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관의 치'라는 사극에 나오는 당태종 이세민의 고구려원정 참패에 대한 영상중 일부입니다.
물론 중국사극이고 중국의 왕조 왕들중 칭송받는 당태종 이세민인만큼 패배도 참 아름답게(?) 미화 시켰네요.
또한 동북공정의 본토인 만큼 그들 사관 또한 드라마에서도 여전하다는 것 감안하고 보시길...
*아래 영상들은 역사 스페셜에서 다루었던 "당태종 안시성에서 무릎꿇다"입니다.
*영상들중 바로 아래 첫 영상엔 윗 영상과 달리 당태종의 고구려 패배에 대해 내려오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전해들어 알고있는 중국 강소성 주민들의 증언들이 나옵니다.
*The Goguryeo-Tang War (Battle of Ansi) 1/4 안시성 전투
*The Goguryeo-Tang War (Battle of Ansi) 2/4 안시성 전투
*The Goguryeo-Tang War (Battle of Ansi) 3/4 안시성 전투
*The Goguryeo-Tang War (Battle of Ansi) 4/4 안시성 전투
산세가 복병하고 출입할 만한 곳이며, 고구려와 말갈이 군사를 합하여 진을 쳤는데 방(方)이 40리나 되었다. 황제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으니
황제가 응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연수를 속여 말하기를,
“나는 그대 나라의 강신(强臣 연 개소문(淵蓋蘇文)을 가리킨다)이 군주를 시해한 까닭으로 죄를 물으러 왔다가 싸우기에 이르렀으나 이는 나의 본뜻이 아니고, 그대 나라에 들어와 추속(蒭束)을 공급받지 못하였으므로 그대 나라의 몇 성(城)을 취하였으나 그대 나라가 신례(臣禮)를 닦는다면 빼앗은 것을 꼭 돌려주겠다
육군(六軍)이 고구려에게 패하여 거의 떨치지 못하였고, 염탐하는 자가 고하기를 ‘영공(英公 이세적(李世勣))이 거느리는 흑기(黑旗)가 포위되었다.’ 하니, 태종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을사년 신라 선덕여주 14년, 고구려 왕장 4년, 백제 왕 의자 5년(당 태종 정관 19, 645)
두 달 동안 공을 들여서 쌓았던 토산을 고구려군에게 빼앗기고 안시성을 함락하는 데 실패한 당 태종은 회군을 하는데, 당시의 정황을 『삼국사기』에서는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는데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일을 도왔다.’
『삼국사기』에는 ‘여러 군대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서 사졸들이 습기에 젖어 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명령을 내려 길에 불을 피워 맞이하게 하였다.’
당시 천년제국 고구려는 정규병만 기본 30만 대군을 운용하던 나라였고 전통적으로(고조선시대부터)
매우 발달한 성곽문화를 통해 만주의 요동일대는 대형의 도시형 산성들이 밀집 방어형을 구축하고 있
었습니다.(고구려는 강력한 공성전을 통해 적의 대군을 지연시키고 이후 중앙의 대군을 데리고 와서 쓸어
버리는 형태를 기본으로 함) 이미 5세기 다들 아시는 광개토태왕 시기에 가면 고구려는 풍부한 경제력과 발달
한 철제련 기술을 바탕으로 개마무사라는 탱크형의 말과 사람이 갑옷으로 일체화된 중장보병과 경기병 그
외 도수부나 여러 보병을 혼합한 강력한 돌파력과 육박전 게릴라전을 바탕으로 하여 탁월한 공성전까지 능
숙했고 그런 체계를 극한까지 이루한 나라였음. 그렇기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여 서토를 벌벌 떨게 하던
북방 전투 유목민족들을 제압하여 북방의 패자로 왕중의 왕인 태왕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 남북조시대에 가면 고구려의 전성기인 장수, 문자명태왕시기 북조사의 북위내 고구려계 세종이 등극
하면서 고구려인 고조가 군사를 데리고 가서 북위 조정을 장악해버리는 등 이후 고구려인만을 추대하는
벼슬관직까지 있을 정도로 강력한 고구려를 등에 업고 북조사가 고구려인들의 입김에 좌지되는 상황이