
오늘도
그 시절 그 소녀가 어디선가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기만 바랄 뿐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