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추가정보를 드리자면 이순신장군은 역적의 집안이라고 하여 문과공부를 꽤 많이 하였지만 신분의 한계로 인한 방황의 시기를 거쳐 무과를 가지않았을까 하는 사학가들의 연구가 있습니다또한 장인의 영향(무인)도 있었을거라 추정합니다. 북방에서의 공도 대단하였는데 조선군인 역사상 처음으로 북방이민족의 적장을 생포하는 활약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끈줄이 없었던 이순신이 부패한 관료들과 싸우는 사이 서해 류성룡이 고위 관직에 오르고 그의 천거로 그의 진가를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위에 내용중 좀더 자세하게 할부분은 백의종군후 12척이 살아남을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전장에서 도망친 배설이란 장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명량해전에서 숨을 거두시게 됩니다.
그리고 의외로 많이 모르고 게시는 부분이 왜란은 7년이지만 처음 2년을 임진왜란이라고 부릅니다. 임진년에
일어난 왜의 난이란 뜻이죠. 그리고 3년간의 휴전 그후 2년간의 싸움은 정유년에 다시 일어난 난이라는 뜻으로
정유재란이라고 명칭합니다.
참고로 임진왜란이 아니라 조일전쟁이 맞습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침략했다'가 아니라 '일부 왜인들이 침략해서'가 되는 거거든요.
일본 입장에선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식민사학속에 교묘히 집어놓은 겁니다.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용어를 축소해 놨지만 엄연히 국가간의 전면전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