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왕(文王) 6년 섣달 그믐,
부산포(釜山浦)에 모인 한국(韓國)의 장졸(將卒)들은
부산포(釜山浦)에서 수군(水軍) 군선(軍船)을 타고 출병(出兵) 하였다.
일찌기 세종(世宗) 1년,
대왕(大王)께서 이종무에게 왜구(倭寇)들의 섬 대마도(對馬島) 정벌(征伐)을
명(命)하신 이후 가장 큰 원정군(遠征軍)이었다.
술시(戌時)에 출발하기로 하였으나 수군(水軍)을 이끄는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가 늦게 당도하여
해시(亥時)가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좌군사(左軍司) 치저랑(治抵郞)과 우군사(右軍司) 아이유장(亞二柳將)이
중차대(重且大)한 국사(國事)에 늦은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를 크게 꾸짖으며 물었다.
"이런 중(重)한 날 경(卿)은 뭐하고 오느라 늦었는가?"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는 나즈막한 소리로 답하였다.
"장보고..."
답(答)을 들은 치저랑(治抵郞)과 아이유장(亞二柳將)은
"아..." 깊은 탄식을 하며
평소 집에서 자신들의 처지와 같음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껴
더 이상 장보고(張保皐)를 추궁하지 못하였다.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장보고(張保皐)와 그의 부장(副將) 수군만호(水軍萬戶) 수달(水獺)은
일찍부터 서쪽 바다 건너 장개국(掌匃國), 동쪽 바다 건너 왜국(倭國)은 물론이요
멀리 월남(越南), 신가파(新嘉坡), 비립빈(非立賓)을 제 집처럼 드나들고
더 멀리는 일만삼천리(一萬三千里)나 떨어진 아유타국(阿踰陀國)까지 항해하여
허왕후(許王后)를 모셔온 적도 있는 바다에 능한 자들이었다.
축시(丑時) 즈음,
병사들을 둘러보던 좌군사(左軍司) 치저랑(治抵郞)에게
부장(副將) 진파(進破)가 와서 선내(船內)에 수상한 여인(女人) 있다고 고(告) 하였다.
이에 치저랑(治抵郞)은 "이게 어찌된 일인고?"하며 황망(慌忙)한 마음에 급히 달려갔다.
마침 갑판 위에 얼굴을 가린채 서 있던 여인(女人)을 보고 물었다.
"그대는 누구며 여긴 어인 일인고?"
그러자 그 여인(女人)이 답했다.
"저는 20대 남자(男子)이구
군대는 해병대(海兵隊) 12사단(師團) 나왔구
주특기(主特技)가 탱크운전임~"
장수와 병사들 모두 어찌된 일인지 망연자실(茫然自失)하고 있을 때
우군사(右軍司) 아이유장(亞二柳將)이 급히 나타나 말하길,
"저 아이는 원정(遠征)을 기록하기 위한 서기(書記)로 내가 불렀소이다.
일찌기 비립빈(非立賓) 바다에서 잠수(潛水)를 한 적도 있는 아이올시다. 허허허"
"보미(寶美)는 어서 좌군사(左軍司)께 얼굴을 보이거라" 아이유장(亞二柳將)의 말에
여인은 덮고 있던 장옷을 거두고 얼굴을 보였다.
보미(寶美)의 얼굴을 본 치저랑(治抵郞), 진파(進破), 혈가(孑歌),
장보고(張保皐), 수달(水獺)을 비롯한 모든 장졸(將卒)들은 하나같이 춤을 추며 만세를 불렀다.
변방 누욕(樓浴)을 지키다 온 부장(副將) 혈가(孑歌)가 보미(寶美)의 미모에 놀라 말하길,
"경국지색(傾國之色)이로고...나와 같이 놀던 서역(西域) 미녀 못지 않도다"
이 소리를 들은 보미(寶美) 왈,
"아닌데...그거 뽕인데..."
옆에서 듣고 있던 치저랑(治抵郞)이 이에 질세라 보미(寶美) 옆에 가까이 다가선 후
보미(寶美)의 귀에 대고 나즈막히 말했다.
"낭자(娘子) 안색(顔色)이 어째 허기가 진 듯 하오만...
내가 밀 반죽 위에 붉은 야채를 잘라 얹고
염소젖을 굳혀 만든 가루를 뿌린 후
화덕에 구운 맛난 전병을 만들어 주고픈데....
어떻소? 나와 같이 가지 않겠소이까?"
이에 보미(寶美)가 답했다.
"꺼져"
이렇게 홀연히 나타난 보미(寶美)로 인해 사기가 충천(衝天)한 장졸(將卒)들을
실은 한국(韓國)의 군선(軍船)들은 점차 범아국(梵亞國)에 가까워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