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왕 6년 경인월(庚寅月) 계유일(癸酉日)
바닷길을 떠난지 한 달여.
오시(午時) 무렵
장졸(將卒)들을 실은 한국(韓國)의 군선(軍船)은
비립빈(非立賓)에 당도하였다.
좌군사(左軍司) 치저랑(治抵郞)은 부장(副將) 진파(進破)를 불러
군사들을 먹일 곡식과 물을 구해오라 명(命)하였다.
위험을 무릎쓰고 진파(進破)는 십 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하선(下船)하였다.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산 속으로 들어갔다.
정신없이 산중(山中)을 이각(二刻) 가량 헤매었을 때 연기 한 줄기를 발견하였다.
연기를 따라 가보니 오두막 몇 채가 모여 있는 작은 부락(部落)이 나타났다.
그 곳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불 앞에 모여 고기를 굽고 있었는데
피부는 검고 신장은 사척(四尺) 이촌(二寸)을 넘지 않으며 몸에는 문신(文身)이 많았고
의복(衣服)을 걸치지 않았다.
불시(不時)에 들이닥친 진파(進破)의 군사들과 마주친 무리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였다.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굽고 있던 고기를 진파(進破)에게 바쳤다.
"아니...난 고기는 안 좋아하는데?...목이 마르니 마실거나 좀 주시구려"라며
진파(進破)는 손을 입가에 갖다대며 물 마시는 모양을 하였다.
무리의 사람들이 이내 작은 항아리를 진파(進破)와 군사들에게 가져왔다.
항아리에는 삭힌 냄새가 나는 갈수(褐水 : 갈색 물)가 들어 있었다.
독(毒)을 탔을거라 의심하여 군사들 중 누구도 마시겠다 나서는 자가 없자
하는 수 없이 무리의 대장(隊長)인 진파(進破)가 나섰다.
갈수(褐水)를 잔에 따르자 백포(白泡 : 하얀 거품)가 일었다.
의심이 들었지만 더위와 갈증에 지친터라 백포(白泡)가 떠 있는 갈수(褐水)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갈수(褐水)를 단 번에 들이킨 진파(進破)가 갑자기 크게 탁!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 놓고 말하였다.
"캬야~~~~~~~얘들아, 이거 목넘김이 부드러워. 깔끔한 라거 맛이야.
남국(南國)의 향취가 느껴진다 야. 오늘은 이거닷!!! 이걸로 가즈아~~~~"
이리하여 진파(進破)와 군사들은 산중(山中)에서 갈증과 허기를 달랜 후
산중(山中) 무리에게서 곡식까지 얻어 군선(軍船)으로 돌아왔다.
진파(進破)가 이 때 마셨던 갈수(褐水)의 맛에 어찌나 감동을 했던지
훗날 그가 저술했다고 알려진 잘라먹기(乽羅薁記)라는 고서(古書)를 보면
"산(山)에서 마신 탁한 술(釄)로 갈증(渴)을 풀었도다"라는 의미의
산미갈(山釄渴)이라는 이름으로 그 갈수(褐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로써 먼 훗날 세상 사람들이 비립빈(非立賓) 갈수(褐水)를 산미구엘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좌군사(左軍司) 치저랑(治抵郞)과 우군사(右軍司) 아이유장(亞二柳將)은
위험을 무릎쓰고 군사들을 먹일 곡식과 물을 무사히 구해 온 공로(功勞)를 높이 사
출병 전 문왕(文王)께서 하사(下賜)하신
길이가 한 자(尺) 세 치(寸)에 굵기가 두 치(寸)인 곤봉(棍棒)과
머리와 한쪽 귀를 보호할 수 있는 투구(鬪具)를
진파(進破)에게 주어 치하(致賀)하였다.
곤봉에는 한 번 휘두르면 '벌판에서 적 아홉을 깨부순다'라는 의미의
야구파타(野九破打)라는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새겨져 있었다 전한다.
곡식과 물을 구한 한국(韓國)의 군선(軍船)은 비립빈(非立賓)을 떠나
노도(怒濤)를 가르며 다시 범아국(梵亞國)으로 향하는 항해를 이어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